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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재간택을 망쳐야겠구나. (51/125)

51. 재간택을 망쳐야겠구나.

2021.03.26.

“좀 괜찮으십니까?”

궁녀가 소진의 발목 위에 뜨거운 수건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중궁전 나인들이 소진을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어쨌든 이곳에 합당하게 들어온 것이니, 후에 윗전들의 귀에 들어가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 괜찮소. 조금만 더 찜질하면 될 것 같소만.”

소진은 그렇게 말하며 나인들의 처소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한데 여기는……. 그대들의 처소요?”

생경한 얼굴로 소진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발목에 찜질을 해 주던 궁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중궁전 나인들 처소입니다.”

“아…… 하면 중궁전 나인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 것이오?”

“휴가라 밖에 나가 있는 이도 몇 있고, 중궁전에서 할 일을 하는 이들 몇, 그리고 여기서 쉬는 이들 몇이 다입니다.”

“그렇군요.”

“하면 저는 이거 물 좀 갈아서 오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러면서 궁녀가 식은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처소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진이 주위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리를 절뚝이며 능청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처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기가 나인들의 처소구나……. 신기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진은 궁녀들의 의문스러운 시선들을 피했다.

괜히 처소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뒷짐을 진 채, 기웃거렸다.

궁녀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소진을 지나쳤다.

소진은 처소 안에 있는 궁녀들의 얼굴을 빠르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문을 활짝 연 채, 안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궁녀들.

혹은 수를 놓고 있는 궁녀 등, 각자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봉희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마을의 사라진 여인들도 이곳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모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식솔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 하나 이방인이 끼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소진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중궁전도 아니고 처소에도 없다면……. 대체 그날 보았던 봉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다, 그녀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혹 이 닫힌 문 안에서 봉희가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을 작게 두드렸다.

“이보시오……!”

잠시 뒤, 방문이 열리고 봉희가 아닌 생판 처음 보는 궁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굴을 드러냈다.

“뉘십니까?”

간택 복장을 한 소진을 궁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진은 실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 발목을 접질려 이곳에서 잠시 도움을 받던 중인데. 측간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서.”

그때, 소진의 등 뒤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발목을 찜질해 주던 궁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거기서 무엇 하십니까?”

소진은 서둘러 방 안에 있던 궁녀를 향해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여기에는…… 없어. 없는 것이 분명해.’

소진의 주먹이 굳게 말렸다.

“측간을 좀 가고 싶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발목도 성치 않으시면서…….”

이내 그녀는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움직였다.

한껏 부풀었든 기대감은 곧 실망감이 되어 소진을 덮쳤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소진의 얼굴이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

“그래, 이 꽃을 꺾은 연유가 무엇인가.”

주어진 시간이 모두 지나고 꽃을 제출하고 이제 대비와 중전에게 답을 올릴 시간.

커다란 발을 사이에 두고 대비와 중전, 그리고 규수들이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당연히 규수들은 대비와 중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발 너머에 앉은 규수들의 얼굴이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예, 꽃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모란입니다. 단연 꽃 중의 왕인 모란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닐는지요.”

이내, 규수들은 청산유수 같은 답을 올리며 점수를 쌓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은 도통 간택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지…….’

연신 봉희 생각에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꼭꼭 숨겨야 할 존재라면 당연히 그런 공개적인 처소에 봉희를 머물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왜, 봉희를 포함한 마을 여인들을 이곳에 감춰두고 있단 말일까?

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런저런 생각에 쌓여 있는 소진을 대비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통…… 간택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구나.’

중전 역시, 다른 규수의 답을 듣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소진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 다음은 한 규수.”

소진의 차례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궁 하나가 다시금 소진을 불렀다.

“한 소진 규수.”

그제야 소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예?”

“답을 올릴 차례입니다.”

그 말에 소진은 품속에 있던 꽃이 든 주머니를 꺼내 대비와 중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살며시 자리를 잡고 앉아 꽃을 꺼내 보였다.

처음 보는 들꽃에 대비와 중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꽃의 이름이 무엇인고?”

대비가 소진을 향해 그렇게 묻자, 소진의 반듯한 입술이 벌어졌다.

“모르옵니다.”

모른다는, 하지만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방 안에 있던 규수들도 모두 소진을 바라보았다.

대비와 중전 역시,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소녀, 이 꽃의 이름을 모르옵니다.”

“모르는데…… 어찌 답이라고 가지고 온 것이냐?”

중전이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되물었다.

대비는 조금 굳은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진이 아무런 대답도 올리지 않자, 중전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꽃에도 다 품계가 있고 이름이 있거늘. 그리고 그 이름에 따른 의미 또한 다 다른 법이고 품계가 주는 고귀함도 있는 것인데 어찌 이름도 모르는 한낱 꽃을 가지고 와, 답이라고 제출하는 것인지.”

“…….”

