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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내가 지킬 것이니. (49/125)

49. 내가 지킬 것이니.

2021.03.19.

놀란 소진이 발버둥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앞 화단으로 끌려와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나서야 소진의 몸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대체 누구……!”

“납니다.”

“저하……?”

소진은 뜻밖의 목소리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헌이 눈만 내놓은 채, 무사로 변장한 상태였다.

“아니, 어찌 이곳에 계시어요?”

중궁전에 있어야 할 그가.

더군다나 대비와 중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어찌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에 나타났는지, 소진은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멍한 얼굴로 소진이 그를 바라보다, 황급히 헌의 팔을 쥐었다.

그러곤 자신이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경계하며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언가 단서를 발견하였습니까?”

그 말에 헌이 복면을 슬쩍 내리며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손목을 지그시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우선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지금 너무 촌각을 다투니.”

“예.”

“윤현이 낭자를 지키고는 있지만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왔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헌의 얼굴이 무척 어두웠다.

소진은 고개를 젖혀 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신 주위를 살피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저하.”

소진이 슬그머니 그의 팔을 두드렸다.

긴박한 상황인 것 같은데.

어쩐지 헌의 얼굴을 이렇게 마주한 지 오래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과 며칠 전에 얼굴을 본 것 같은데도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괜스레 이렇게나마 그를 마주하니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기분도 들떴다.

“중전마마께서 손을 썼습니다.”

“예……?”

“낭자를 납치하려 합니다.”

납치라는 말에 소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내 그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헌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오는 길입니다. 궐 밖으로 나가거든 중궁전 궁녀 하나가 따라붙을 겁니다. 그리고 궐문 바로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낭자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중전마마께서 이미 그렇게 지시를 내린 상태이고요.”

“……그것이 참입니까?”

소상히 읊는 중전의 계획에 소진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연유가……?’

대체 왜 자신을 위협하면서까지 재간택을 막으려는지 알 수 없었다.

소진이 딱딱한 얼굴로 그 말을 듣고 있다, 고개를 푹 숙였다.

헌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낭자.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쩐지 귀에 닿는 그의 목소리가 따뜻하기만 했다.

“내가 지킬 것이니.”

이내, 들려온 헌의 말이 소진의 귀가 아닌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 목소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따뜻했고 다정한 말이었다.

소진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고운 말이 흘러나온 붉은 입술을.

소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싼 그의 커다란 손을 향해 소진이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낭자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예……. 저하.”

그때, 이쪽으로 누군가가 오고 있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

소진이 흠칫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헌이 그녀를 가만히 자신의 품에 안아 보이지 않게 등을 돌렸다.

헌과 밀착한 채, 그의 품에 얼결에 안긴 소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헌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행여 콩닥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헌에게 들릴까 소진이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뺐다.

하지만 헌이 다시금 소진을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낙엽 소리가 날 것 같아서. 붙어 있지요.”

헌이 소진만 들릴 수 있도록 낮게 읊조렸다.

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곧, 뒤에서 여인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는 규수는 갈비찜을 만든다는데. 우리도 고기 요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급히 요리를 바꿀까요?”

간택에 참가한 다른 규수와 궁녀였다.

헌은 슬쩍 그 둘을 바라보다, 다시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한껏 긴장한 채로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그녀였다.

물끄러미 그녀의 이마와 눈과 뺨을 내려다보던 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반짝이는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가 퍽, 귀여웠다.

“풉.”

갑작스러운 그의 웃음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소진이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봤다.

“왜요?”

소진이 벙긋벙긋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동그랗게 부푼 그녀의 입술이 헌의 시선을 압도했다.

그는 말없이 빙그레 미소만 지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내 두 여인이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두 사람은 떨어질 수 있었다.

“이제 가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이 그녀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살며시 말아 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헌이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입술을 뗐다.

“이젠 놓아도 될 듯싶은데.”

“아……!”

그 말에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그의 허리춤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멋쩍은 듯 소진이 뺨을 쓸어내리며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나는 다시 중궁전과 그 주위를 살펴보고 있을 테니 낭자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간택에 임하세요.”

소진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제대로 용모화를 건네받고 궐을 살피지 못할 듯싶습니다. 지금 벗의 용모화를 받아 두어야겠습니다.”

“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소진은 서둘러 품에 숨겨 두었던 용모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곤 조금 전보다 더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그림으로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아, 밑에 특징을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그럼…….”

소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서는 황급히 화원에서 나왔다.

이내 소진은 시래기 단을 품에 안고 서둘러 소주방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아……. 뭐를 가지고 와야 할지 몰라 가지고.”

“시래기가 뭔지 모르셨구나. 소인이 가서 가지고 올 걸 그랬습니다.”

궁녀가 피식 웃으며 소진이 가지고 온 시래기를 건네받았다.

그러곤 능숙하게 손질을 하는 궁녀 옆에서 소진도 그제야 앞치마를 맸다.

