56.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2021.04.12.
“영의정을……?”
“제 아버지께서도 이번 일을 당연히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진의 차분한 목소리에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헌과 대비는 그런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안으로 배후를 찾아내지 못하면 제가 이 간택에서 실격 처리가 되고.”
“…….”
“저는 감히 자작극을 꾸며 간택을 망친 방자하고도 무례한 규수가 되는 것인데, 제 아버지께서도 중전마마께서 내리신 명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영의정 대감을 안으로 들여 이번 일의 처리에 대해 내린 명을 나의 입으로 말하라?”
“예. 제 아버지께서도 직접 듣고 이번 일의 배후를 찾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찾겠다……?”
중전이 물끄러미 소진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물었다.
소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전 앞이라 위축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중전은 소진이 더욱 싫었다.
“응당 그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앞서 말했듯, 세자빈 간택은 저 혼자만의 선택으로 참가한 것이 아닌, 저의 가문을 대신해 온 것이니.”
“…….”
“가문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는 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문의 누명이라는 말에 중전이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소진은 중전이 제 아버지인 영의정을 의지하고 있는 만큼, 그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지금 이 일은 세자인 헌과 그리고 궐의 제일 윗전인 대비보다는 영의정이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통내기가 아니었군……. 영의정을 끌어들이겠다?’
중전의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대비가 소진의 말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 말을 보탰다.
“맞는 말이지요. 한 규수의 가문이 걸린 일인데.”
“…….”
“오늘까지라고 중전께서 못을 박아 두었으니 영의정 대감도 나서서 해결해야 할 수밖에요.”
소진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대비까지 나서니 중전은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럼.”
“…….”
“모두 나가주시겠습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의정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에.
“영의정 대감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그 말에 소진이 한 걸음 물러났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헌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전에게서 물러났다.
“하면 소자도 물러나 보지요.”
“…….”
“그리고 소자는 따로 추국청을 열어 한 규수를 납치한 이들을 문초(問招)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비가 먼저 중궁전을 빠져나가고 그다음 헌이, 그리고 소진도 물러났다.
중궁전을 나서던 대비가 먼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의정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걸음을 멈추어 섰다.
“대비마마를 뵙니다.”
“많이 놀랐겠소.”
“제 여식이 대비마마께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할 뿐입니다.”
“음…… 아니오.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되었지요.”
간단하게 대꾸하며 대비가 영의정을 비켜 가려 하는데 문득, 대비의 걸음이 멈추었다.
“한데 영의정 대감.”
영의정도 그녀를 다시 느리게 바라보았다.
“참 영특하고 지혜로운 여식을 두셨습니다.”
그 말에 영의정의 눈이 커졌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서 말이지요.”
“……아.”
“왜 영의정께서 그리 꽁꽁 싸매고 감추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감추려…… 한 적은 없었사옵니다만. 부족한 제 여식을 그리 봐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영의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앞에서 걸어오는 헌과 눈이 마주쳤다.
-세자 저하께서 구해오셨습니다.
소진을 납치한 자들의 배후도 궁금했지만, 그 순간 어찌 헌이 알고 나타나 소진을 구한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혹, 소진과 원래 면이 있던 사이일까.
영의정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대비가 물러나고 헌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조금 고개를 까딱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중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 여식을…… 저하께서 구해주셨다고요.”
“아, 별거 아닙니다. 잠행 중, 간택 복장을 한 여인이 장정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 구해왔을 뿐이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헌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 뒤에 서 있던 소진이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영의정을 바라보았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헌을 바라보고 있는 영의정.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앙금이 있는지, 소진은 알 수 없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날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랬습니까? 소인이 저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랄 것 없습니다. 영의정 대감의 여식이라 구한 것이 아닌, 간택에 참여한 규수였기에 내가 나선 것이니까.”
“…….”
“대감의 여식이 아니라 다른 규수였어도 똑같이 구했을 거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과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헌의 태도였다.
소진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헌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이내 헌이 영의정을 지나쳐 멀어지고 소진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영의정이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아버지…….”
“괜찮은 것이냐?”
“예. 한데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함정……?”
“중전마마께서 오늘 내로 배후를 찾지 못하면…… 제가 벌인 자작극으로 치부하시겠다 하시었습니다.”
그 말에 영의정의 입매가 비식, 일그러졌다.
“감히…… 내 등에 칼을 꽂겠다는 말이지?”
궐로 오는 내내 머릿속에 흐릿하게 그려지던 중전의 얼굴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
“뭐?! 소진 낭자가?”
“아. 지금은 만나 보실 수 없을 겁니다, 마마!”
소진의 납치 소식은 이내 보은군의 처소까지 닿았다.
서둘러 그녀에게 가려고 처소 밖을 뛰쳐나오는 그를 내관이 막아섰다.
“한 규수께서 저하와 함께 추국청으로 가시었다 했습니다…….”
“아.”
“지금 저하와 함께 계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추국청에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사옵니다.”
소진이 헌과 함께 있을 거라는 말에 보은군의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의지를 상실한 듯, 보은군은 우두커니 서서 담 너머 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처연함이 가득했다.
“보은군 마마…….”
“해서 갈 수 없다는 것이지.”
