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중궁전 나인들의 처소. (50/125)

50. 중궁전 나인들의 처소.

2021.03.22.

“쉿.”

웬 궁녀 하나가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잡았다.

“뉘신지요?”

“이쪽으로요.”

놀란 소진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궁녀가 따라오라는 눈짓을 해 보이며 총총총 사라졌다.

소진은 좀 전에 헌이 말한 중궁전에서 붙인 궁녀일까 싶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설마, 이 궐 한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소진이 가만히 궁녀가 향하는 쪽을 응시했는데.

멀지 않은 전각 사이에서 보은군이 소진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감……?”

어제도 보았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소진은 서둘러 그 꽃을 꺾어 주머니에 넣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들 꽃을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택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꼭, 들판에 꽃구경이라도 하러 온 듯했다.

누구 하나 지키는 상궁 하나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규수들이 오갔다.

소진은 들키지 않게 꽃을 찾으러 다니는 듯, 허리를 굽혀 이리저리 땅을 살피며 보은군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보은군은 소진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

다시 중궁전의 전각 밑, 틈 사이에 숨어든 헌은 소진이 그려준 봉희의 용모화를 펼쳐보았다.

그러곤 자세를 낮추어 중궁전을 배회하고 있는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다.

비록, 뛰어난 실력의 용모화는 아니었지만 대충 알아볼 만은 했다.

한 명, 한 명 지나치는 궁녀들의 얼굴과 용모화를 대조해 보며 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여기에는 없는 것 같았다.

벌써 보았던 얼굴을 보고, 또 보아도 조금도 닮은 이는 없었다.

헌은 조금 전, 보은군을 찾아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정확히는 한 규수를.

그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삭인 중전은 중궁전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궁전 모든 궁인이 이곳을 꼼짝 않고 지키고 있을 테니 오늘처럼 감시가 느슨한 날은 드물 것이었다.

그럼 저 지하 통로를 지켜볼 기회도 오늘 말고는 없을 테니, 헌의 마음은 급해졌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저하.

-나는 오늘 한 규수의 벗과 관련된 일로 중궁전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한 규수가 간택 중에 있을 것이다. 때를 보았다가 한 규수에게 가, 내 말을 좀 전해주어라.

-어떤 말씀을 말입니까.

-중궁전 나인들은 내가 살펴보고 있으니, 중궁전 나인들의 처소는 내가 가보기 힘들 것 같아 낭자가 나를 대신해 나인들의 처소를 보아야 할 것 같다고.

-그리 전하면 되옵니까?

-그래. 그리고 낭자가 곤란해지지 않고 처소를 살필 수 있도록 네가 낭자와 함께 꾀를 내어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여라.

윤현에게 물었을 때, 중궁전 궁인들은 중궁전과 각자 처소, 그리고 간택 장에 나누어져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진의 벗이 이곳 중궁전 안에 없다면 처소에 머물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마저 없다면.

헌의 시선이 지하 통로에 꽂혔다.

“저곳에 있겠지.”

그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길이 살벌하기만 하다.

***

“예?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 말에 소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보은군은 헌에게 들은 대로 고하며 행여 누가 따라붙었을까, 소진의 뒤를 살폈다.

“누가 따라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며 하는 간택 과제였거든요.”

“아, 그랬습니까? 하면 우선 과제는 끝마치셨는지요?”

보은군이 가만히 소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둘은 인적 드문 곳의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진은 그의 물음에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들꽃을 꺼내 보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보은군은 웬 꽃인가, 하는 얼굴로 그녀가 내민 꽃을 받아 들었다.

소진이 그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슬며시 입술을 뗐다.

“과제 답으로 제출할 꽃입니다.”

“과제가 무엇이었는데요?”

보은군이 슬며시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소진을 내려다보며 그가 묻자, 소진도 그를 따라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궐에서 가장 예쁜 꽃을 가지고 오라는 것.”

“이 꽃 이름이 무엇인데요?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소녀도 모릅니다. 해서 가지고 온 것이에요.”

“이름을 몰라서 가지고 온 것이라니?”

소진의 대답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보은군은 이내,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간택에서 떨어져야 하니 이름 모를 꽃을 꺾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소진은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 위에 솟아 있는 해를 올려다보았다.

“한데 말입니다. 봉희가 아무래도 중궁전 안에 없나 봐요.”

“예?”

“저하께서 급히 보은군 대감께 일러 저더러 나인들의 처소를 확인하라 하는 것을 보니…… 안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간택 과제에 대한 답 제출까지 얼마가 남은 것이지요?”

“한…… 반 시진 정도는 남은 것 같아요.”

“하면 어쩌지요? 어떻게 해야…… 나인들의 처소를 둘러볼 수 있을까요?”

보은군은 걱정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고심에 잠겼다.

소진도 덩달아 고민에 빠졌다.

“……별다른 의심 없이 나인들의 처소에 들어갈 방법이.”

그 말을 되뇌던 소진의 머릿속에 퍼뜩 좋은 묘책이 하나 떠올랐다.

“옳거니!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어떻게요?”

“대감께서는 바람잡이가 되어주셔야겠습니다!”

소진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보은군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잡이요?”

“예. 바람잡이 해보셨습니까? 막 옆에서 바람 잡는 거.”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소진은 마음이 급한 듯 허둥대며 걸어갔다.

궐 깊숙이로 들어오느라 바닥은 온통 울퉁불퉁한 돌투성이의 흙길이었다.

소진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고서는 서둘러 걸었다.

