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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내가 지킨다고 했잖아. (53/125)

53. 내가 지킨다고 했잖아.

2021.04.02.

반 시진 전.

마지막 간택 과제를 규수들에게 공개한 직후 중궁전으로 돌아온 중전은 뜨거운 차를 들이켜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교활하고 영특한 아이다. 작전을 바꾸어야겠다.”

그 말에 잠자코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상궁이 번뜩이는 눈으로 고개를 세웠다.

“어떻게 하올까요?”

“각 규수에게 붙일 궁녀를 중궁전 아이로 바꿔치기할 수 있겠지?”

“그 정도는 간단하지요.”

중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중전마마께 잘 보여야 할 연유 또한, 없다고 생각하옵니다만.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세운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말을 뱉어내던 소진.

“하!”

그녀를 다시금 떠올리던 중전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나를 무시한 게지? 영의정의 여식이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자신에게 거침없이 쏘아 뱉던 소진의 말을 곱씹던 중전의 눈동자에 어쩐지 물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꼭, 대비마마께 잘 보여야 합니까? 어째서요?

그러다 어린 시절, 자신이 제 아버지께 했던 말이 묘하게 떠올랐다.

-저는 왕의 부인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대비마마의 며느리가 아니라요.

-김진희,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인 게야!

-대비마마의 며느리도 또한, 세자의 어미도 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너, 너……!

-오로지 왕의 부인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

-국구(國舅)가 되실 생각은 마세요. 꿈도 꾸지 말란 말입니다. 국구라는 권한 또한 오롯이 제 몫이고 내가 희생해서 얻을 대가니까요.

-몰락한 양반의 여식이지만 감복할 만큼 똑똑하고 영민해, 내 그때 너를 수양딸로 삼은 것이 화근이었구나……! 감히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은혜요? 돈 때문에 친부는 날 이곳에 팔았고 결국, 내 발로 궐에 들어가지 않으면 내 종착지는 기방이라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압니까?!

애써 가슴에 묻고 살았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말았다.

중전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며 입술을 악물었다.

망한 양반의 여식이라며 자신을 내내 멸시하던 수양가족(收養家族)들의 목소리가 쟁쟁히 귓가를 울렸다.

“중전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 아이를 보면…….”

“예?”

“영의정의 여식, 한소진. 그년이 내 지옥 같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구나. 하니, 더 내칠 것이야.”

“마마……!”

“절대…… 절대 그 아이와 내가 이 궐에 같이 살 수는 없어!”

“분부만 내려주시옵소서. 마마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상궁의 말에 중전은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곧, 그녀의 달아오른 입술 사이로 거센 숨이 흘렀다.

“한 규수에게 새로 붙일 궁녀에게 자신을 대비전에서 보낸 궁녀라 소개하고.”

“…….”

“감시의 눈을 받는 것 같으니 다른 길로 잡자, 그리 한 규수에게 전하라고 하라.”

“예, 마마.”

“해서 한 규수를 안심시킨 뒤 바로 습격하도록 하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상궁이 중궁전을 빠르게 빠져나가고 중전은 자리에 누웠다.

부른 배를 움켜쥐는 그녀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

“하아, 하아…….”

소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그런데 궁녀를 따라 뛰어온 곳은 더 으슥한 곳이었다.

인적이 끊긴 골목 한 귀퉁이, 소진이 주위를 살피며 궁녀를 바라보았다.

“이보시오. 여기를 어찌…….”

그때였다.

소진이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그녀의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얼굴 위로 헝겊 같은 것이 씌워졌다.

“읍……! 읍!”

황급히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무리였다.

‘속았어! 속은 것이야!’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버린 소진.

어디선가 헌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끌고 가!”

장정 하나가 얼굴이 모두 가려진 소진을 번쩍 안아 올렸다.

소진은 이대로 손 놓고 끌려갈 수만은 없기에 손톱을 세워 장정의 목덜미를 거세게 할퀴었다.

“앗!”

얼마나 세차게 긁었던지 그의 목에는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이년이!”

“그럴 시간 없어! 속히 가자고!”

‘감히 영의정의 여식을 이런 식으로 공격해? 중전 자리를 걸고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것이겠지.’

이제 돌아가는 대로 영의정에게 모든 것을 고하고 중전 쪽 무사 중 목덜미에 긁힌 자국이 있는 사람을 찾으라 할 요량이었다.

소진은 온 감각을 귀 끝에 곤두세웠다.

흙길이 지나고 숲으로 가는 듯, 사그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택이 끝나는 시간까지 지키고 있으면 된다.”

아무래도 마지막 간택 과제를 기권 처리 할 모양이었다.

점점 산 깊숙이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소진은 점점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깊숙이, 더 깊숙이로 향하는 것 같은데 좀처럼 헌의 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저하, 반드시 소인을 구하러 와주실 것이지요? 지켜주겠다던 그 약조, 잊으신 거 아니시겠지요?’

자신을 명료한 눈을 바라보며 반드시 지키겠다던 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소진은 헌을 믿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

삐걱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소진은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헌은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인지,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소진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앞이 가려진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두 손은 묶여 있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점점 더 시각은 지체되어 갔지만, 그녀를 구해주러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소진이 집중했다.

