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간택은 재진행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21.04.09.
“세자! 이 무슨 망발입니까!”
중전은 소리쳤지만 어쩐지 그 곁에 서 있는 대비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기가 돌았다.
‘급히 잠행을 나가야 한다더니…… 역시 이유가 있었군요.’
갑작스러운 헌의 말에 교태전 안의 규수들은 모두 불안한 얼굴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세자.”
“이 간택,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잠자코 서 있던 대비가 그제야 헌의 곁에 한 걸음 다가서며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다짜고짜 멈추라 하시면 어쩝니까, 세자. 연유를 말해보시지요.”
그러자 중전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세차게 소리쳤다.
“연유는 무슨 연유입니까! 이걸 지금 말이라고 들어주시겠다는 겁니까? 떼를 써도 유분수지. 한 나라의 국본(國本)이라는 세자께서 간택 장에 함부로 들어와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간택을 멈추어라?”
이내 그녀는 허, 하고 콧방귀를 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헌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끄러미 중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모두 해보라는 듯, 중전의 말을 고스란히 듣고만 서 있었다.
“대체 왜 이리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하시는 겝니까!”
“누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인지는 이제 따져보지요.”
“뭐……요?”
미사여구 없이 단조롭게 그 말을 뱉어낸 헌이 반쯤 열린 중궁전 문을 돌아보았다.
“들라.”
명료한 두 글자에 누군가가 중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 얼굴을 확인한 중전과 대비는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
“대감마님……! 대감마님!”
안에서 종일 간택 소식만 기다리고 있던 영의정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숙자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서둘러 안채를 나서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화원에서 꽃을 가꾸고 있던 최씨 부인도 덩달아 경직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소진이는?”
“하아…… 하아……. 대감마님.”
“소진이는 어쩌고 너만 온 것이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숙자를 돌아보며 영의정이 물었다.
“누가 아씨를 납치했었어요……!”
“뭐?!”
“속히 궐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감마님.”
그 말에 영의정과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소진이는! 소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데.”
최씨 부인은 몸을 벌벌 떨며 숙자를 바라보았다.
행여 소진이 변이라도 당하였을까, 가슴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아씨는 무사하셔요. 그런데 누군가가 아씨의 간택을 방해하려고 납치를 했다가…….”
“했다가. 어찌 되었는데!”
영의정의 호통에 숙자가 어깨를 잘게 떨며 말을 이어갔다.
“세자 저하께서…… 구해오셨습니다.”
“뭐? 세자가……?”
뜻밖의 말이라는 듯 영의정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갔다.
부인은 숙자의 팔을 잡으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무사한 것이지? 응? 우리 소진이 다친 곳은 없는 것이지?”
“예. 지금 궐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감마님께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한데 배후는.”
소진이 무사하다는 말에 그제야 영의정의 머릿속이 번쩍,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감히 이 영의정의 여식을 납치하고 감금한 이가 누구냐는 말이다!”
불같은 호통에 숙자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것까지는 쇤네도 아직……. 지금 궐에서 그 배후를 밝힌다고 하니 서둘러 가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영의정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꾹 말아 쥔 주먹도 그 분기를 참아내지 못하는 듯 부들부들 떨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씨 부인이 영의정의 팔을 쥐었다.
“괜찮습니까, 대감?”
“소진이가 얼마나 놀랐을지……. 대체 누가 그런 장난을.”
“……하필 재간택이 열리고 있을 때 이런 일이.”
“흠.”
“재간택을 방해하려는 자일까요? 하면 세자빈 후보에 함께 거론되고 있는 가문 중의 하나가…….”
최씨 부인의 말에 영의정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은 아닐 것이오.”
“어째서요?”
“세자빈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가문들은 이미 내가 소진이를 세자빈에 앉힐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지.”
“…….”
“하니 이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설쳐댈 필요가 없소.”
그는 부들부들 떨며 눈을 세차게 홉떴다.
분기로 꽉 찬 그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번쩍, 벼락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 소진이의 세자빈 간택을 막고 싶어하는 사람.”
영의정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그자의 소행이겠지.”
***
“너는.”
중전의 목소리에 옅은 떨림이 묻어나 있었다.
소진이 자박자박 중궁전 안으로 들며 고개를 조아렸다.
발 너머의 중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소진은 채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은 짐작이 갔다.
‘왜 내가 저하와 함께 이곳에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요.’
소진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늦었사옵니다.”
소진의 등장에 대비의 눈이 반짝였다.
중전은 흐트러지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때, 가만히 소진을 내려다보던 헌이 입술을 뗐다.
“겪은 일을 모두 말하라.”
“…….”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헌의 명령에 소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서책을 구하기 위해 저잣거리로 갔으나 채 구하지 못하고 환궁하게 되었사옵니다.”
소진의 말에 중전이 피식, 옅은 조소를 뱉으며 대답했다.
“해서 세자에게 이 간택을 물려달라 조르기라도 한 것이냐?”
그러자 소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좀처럼 중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까랑까랑한 목소리만 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설마요.”
“…….”
“저는 제 가문을 등에 지고 간택에 참여한 것입니다. 한데 그런 제가 감히, 그런 어리석은 짓으로 제 아버지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겠습니까?”
“무어라?”
“마지막 간택 과제를 수행하던 중.”
“…….”
“소인,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납치를 당했고 지금까지 숲에 감금당해 있었습니다.”
소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간택 장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비 역시, 화들짝 놀라며 소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헌은 그저 덤덤한 얼굴로 중전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놀라는 듯하던 중전은 이내 슬쩍 미간만 구긴 채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겉은 애써 무감하게 굴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다.
