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이 간택, 멈추시지요.
2021.04.05.
“궐 사람은…….”
헌의 물음에 소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의 일을 더듬는 그녀의 낯빛이 어두웠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는 궐 사람은 없었기에 소진이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없었사온데, 어찌 그리 물으십니까?”
“아. 없었습니까?”
들려온 소진의 대답에 헌은 애써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낯빛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어둑해지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입술을 조심스레 떼는 소진.
“어찌 그러셔요?”
이내 갑작스럽게 그날의 일을 묻는 헌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 밖의 사람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의 빛나는 갈색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담뿍 담겼다.
조금 놀란 듯하지만 뭔가 알 것도 같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였다.
“혹시……?”
초롱초롱 반짝이는 소진의 눈을 내려다보고 있자, 헌은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중에요.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설마……! 혹 기억이 나신 겁니까?”
“그것이…….”
“어떡해! 참입니까? 어쩜 좋아, 너무 잘 되었어요!”
헌이 채 말을 잇지도 않았는데 소진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놀랐다.
그 모습이 너무도 예뻐 보여 헌의 입가에 미소가 마르지 않았다.
곧 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소진의 팔을 꼭 그러쥐었다.
“아니요. 기억이 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환히 웃던 소진의 미소가 멈칫했다.
“예? 기억난 것이…… 아닙니까?”
“1년 동안 조금도 나지 않던 기억이 어찌 거짓말처럼 단번에 나겠습니까. 한데 조금 전.”
“……조금 전이요?”
“이곳으로 오다가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장면이라 하시면.”
“풍등제가 열리던 그날 밤, 누군가를 황급히 뒤쫓던 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풍등제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급히 헤집으며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던 모습이요.”
맞았다.
소진의 기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얼굴을 그래서 보시었습니까? 누군지 기억하시겠어요?”
소진의 가슴도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제발, 김 도령이라는 작자의 정체를 헌이 알아내기를 속으로 무수히 바랐던 소진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하니 소진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헌은 그녀가 제게 원하는 답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번에도 그 대답을 들려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했다.
헌이 대답을 하는 대신 자신의 시선을 씁쓸하게 회피하자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이미 들은 것 같았기에.
“괜찮습니다. 뭐,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내 헌의 등을 토닥이며 소진이 그를 위로해주었다.
헌은 아래로 접었던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 고정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저하. 어쨌든 오늘 한 장면이 떠올랐으니 다음번에는 여러 장면도 오늘처럼 떠오를 것입니다.”
어린아이 달래듯이 소진이 그를 연신 위로했다.
그 모습에 어쩐지 헌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헌은 부러 소진의 장단에 맞춰 주며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럴 수 있지요. 조만간 모든 기억이 떠올라서 그들의 정체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어요.”
자신도 실망했지만, 저보다 헌이 더 실망했을 테니 소진은 씩씩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런 소진이 참, 예뻐 보였다.
“낭자를 좋아하기 참, 잘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 예?”
“같이 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요.”
갑작스러운 그 말에 그녀의 뺨에 노을빛이 물들었다.
“어찌 그런 말을…… 막…… 하시는지요. 부끄럽게.”
손부채질하는 소진을 바라보던 헌이 그녀의 손목을 지그시 쥐었다.
“우선 나가시지요.”
헌이 그녀를 붙들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소진이 그의 손을 다시금 제지했다.
“한데 재간택을 멈추신다고 하시면…….”
“…….”
“무슨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만 믿으라는 듯 헌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당연하지. 나는 대책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헌이 굳게 닫혔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는 헌이 데리고 온 호위대들이 소진을 납치해 온 자들을 모조리 잡아 결박해 놓은 상태였다.
소진은 그들을 사나운 눈빛으로 돌아보며 울분을 삼켰다.
“감히…… 간택에 참가한 규수를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금을 해?”
“…….”
“그대들의 죄목을 소상히 따져 엄벌을 내려달라, 내 직접 중전마마와 대비마마께 청할 것이니 각오들 해야 할 겁니다.”
