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그날의 기억. (52/125)

52. 그날의 기억.

2021.03.29.

“뭐라? 모면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정녕 무슨……!”

중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드렸다.

이내 호통이라도 치려 자세를 고쳐 앉는데 대비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을 가로챘다.

“들어봅시다.”

“……대비마마?”

“이것도 과제 답변의 일부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중전의 입술이 맞물렸다.

과제 답변의 일부라 하면 이리 경망한 태도, 무례한 언사가 고스란히 감점으로 남을 테였다.

중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그래, 들어나 보지요. 왜 모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

소진은 중전의 물음이 떨어지자, 가볍게 고개를 조아렸다.

“소녀는 이 꽃을 가져온 것을 실수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하니 모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중전마마.”

“실수가 아니다…….”

“저는 지금도 이 꽃이 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생각하고 있고 과제에 올릴 답으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꽃을 올린 것에 대해 모면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그것은 소진의 말이 옳았다.

대비가 생각해도 소진이 그 꽃을 답으로 올린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애써 수습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대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중전은 여전히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피식 실소만 뱉어내고 있었다.

대비는 흡족한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더 나눌 의견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아라.”

“…….”

“이 간택 장에서만큼은 눈치 볼 것 없이 그대들의 생각을 모두 뱉어내도 좋으니.”

그 말에 소진이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내내 중전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한 규수, 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잊었느냐?

겁박이라도 할 요량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중전.

소진은 입술에 힘을 주어 말을 뱉어냈다.

“대비마마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라 하시어 이어 말하자면…… 중전마마께 잘 보여야 할 연유 또한, 없다고 생각하옵니다만…….”

“뭐라?”

중전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비 역시, 흥미진진한 얼굴로 소진에게서 시선을 고정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간택이지 않사옵니까? 세자빈을 간택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세자빈 간택이란 이 자리에 있는 규수들의 인성과 품격, 그리고 내면의 가치 등을 대비마마와 중전마마, 그리고 상궁 마마님들이 모두 함께 점수를 따져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아.”

“한데 어찌 단 한 분께 잘 보이려 애를 쓰겠사옵니까?”

일침을 맞은 듯한 느낌에 중전의 뺨이 얼얼해졌다.

대비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느리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 중전이 대비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다 다시금 소진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군.”

간택 장 안의 규수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며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소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건방지다니요? 아주 오래간만에 생각과 관념이 바로 잡힌 규수를 본 것 같아 내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인 것을요.”

“대비마마……! 감히 한낱 규수 주제에 이 나라의 국모인 나의 의견을 부정하고 나를 가르치려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건방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전의 호통에 대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은 중전을 향한 명백한 조소였다.

중전은 대비의 웃음에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릇이 그것밖에 아니 됩니까, 중전?”

“……뭐요?”

“어찌 한 규수의 말을 그리 해석해 마음속에 담습니까. 중전의 의견을 부정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제 생각을 윗전인 중전에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함께 의견을 나누자는 것인데. 어찌 그리 속 좁은 생각만 하시는지. 쯧쯧.”

대비는 아무래도 소진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중전은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자신을 대하는 소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소진의 간택 점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형편없을 것 같았다.

상궁들은 분주히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며 손을 움직였다.

소진은 개의치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전과 대비를 향해 바르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돌아섰다.

‘영의정의 여식……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구나.’

대비는 멀어지는 소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말아 물었다.

***

‘이번 과제에서 분명 날 방해하는 무리가 나타날 것이라 하였지?’

소진은 세 번째 과제 ‘백성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골라오기’가 적힌 종이를 품에 넣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궁들은 규수들에게 궁녀 하나씩을 배정해주었다.

“지금부터 그 궁녀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가 과제에 올릴 서책을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서책 방에서 구매해도 좋고 집에서 가지고 와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한 시진 뒤, 모두 중궁전 앞에서 모이십시오.”

드디어 중궁전에 들어가 볼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소진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저와 함께하시면 되옵니다, 아씨.”

그때, 궁녀 하나가 소진의 곁에 와 섰다.

소진은 조금 경계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예, 잘 부탁드리오.”

그 궁녀와 함께 소진이 궐 밖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제 곁을 따르는 궁녀를 묵묵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는 모든 것을 알고 나를 따르는 것이냐, 아니면 너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는 것이냐.’

절대 뜻대로 해 주지 않을 것이라 마음먹으며 소진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또한, 그 모습을 윤현 역시 뚫어지라 응시하며 속히 헌에게 알리기 위해 등을 돌렸다.

“아씨, 궐 밖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소진의 옆에서 잠자코 따르던 궁녀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진이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저잣거리의 서책 방으로 향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

“저하, 지금 한 규수께서 궐 밖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윤현이 고개를 들었는데 헌이 무사 복을 벗고 있었다.

복면까지 모두 벗은 채, 잠행 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것이었다.

“저하, 어찌…….”

“숨을 필요 없다.”

“예?”

“이번 간택은 내 손으로 중단시킬 것이니.”

의미심장한 말을 뱉어내는 헌의 입술이 진득하게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윤현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헌이 거칠게 벗어 놓은 무사 복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헌이 막 갓끈을 매며 동궁을 벗어나려 하는데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 하나가 들렸다.