“한데 다행히 저하께서 구해주시어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즉각 반응을 보이며 혀를 차는 대비와 달리 중전은 말이 없었다.
다만 세자가 구해주었다는 말에 중전의 고개가 천천히 헌을 향해 돌아갔다.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헌은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중전의 얼굴을 지그시 훑고 있었다.
“세자께서요……?”
높낮이 없는, 그래서 더 싸늘한 듯한 중전의 목소리였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헌이 슬쩍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 다행히도 소자가 한 규수를 구해왔습니다.”
“큰일을 하시었네요. 한데 한 규수와 원래 면이 있는 사이였습니까? 어찌, 적시 적격에 세자께서 딱 나타나 한 규수를 구하였는지가 의문이라서요.”
그 말에 대비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는데, 소진이 불쑥 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대신 대답했다.
“우선 규수들을 물려주시겠습니까? 하면 소인이 소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직 간택이 끝난 것이 아니다. 어디 방자하게 내 명 없이 규수들을 물리라 말라, 하는 것이냐.”
그러자 헌은 난감하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슬며시 쓸어 보이며 중전에게 대꾸했다.
“하면 이 규수들이 다 듣는 데서 왕실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간과한 채, 한 규수와의 연을 이야기해야겠습니까?”
헌의 말도 옳았기에 중전은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대비가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걸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오늘 간택은 여기서 끝을 내는 것으로 하겠소. 재간택 재진행 여부는 차후 알리도록 할 것이며 오늘의 간택은 아무래도 여기서 갈무리해야겠습니다.”
대비의 말에 중전이 소리쳤다.
“아니 됩니다, 그것은!”
“간택에 참가했던 규수가 과제를 수행하던 중 납치를 당하는 변을 겪었는데, 간택을 강행하시겠다고요?”
“그건 어디까지나 한 규수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자 헌이 나섰다.
“물증과 증좌도 없이 감히 소자가 간택을 중단시키려 하겠습니까?”
“간택에 자신이 없었던 한 규수의 자작극일 수도요.”
그 말에 대비가 언성을 높였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중전?”
“억지인지 아닌지는 따져보아야 할 일이지요.”
“그럼 이 규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것을 따져, 왕실의 체통을 깎아 먹을 셈입니까? 그대와 내가 빽빽 소리나 지르며 설전을 펼치는 것을 이들에게 보이자는 것이냔 말입니다.”
그러자 상궁들도 모두 중전 곁으로 모여 일단 규수들을 내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올렸다.
이대로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았지만, 중전은 하는 수 없이 한 수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상궁들은 규수들을 모두 중궁전에서 내보냈다.
중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발 뒤에 앉았다.
‘중전의 얼굴을 한번 보았으면 싶은데…… 도통 볼 수가 없구나.’
소진은 자신을 그렇게까지 간택에서 떨어뜨리려 한, 그녀의 괘씸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조선의 국모 자리에 오른 저 여인은 제 또래의 앳된 여인이라고 했다.
어떻게 생겼을지, 소문처럼 표독스럽게 생겼을지 궁금했지만 도통 중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국모의 얼굴을 함부로 볼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출산을 앞둔 만삭이라 행여 부정(不淨)이라도 탈까 조심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중전이 피곤한지 지친 얼굴로 대비를 바라보았다.
“소첩은 이만 쉬어야겠습니다.”
“한 규수를 납치한 배후를 함께 가려보지 않고요?”
대비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중전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나까지 나설 필요가 무엇 있겠습니까? 대비마마께서 어련히 알아서 가려내시겠지요. 무려 한 규수가 당한 일이니.”
“……중전.”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배가 당깁니다. 저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대비마마와 세자께서 한 규수가 당한 일을 들어보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시지요.”
그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시시비비라는 말에 헌이 발 뒤의 중전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중전이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는 듯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헌이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시시비비는 아니지요. 지금 이 일에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중전마마.”
“…….”
“한 규수께서 납치를 당한 것은 저명한 일, 하니 이 일의 배후를 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배후를 가려보시라고요, 어디.”
“…….”
“납치범들을 생포라도 해서 궐로 데려온 모양인데 하면 그들의 입을 열게 해, 오늘 안으로 배후를 밝히시지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소진의 고개가 정면을 향해 세워졌다.
“범인들도 잡았겠다, 배후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중전마마.”
“오늘 안으로 밝히지 못한다면.”
중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한 규수가 자작으로 벌인 일이라 결론짓고 한 규수를 탈락시킨 후 오늘의 재간택은 별 탈 없이 진행된 것으로 하며.”
“……!”
“마지막 삼간택도 차질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중전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때는 아마 믿는 구석이 있어, 그럴 것이었다.
중전의 수족이라면 절대, 배후가 그녀라는 것을 저들이 토설하지 않을 테였다.
일이 점점 더 꼬여가고 있었다.
헌과 소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묘안을 생각해 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중궁전 문이 열리고 중궁전 상궁이 쪼르르 달려와 중전의 곁에 섰다.
그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밖의 상황을 전했다.
“지금 영의정 대감께서…… 중궁전 앞에 와 계시다, 하옵니다.”
그 말에 소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라 하여라. 아무래도 제 여식이 납치를 당했다 하니 놀라 버선발로 뛰어온 모양인데.”
“…….”
“내 지금은 심신이 지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한 규수, 그대는 지금 당장 나가 부친에게 무사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고.”
그것을 끝으로 중전은 모두 나가보라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뻔뻔하고도 태연한 중전의 태도에 헌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려던 그 순간.
“제 아버지를…… 들어오게 해주십시오, 중전마마.”
묵묵히 발만 응시하던 소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마의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저의 믿는 구석은 미우나 고우나 제 부친이신 영의정 대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