소진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함께 그들을 내려보던 헌 또한, 묵직한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지금 당장 이들을 궐로 끌고 가라!”
“예, 저하!”
배후가 중전이라는 것은 저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실토할 것인지, 혹은 중전이 자백할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소진을 위협한 자들의 배후가 중전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 역시 헌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간택을 중단시키는 것이 더 급했다.
그렇게 명을 내린 후, 헌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곤 윤현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 규수를 가마에 태우고 궐로 모시고 오거라.”
“예, 저하.”
언제 준비해온 것인지 이내 가마가 소진의 앞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영의정의 여식이고 간택에 참가한 규수였으니 그냥 막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르시지요. 한 규수.”
보는 눈이 많아 그런지, 소진을 쳐다도 보지 않고 헌은 그렇게 말했다.
소진 역시 반듯하게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이며 가마에 올라탔다.
“감사하옵니다, 저하.”
가마꾼들이 소진을 태운 가마를 번쩍 들어 산길을 앞서 걸었다.
헌도 너울을 길게 늘어뜨리며 가마 옆을 따랐다.
그의 뒤로는 줄에 묶인 무사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걸었다.
곧 숲속을 지나 저잣거리에 다다르자, 사람들은 힐끗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마 안에서 잠자코 있던 소진은 문득 밖의 동태가 궁금해 슬쩍 가마 창을 열었다.
괜히 아까 전, 납치당한 일이 떠올라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헌이 직접 내어준 가마라는 걸 알면서도 소진은 괜히 밖을 확인하게 됐다.
“아.”
그러자 헌이 가마 바로 옆에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스르륵 창이 열리는 소리에 너울을 늘어뜨린 헌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보드랍게 교차했다.
“불편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 헌의 목소리가 너무 포근해, 순간 소진의 동공이 옅게 흔들리고 말았다.
“아닙니다…….”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헌은 소진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그녀가 슬쩍 열었던 창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갑갑한 모양입니다.”
“잘……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여서.”
그 말에 헌이 나지막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곤 오직 소진만 볼 수 있게 한 손으로 슬쩍 너울을 거두며 입술을 달싹였다.
“잊었습니까.”
“예?”
“내가 낭자의 전용 호위무사인 것을.”
한 나라의 왕세자가 어찌 한낱 규수의 호위무사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일까.
헌의 목소리에 조금 놀란 듯 소진이 입술을 슬쩍 벌렸다.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다시금 너울을 늘어뜨렸다.
“하긴 호위무사만 하기엔 아까운 외모이지요?”
소진도 그를 따라 슬쩍 미소를 피우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한데 간택이 어그러지면…… 남은 간택은 어찌 될는지요.”
혼잣말처럼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말에 작게 대꾸했다.
“재간택이 다시 치러지든, 아니면 재간택 결과와는 상관없이 삼간택이 미루어지겠지요?”
“……저하께서 중궁전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봉희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꼭 제게도 알려주셔요.”
깊은 눈을 한 헌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뒷짐을 지었다.
조금 전보다 더 은밀한 목소리로 소진을 향해 슬쩍 몸을 기울이는 헌.
“당연하지요. 오늘 일이 갈무리가 되는 대로 연통을 넣겠습니다.”
“예.”
“오늘 제가 본 것 모두를 설명할 테니 꼭 나오시지요.”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아무래도 간택이 중단된다면 제일 실망할 사람은 중전일 것이었다.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런 발칙한 일까지 벌였는데 노력이 물거품이 될 터니.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소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어찌 하올까요, 대감마님.”
“하……. 지금 당장 배를 타야 하는데! 대체 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감히…… 관아까지 나서서 나를 잡아 들려고 하는 것인가.”
이미 헌의 명령으로 항(港)에는 모두 헌이 그려 준 포졸들이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서둘러 배를 타고 한양을 떠나려던 김 도령은 발목이 잡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부인은 어디에 있는가.”
“대감마님께서 한양을 떠나시면 이어 배를 타시기로 했습니다만.”