“이것이 꽃인지, 꽃인 척하는 잡초인지 알게 무엇이냐? 쯧쯧.”

중전이 낮게 혀를 찼다.

하지만 소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울컥, 샘솟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 품계로 급을 따지려는 것일까? 이리 아름다운 꽃이 품계도 이름도 없다 하여, 꽃 취급조차 하지 않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야.’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과제가…… 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라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소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문제 될 것이 없다?”

“예. 이름을 아는 아름다운 꽃을 가지고 오란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소진의 말에 대비와 중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채점하던 상궁들도 서로를 돌아보며 대비와 중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 꽃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

“이것을 보는 순간, 이 궐에서만큼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이 꽃의 이름은 모르지만 아마 이 꽃에도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 없듯, 이름 없는 꽃도 없을 테니까요.”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들꽃도 아름다울 수 있고, 꼭 품계가 없더라도 제 색을 뽐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소진의 대답에 중전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고 대비는 반색했다.

“품계가 없더라도…… 제 색을 뽐낼 수 있다?”

이내 대비가 그렇게 되물으며 소진의 표정을 살폈다.

소진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 대비마마. 꼭 품계가 있어야만 제 빛과 색을 뽐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가진 품계만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듯.”

“……!”

“꽃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리고 품계와 이름이 없다고 하여 꽃을 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만.”

소진의 말에 중전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에 반해 대비의 얼굴은 밝아지고 있었다.

가히 영의정의 여식다웠다.

그가 꽁꽁 싸매고 대비 앞에 내보이지 않으려는 속셈을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소진의 대답이 대비의 마음에 쏙 드는 눈치였다.

상궁들의 손이 빨라졌다.

단연, 중전은 그녀의 말꼬리를 잡아 어떻게든 감점을 끌어낼 심상이었다.

중전의 언성이 조금 전보다 더 높아졌다.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녀가 입술을 벌렸고 상궁들은 손을 멈추고 중전을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니. 하면 지금 중전인 내 생각을 부정한다는 뜻이냐?”

“그것은 결코 아니옵니다, 중전마마.”

“한데 어찌 그런 대답을 올리는 것이지? 이름도 모르는 이 꽃을 가지고 왔으면 그것을 모면할 답을 올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내 말에 토를 달다니? 한 규수, 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잊었느냐?”

순간 정적이 흐르다, 그녀의 점수를 채점하는 상궁들의 손놀림 소리가 분주히 방을 메웠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대비의 미간이 구겨졌고 중전에게 무어라 한마디를 하려 입을 떼는데 소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구하오나 중전마마, 소인은 모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그 말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중전의 입술이 우악스럽게 구겨지고 말았다.

***

벌써 한 시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었지만, 저 지하 통로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또한,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음번에 확실히 날을 잡아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헌은 잠시 뒤, 세 번째 과제가 시작되면 위기에 처할 소진을 구하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상궁과 궁녀 하나가 이쪽으로 급히 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추었다.

“내일로 정해졌다.”

내일이라는 말에 헌의 귀 끝이 날카롭게 섰다.

“내일이요……?”

“재간택이 오늘 잘 마무리만 되면 내일 모두 내보내라는 중전마마의 명이 떨어졌거든.”

앞뒤 상황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헌은 직감했다.

모두 내보내라 함은 아무래도, 저 지하 통로 안에 있는 이들을 내일 출궁시키라는 말 같았다.

숨죽인 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헌의 뺨이 잘게 떨렸다.

“곧 중전마마께서 출산하실 것이니 그전에 방을 비우라는 말씀을 하셨다. 출산 직후에 다시 방을 채울 것이라고.”

방은 저 지하 통로를 말하는 듯싶었다.

헌의 눈빛이 거세게 번뜩였다.

“예,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간택은 순조롭게 마무리가 될 성싶으니 너는 서둘러 방을 비울 준비를 하여라.”

“예, 마마님.”

그리고 두 사람이 속히 사라졌고 헌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진이 중궁전 나인의 처소에서 봉희 댁과 관련된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분명 봉희 댁은 저 지하 통로 안에 있을 것이었다.

한데, 내일 내보낸다 하면 기회는 오늘밖에 없는데.

당장 저 자물쇠를 부수고 안에 들어가기는 무리였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괜히 자신의 입지만 곤란해질 수도 있을 테였다.

헌은 우선 주변을 살피다가 서둘러 중궁전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내일이라…… 내일.”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헌은 거칠게 이마를 쓸어내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한창 간택이 진행되고 있을 간택 장을 바라보았다.

-재간택이 오늘 잘 마무리만 되면 내일 모두 내보내라는 중전마마의 명이 떨어졌거든.

불현듯 조금 전 상궁의 목소리가 헌의 귓가를 윙윙 때렸다.

그가 반듯하게 맞물렸던 입술을 비식, 일그러뜨렸다.

“하면 재간택을…… 망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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