“아무래도.”
“다친 곳은 없다더냐?”
“예. 무사하다고 들었습니다.”
“배후는? 낭자를 구한 것은 또 누구고?”
보은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배후는 아직 모르옵고, 저하께서 한 규수를 구해 함께 입궐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저하께서 직접?”
“예…….”
“그것은 다행이구나…….”
헌이라면 그녀를 조금도 다치지 않게 잘 데리고 왔을 테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소진의 납치 소식에도 겨우 이 담 하나를 넘지 못하는 신세니.
“……서둘러 출궁을 하고 싶구나.”
보은군의 말에 내관이 고개를 들었다.
“하오나 궐 밖에서 생활하시면 지금보다 더욱 궐과는 멀어지는 것일 텐데요?”
“…….”
“대비마마나 전하의 눈에서 멀어지는 것이니…… 더욱 외롭고 쓸쓸한 날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은애하는 여인이 그런 큰일을 당했다고 하는데도 저 문을 열고 달려가지 못하는 내 신세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그 말에 내관이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다 속상한지 내관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보은군을 향해 말했다.
“영의정 대감마님께나 소용 마마님한테 청을 드리면 아니 되겠습니까?”
“어떤 청을.”
“한 규수와 혼인을 치르게 해 달라고요. 어차피 민 소용 마마님이나 영의정 대감마님께서는 한 규수의 배필로 마마를 생각해 두고 계시었잖습니까?”
“한데 지금은 소진 낭자가 세자 저하의 빈으로 간택 단자를 올리지 않았느냐.”
“……하오나.”
“내가 지금 그런 청을 하는 건, 낭자를 뺏어 오는 것과 뭐가 다를까.”
이내 보은군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추국청에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궐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퇴궐하는 소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관 역시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라 하였어.”
“마마.”
“내 욕심으로 낭자가 아파지는 것은 싫구나.”
“원래 마마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빼앗긴 것은 마마잖아요.”
“……사람이 어찌 누군가의 소유가 되겠느냐?”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보은군의 말에 내관이 감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햇볕이 보은군의 머리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사람을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불행해질 것이야.”
“마마는 참……. 어찌 그리 속 편한 소리만 하십니까. 보는 소신은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은데.”
“그만큼 그 사람을 아끼기 때문이지.”
“…….”
“최 내관에게도 만약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면 지금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야.”
곧 보은군의 발걸음이 추국청이 열리는 곳 앞에 멈춰 섰다.
들어서지도 또한, 넘볼 수도 없는 곳에 헌과 함께 소진이 있을 테였다.
그것이 자신의 세상이었고 자신이 넘을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을 보은군은 잘 알았다.
추국청 쪽으로 눈길 한 번 주고는 보은군은 이내 시선을 접었다.
‘소진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보은군은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걸음을 옮겼다.
***
“집에서 걱정하시겠습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퇴궐해 보시지요.”
소진은 추국청에서 자신이 납치당하던 순간과 그리고 함께 궐을 나섰던 대비전에서 보냈다는 궁녀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헌에게 전했다.
뒷일은 자신이 영의정과 상의해서 할 테니, 헌은 소진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헌과 함께 추국청을 나서던 소진은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안으로 저자들이 실토할까요? 죽어도…… 배후가 중궁전이라는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인데.”
“…….”
“그렇다고 저하께서 보고 들은 것을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헌이 중궁전에 잠입해 있다, 소진의 납치 계획을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뒷짐을 진 채, 소진과 함께 걷던 헌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꼭 있을 것입니다.”
“…….”
“낭자의 부친께서도 힘을 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영의정 대감이 아닙니까.”
그 말에 왠지 소진의 낯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걷기만 하자 헌이 나지막이 소진을 불렀다.
“낭자.”
“예?”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흘 후, 보는 것으로 할까요?”
“아…… 예. 알겠습니다.”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그러면 그날 뵙도록 하지요. 속히 들어가 보세요. 여기서부터는 소인, 혼자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서는 장옷을 뒤집어쓴 채 등을 보였는데.
헌의 시선에 저 멀리서, 소진을 기다리고 있는 보은군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헌은 슬쩍 미간을 구기며 소진의 어깨를 쥐었다.
“데려다주도록 하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바쁘실 텐데 돌아가 보셔요.”
“데려다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예? 궐 밖에서 여종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데.”
“궐 문 앞까지만.”
“…….”
“그래야 할 연유가 방금, 생겼거든.”
그렇게 말하는 헌을 소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보은군이 저벅저벅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연유……요?”
아직 헌의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소진이 그저 눈만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는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보은군 대감……!”
보은군은 헌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조아려 보이고는 다시 소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시지요, 소진 낭자.”
그러자 헌이 보은군의 손목을 묵직하게 잡아챘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한다는 것.”
“……!”
“그것을 모를 만큼 네가 아둔하지는 않을 것인데. 어찌 이리 행동을 가벼이 하는 것인가.”
잔뜩 가라앉은 헌의 목소리에 소진이 놀라 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보은군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헌이 아닌, 소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태 빠질 때라 빠져 드린 채, 예서 기다린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저하께서 낄 곳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
“저하께서 빠져주셔야 할 때인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