“그때 해보셨나? 우리 아버지 생신 때, 제가 몰래 선물을 드릴 거라고 그때 왜, 제가 대감께 바람잡이 한번 해달라고 부탁드렸었잖아요.”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던지 보은군이 달려가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아?”

“저기,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요. 여기 길이 좀 울퉁불퉁해서.”

“아, 예…….”

재잘대던 소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보은군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갔다.

“예, 그랬지요.”

보은군은 그런 소진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생긋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대감이 집으로 좀 더 늦게 오실 수 있게, 바람을 잡긴 했는데. 그때처럼 해달란 말씀입니까?”

“예? 아…… 예.”

“무슨 바람을 잡으면 됩니까, 이번에는?”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소진도 옅은 미소를 그리며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제가 소리를 치면 때를 보고 있다가 튀어나오시면 됩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제 말에 맞장구만 쳐주시면 됩니다.”

소진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보은군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함께 걸어갔다.

***

중궁전 나인들의 처소 앞에 다다른 소진은 깊이 숨을 내쉬며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보은군을 한번 바라보았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보은군이 소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가 나서서 도와줄 것 같아 든든했다.

소진은 이내, 굳게 문이 닫힌 나인들의 처소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얼굴을 굳히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야!”

그러면서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소진의 행동에 보은군이 흠칫 놀랐지만, 아무래도 작전인 것 같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에구머니나! 다리를 접질렸네!”

“…….”

“거기 누구 없습니까?!”

소진이 큰 소리로 소리치자, 처소 안에 있던 나인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자, 소진은 더욱이 아픈 얼굴을 하고서 왼쪽 발목을 움켜쥐었다.

“거기…… 나 좀 도와주시겠소?”

궁녀들은 소진이 재간택에 참여한 규수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웃거리며 소진을 바라보던 궁녀 중 한 명이 쭈뼛쭈뼛 소진에게로 다가왔다.

소진은 처소에서 웅성거리며 서 있는 궁녀들의 얼굴을 재빨리 훑었다.

‘봉희야…… 제발 나와라…… 제발 나와.’

소진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궁녀의 팔을 덥석 쥐었다.

“아. 넘어지면서 발목을 조금 다친 것 같소. 나를 좀 부축해주시겠소?”

그 모습을 보은군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간택에 참가한 규수십니까?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데…….”

소진을 부축하며 궁녀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소진은 더욱이 아프다는 듯이 곡소리를 내며 다시금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과제를 치르다,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어딥니까?”

“여기는 중궁전 나인들 처소입니다만. 아씨, 여기에 계시면 안 됩니다.”

궁녀는 행여 상궁에게 혼이라도 날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다른 궁녀들도 소진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는데…… 발목을 접질려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는데 어쩌오?”

소진이 얼굴을 구기며 궁녀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여 보였다.

“얼른 돌아가,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데 말이오.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겠으니 이를 어쩌오?”

“하면 의원이라도 불러오겠습니다. 제가 간택 장으로 가서 상궁 마마님들께 알려…….”

“그건 아니 되오!”

궁녀의 말에 소진이 속히 대꾸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한번, 봐달라는 듯 얼굴을 구기며 궁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상궁 마마님들께는 알리면 안 되오. 의원은 더더욱 아니 되고…….”

“예? 어째서…….”

소진은 푸념하듯, 한숨을 내뱉으며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울상인 얼굴로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정해진 장소만 다녀야 하는 것을 내, 잘 알지만. 간택에 통과하고 싶은 욕심에……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이리 경망스럽게 발목까지 접질린 것을 상궁 마마님들이 알게 되면.”

“…….”

“나는 감점 처리가 되거나 실격 처리가 될 것이오.”

입술까지 삐죽이며 소진은 곧,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궁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궁녀가 여전히 난감하다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면…… 어떻게…….”

“저기 처소 안에서 잠깐 찜질 같은 거라도 할 수 있겠소?”

어떻게든 저 안으로 들어가서 궁녀들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꾀가 통할 것인가…….

소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궁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그런 소진을 지켜보고 있던 보은군은 풉, 웃음을 뱉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에 어찌 저런 묘책을 생각해냈는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그때, 한참 생각하던 궁녀는 그래도 그 부탁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외부인이 들어가면 아니 되는 곳이라서요…….”

“거참, 궐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찌 이리 야박하게 군단 말이오? 잠시면 될 터인데. 아주 잠시면.”

“…….”

“내가 조금도 움직이기 힘들어서 그러오. 이 꼴로 기어갈 수도 없지 않소?”

소진의 애원에 궁녀의 마음이 조금 흔들리던 찰나, 보은군이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척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앗, 보은군 대감마님……!”

궁녀들도 그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소진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곤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며 창피한 듯,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소진.

“에구머니나……! 이리 창피할 때가.”

그녀의 말에 궁녀가 속히 소진을 부축해주었다.

보은군이 궁녀와 소진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느긋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 웬만하면 그냥 지나치려 하였는데.” 

“…….”

“사정이 참 딱한 것 같은데 좀 도와주지 그러느냐.”

보은군의 말에 처소 앞에 웅성웅성 모여있던 궁녀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규수께서 어찌나 급하면 궁녀에게 그런 부탁을 하겠는가. 체면도 있는데…….”

“…….”

“과제 제출 시간은 급하고 발목까지 접질렸으니 얼마나 난감하시겠는가. 오래도 아니고 잠시면 될 것 같은데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찜질만 좀 하고 갈 수 있게 해주어라.”

보은군의 말에 궁녀가 하는 수 없이 소진을 처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면 되겠지요?”

“고맙소. 고맙습니다, 보은군 대감.”

소진이 보은군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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