막 동궁 문을 열려던 헌의 손이 멈칫했다.

“대비마마 납시셨나이다, 저하……!”

갑작스러운 대비의 방문에 헌은 흠칫 놀라 굳었다.

“어찌……. 뫼시어라.”

그렇게 대답하는 헌의 얼굴이 어둑했다.

속히 서둘러야 할 텐데,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진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세자, 어디를 가시려고요?”

그때 막 동궁으로 들어선 대비가 옷을 갈아입은 헌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것이. 잠행이라도 나갈 참에…….”

“간택이 한창 열리는데 잠행이라니요. 웬만하면 오늘은 참으시지. 오늘 강습은 모두 마친 것입니까?”

대비가 옅게 웃으며 동궁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섰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헌은 윤현에게 속히 나가보라 눈짓을 해 보였다.

여기서 더 지체하였다가는 소진을 놓칠 수도 있었다.

윤현이 그의 눈짓을 읽어 내고는 속히 동궁을 나섰다.

“예. 모두 마치고 잠시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한데 간택은 어쩌시고.”

“마지막 간택이 진행되고 우리는 잠깐 쉬는 시간이지요. 해서 시간이 조금 남아, 세자께 온 것입니다. 할 말도 있고.”

“할 말이라 하시면…….”

어쩐지 대비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연신 희미한 웃음을 터뜨리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허공만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할마마마?”

헌이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따라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의정의 여식 말입니다.”

소진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대비.

순간 헌의 가슴은 돌덩이가 떨어진 듯 울렁거렸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서 말이지요. 이번 간택에서 아쉽게 세자빈이 되지 못한다면 후궁으로라도 꼭, 세자의 곁에 두어야겠습니다.”

“후궁으로요……?”

“세자빈에 간택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나만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예에…….”

“반드시 세자의 곁에 두도록 하세요. 중전의 기고만장함을 단숨에 꺾어 놓을 수 있는 위인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비는 목이 젖히라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한데 할마마마……. 오늘 간택은 어찌 진행되고 있습니까? 별다른 이상 없이 잘 추진되고 있는 것인지.”

헌이 대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중전이 패악이라도 부려서 한 규수의 간택을 망칠 줄 알았는데, 뭐 아직은 별 탈 없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이번 판에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아야 한다.’

헌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비에게 향했던 시선을 접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대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행이…… 혹, 급하신 것이오. 세자?”

“다녀와서 소상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로군?”

역시 눈치 빠른 대비였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그럼 이 할미는 돌아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할마마마. 여기까지 발걸음하시었는데.”

“아닙니다. 급한 불부터 꺼야지요.”

대비가 돌아섰고 헌은 곧바로 동궁을 빠져나갔다.

***

서책 방으로 향하는 길.

소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제 곁을 묵묵히 따르던 궁녀가 소진의 앞을 불쑥 가로 막고 섰다.

“다른 길로 가시지요, 아씨.”

“……어째서?”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이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세웠다.

“조금 전부터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것 같사옵니다.”

“……감시라니?”

그러면서 소진이 눈빛을 삼엄하게 뜨고 주위를 살피려는데.

“아니요. 쳐다보지 마세요, 아씨. 얼른 길을 달리 잡아요.”

“…….”

“제가 앞장설 테니 달리시는 겁니다.”

궁녀가 황급히 소진의 팔을 잡았다.

‘이 겁에 질린 듯한 눈빛…… 사실일까?’

순간 소진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해 보이며 궁녀가 등을 돌리자 소진이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어디 소속…… 궁녀요?”

“예?”

중전이 사람을 붙였다고 했으니, 감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것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하는 이 여인 또한, 중전과 한패는 아닐까.

그렇게 묻는 소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궁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대비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아씨를 지키라고요…….”

그 말에 소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

“낭자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뒤늦게 궐을 빠져나온 헌은 저잣거리를 헤매고 있는 윤현을 발견했다.

하지만 소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놓쳤습니다! 갑자기 아씨께서 뛰는 바람에……!”

“안된다, 절대 아니 된다!”

소진이 갑작스럽게 뛰어 윤현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만 것이었다.

헌은 절망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중전이 심어 놓은 무사들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궐문을 지나쳤을 때는 이미 아씨께서 한참 전에 궐 밖을 빠져나온 뒤였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헌이 크게 호통치며 등을 돌렸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 그를 힐끔거릴 만큼 그의 언성은 높아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 털끝 하나라도 상하면 아니 된단 말이다……!”

헌의 동공이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쪽을 살필 테니, 너는 그쪽을 샅샅이 뒤지거라.”

그렇게 명을 내린 헌은 서책 방 반대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을 거세게 밀어내며 미친 듯이 정면을 응시한 채 발을 움직이는 헌.

그러던 그때, 그의 눈앞에 희미한 장면 하나가 세차게 스쳤다.

-반드시 네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아.”

헌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처음 보는 듯한 장면 속에서 헌은 자신의 목소리로 생경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연등과 불빛,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누군가를 뒤쫓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모습.

“이것은……!”

순간, 헌의 머리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것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헌의 머릿속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던, 그날 밤의 기억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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