“본때를 보여주라는 명이 있었소. 간택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지키고 서 있다, 간택이 모두 끝나면 이곳에 홀로 내버려 두고 해산하시오.”

그 말에 소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몇 시진이고 홀로 있으라는 소리였다.

“우웁! 웁!”

소진은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무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겨우 문밖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문밖에서는 대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고 소진은 철저하게 이곳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저하……. 저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그녀는 애타게 헌을 찾았다.

오늘만큼은 그가 제바람대로 나타나 주길 바랐다.

홀로 어두컴컴한 곳에 갇히니 더욱 그가 절실해졌다.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다,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이들에게 호기롭게 경고까지 했지만.

사실, 소진은 지금 무척 겁이 났다.

이대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하도 버둥거려 뒤로 묶인 두 손은 아릿해져 왔다. 

동시에 소진의 가슴도 아파졌다.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까? 정녕, 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절망에 빠진 소진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지고 있던 그때.

“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장정들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순간, 소진의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했다.

그녀는 넘어진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이윽고 닫혔던 문이 다시금 삐걱,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누군가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발이 멈춰 서고 그토록 기다렸던 목소리가 소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모두 추포하라!”

‘저하……?!’

잔뜩 날이 선 헌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던 공기를 세차게 갈랐다.

“낭자!”

헌은 서둘러 소진의 얼굴에 씐 천을 벗겨 주었다.

그제야 환한 빛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고 눈물로 엉겨 붙은 소진의 눈꺼풀이 느리게 떠졌다.

“미안합니다……. 미안하오, 낭자.”

그는 소진의 결박된 손과 입에 물린 재갈도 제거해 주었다.

“저하!”

그러자 긴장이 풀린 소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와락, 헌을 끌어안고 말았다.

“낭자…….”

“오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흐윽. 저를 잃어버려서…… 못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헌이 따뜻하게 소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윽……. 흑.”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꼭…… 지킨다고.”

윤현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문을 닫아주었다.

밖에서는 헌이 데리고 온 무사들이 소진을 여기까지 끌고 온 장정들을 생포하고 있었다.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소진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헌을 바라보았다.

헌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어주며 나지막이 미소를 터뜨렸다.

“어찌나 꼭꼭 숨어 있던지.”

“…….”

“찾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이대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낭자가 죽도록 내가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방금까지는 내버려 두었잖습니까.”

소진이 훌쩍이며 헌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헌은 그런 소진이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 다시금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나도 이곳까지 오는 내내 함께 묶여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예?”

“달리고 있는데도 두 다리가 꽁꽁 묶인 듯, 더디 움직여 죽는 줄 알았거든요.”

“…….”

“그뿐입니까? 누가 내 눈을 가린 듯, 자꾸만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습니다.”

소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낭자가 걱정되었거든.”

“저하…….”

이내, 헌이 속상하다는 얼굴로 소진의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한데 이건…… 예상 못 했네. 내가.”

“…….”

“많이 아팠겠다.”

그 말에 소진은 슬쩍 손목을 등 뒤로 감추었다.

“괜찮습니다. 이까짓 것…….”

이제야 마음이 놓인 듯, 그녀답게 센 척도 해 보이는 소진.

헌은 등 뒤로 감춘 소진의 손목을 다시금 살며시 쥐었다.

“미안합니다. 늦어서.”

“지금이라도 와주어…… 고맙습니다. 저하께서 오시리라는 걸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실은 무서웠습니다.”

“나도 조금이라도 낭자가 다칠까,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이 소진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소진은 휘청이며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찌할 생각입니까?”

그녀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내며 밖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소인은 저하께서 몰래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해서 저만 데리고 가실 줄 알았는데.”

이것은 소진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저들을 생포했다는 것은 지금 당장 궐로 데리고 가, 배후를 추궁하고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장 이 일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후는 중궁전이었고 저들을 데리고 간다 한들, 중전이 내가 한 짓이라 나설 일은 없을 테였다.

그들 역시, 절대 중전이 배후라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고.

소진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당장 궐로 데려가 이 일을 모두 알릴 것입니다.”

“……예?”

“해서 간택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간택을 멈추게 한다는 헌의 말에 소진이 멈칫하고 말았다.

“내일 봉희 댁이 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예? 봉희를 만난 것입니까?!”

그러자 조용히 하라는 듯, 헌이 자신의 검지를 제 입술에 갖다 대 보였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일 궐 밖으로 모두 보내버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갇혀 있는 듯한 지하 통로도 중궁전에서 발견했고요.”

헌의 목소리가 낮고도 은밀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소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중궁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창백하게 질려가는 소진을 바라보며 그는 다시금 입술을 뗐다.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한데 낭자, 내 그날 밤과 관련해서 급히 물을 것이 있는데.”

그날 밤이라는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그날 밤이라 하시면…… 그때 그, 습격을 당하신……?”

“예. 혹, 나를 공격하고 사라진 이들 중.”

“……?”

“궐 사람은…… 없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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