“내가 연통을 넣기 전까지 잘 숨어 있으라 하여라.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며 김 도령은 다시금 항을 지키고 서 있는 포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체…… 놈은 무엇을 하는 작자일까.”
그러면서 어렴풋이 보았던 헌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김 도령.
그러다 그날, 산속에서 자신에게 쏘아붙이던 소진의 모습도 눈앞에 그려보았다.
“같은 패거리겠지. 그러니 나를 그런 눈으로 보며 감히…… 그런 상황에서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언성을 높였던 것이겠지.”
이내 김 도령은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 이마를 쓸며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그날 처리를 해야 했었나.”
무감한 목소리로 말을 잇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자신의 곁을 따르는 무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은 여인들은 어찌 처리했는가.”
“평소대로 처리하였습니다.”
평소대로라는 말에 김 도령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이 와중에 부인께 여인을 골라 보냈단 말이냐?”
“예. 안방마님께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을 진행하겠다, 직접 명령을 내리셔서요.”
“그랬느냐? 이런 때일수록 조심해야 할 것인데.”
“하온데 바로 직전에 안방마님께서 선택한 여인들을 아직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벌써 약조한 기간이 지나지 않았느냐?”
“그것이…… 문제가 생겼다고 하여서요.”
“어허, 거래에는 시간이 금이거늘.”
못마땅하다는 듯 김 도령이 혀를 차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곤 갓을 더 깊이 눌러쓰며 자신의 얼굴이 곳곳에 벽보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 지금 직접 부인에게 갈 것이다.”
“예, 대감마님.”
“놈이 나를 잡기 전에 내가 먼저 놈을 잡아야겠다.”
***
“한 규수만 빼고 모두 답을 제출하였습니다.”
상궁의 말에 중전이 흠칫 놀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각이 얼마나 남았지?”
“일각 조금, 남았사옵니다만. 어찌 하올까요?”
“제시간에 제출하지 못하면 실격처리를 해야지. 뭘 어찌해.”
그렇게 말하며 중전이 부른 배를 감싸 쥐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곤 굳게 닫힌 채, 열릴 생각을 않는 중궁전 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한데 나를 너무 원망치는 말아라. 너와 네 아비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내 손수 도움을 준 것이니.’
그때, 문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비마마 납시셨사옵니다.”
굳이 대비가 지금 중궁전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 과제는 중전과 상궁들이 채점하기로 하였는데 어찌 발걸음을 한 것인지.
중전은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발 너머의 문을 바라보았다.
중궁전 안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규수들도 숙덕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뫼시어라…….”
찝찝한 얼굴로 중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중궁전 문이 열리고 대비가 고고한 자세로 휘적휘적 들어섰다.
그러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규수들을 매서운 눈으로 살피던 그녀가 무지근하게 입술을 뗐다.
“한 규수가 안 보입니다만?”
그 말에 중전이 피식, 웃으며 대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
“간택 과제를 하는 내내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 포기를 한 것인지.”
대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어째 한 규수의 불참이 반갑다는 듯이 들립니다?”
그러자 중전이 호호호, 소리 내어 웃으며 그럴 리가 있겠느냐, 대꾸하기 위해 붉은 입술을 떼었는데.
“세자 저하 납시오……!”
갑작스러운 그 목소리가 중전의 목구멍을 턱, 막고 말았다.
“세자……?”
세자라는 말에 중궁전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중궁전 문으로 향했다.
들어오라는 소리도 없었는데 헌은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허! 이게 무슨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입니까, 세자! 지금은 간택 중입니다!”
중전이 발 뒤에서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러자 헌이 그 앞에 멈춰 서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세자! 규수들이 보고 있습니다.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어찌 이리 불쑥 나타나, 간택을 망치십니까!”
물러나지 않는 헌에게 다시금 중전이 소리치자 이번에는 헌이 그것참,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씩, 웃었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규수들을 돌아보며 무지근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뭐요?”
“소자가 이 간택을 망친 것입니까?”
“……?”
이내 헌은 다시, 발 너머의 중전을 바라보며 그 차가운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하면 이 간택, 멈추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