그러다 문득 앞치마 끈을 묶는 그녀의 눈앞에 헌의 모습이 그려졌다.

-옷 버리니 앞치마를 꼭 하셔야 합니다.

활인서에서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앞치마를 손수 매어주던 다정다감하던 헌의 모습.

그녀의 가슴이 다시 헌의 품에 안길 때처럼 콩, 콩, 콩 뛰고 있었다.

볼에도 열기가 뜨겁게 올랐다.

“아가씨, 이제부터 상궁 마마님께서 채점을 시작하실 것이니 저를 따라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 궁녀가 소진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소진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던 헌의 얼굴을 애써 지워내며 다시금 재간택에 몰두했다.

둘은 요리할 재료를 가지고 다른 규수들이 이미 요리를 시작한 간택 장으로 들어섰다.

소진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긴장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발 뒤에서 대비와 중전이 지켜보고 있었다.

곧 상궁이 매의 눈초리로 소진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고 소진은 조심스럽게 칼을 들었다.

“잘……하실 수 있겠지요?”

궁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연습한 대로 칼질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칼질이었기 때문에 소진은 긴장을 풀고 차근차근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궁들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물들어갔다.

***

무사히 첫 번째 과제가 끝나고 두 번째 과제가 시작되었다.

<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지고 오시오.>

소진에게 이 간택은 큰 의미가 없었기에 그저 아무 잡초만 뽑아가도 될 일이었다.

첫 번째 과제를 하며 자신을 도와주던 궁녀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소진은 꽃을 담아올 비단 주머니를 손에 쥔 채, 조심스럽게 간택 장을 빠져나갔다.

한편 규수들이 과제를 받든 채, 간택 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중전과 대비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 첫 번째 간택에 대한 채점 결과가 적힌 종이가 놓였다.

중전과 대비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종이를 집게 되었는데, 대비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뱉어냈다.

“……흠.”

<한 가(家) 소진.>

종이에는 소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중전이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종이에서 손을 뗐다.

“어지간히 급하셨나 봅니다, 대비마마.”

“중전만 하겠습니까?”

둘은 대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뒤에 선 상궁들만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그 어린 나이에 자처해, 제 조부뻘 되는 늙은 주상에게 시집오고 거리낌 없이 제 또래의 아들에게 스스로 어미라 칭하는 중전을 보면서 느끼긴 하였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내는 건지, 중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중전은 적나라하게 얼굴을 구기며 대비를 홱, 돌아보았다.

“갑자기 여기서 그런 말은 왜.”

“가진 야망이 보통이 아니구나. 속에 품은 야욕이 범상치가 않구나. 대체 어린 소녀가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그리 속이 검게 탔을까.”

그 말을 하며 대비가 중전을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에 어쩐지 측은지심이 묻어 있었다.

“한때는 아등바등 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전을 보며 꼭 소싯적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도 들었지. 한데, 갈수록 더하는구려. 중전의 욕심이,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오만방자함이.”

“…….”

“내 눈살을 찌푸리게 해.”

어쩐지 중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한, 하지만 헤집고 싶지 않은 악몽을 떠올린 듯 그 얼굴이 어둡게 변해갔다.

만삭으로 불러온 배를 움켜쥔 중전의 눈시울이 별안간 붉어졌다.

중전은 서둘러 대비에게서 시선을 접으며 다시금 독기를 품었다.

“하오나 대비마마께서도 야욕이라면 지금도 놓지 못하고 계신 것이 아니옵니까?”

“…….”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첩 아무리 욕심이 넘쳐나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하여도 대비마마만큼은 아니니, 대비마마처럼 늙진 않을 것입니다.”

뒤에 선 상궁들은 행여, 두 사람이 이러다 언성을 높이며 설전(舌戰)이라도 벌일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둘은 거기서 그쳤다.

대비는 손에 쥐고 있던 소진의 점수가 적힌 종이를 말없이 펼쳤다.

그리고 점수를 내려다보는 대비의 얼굴이 묘하게 변해갔다.

***

“무슨 꽃을 꺾지…….”

곁에는 함께 간택에 참가한 규수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오가고 있었다.

소진은 고심하는 척 뒷짐을 진 채, 화원을 누볐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중궁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열심히 자신의 주변을 지나치는 궁녀들의 얼굴을 살피면서.

‘저기가 중궁전이지……?’

매번 문턱 앞에서 고사해야만 했던 중궁전이 보였다.

소진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잡초를 뽑았다, 버렸다 하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중궁전 쪽으로 나아갔다.

소진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게 빨라졌다.

그녀는 어느덧 중궁전 근처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중궁전 바로 앞에는 궁녀들이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간택에 참가한 규수들이 들어올까, 막기 위해 서 있는 것 같았다.

-대전, 동궁전, 중궁전, 대비전. 이곳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미리 상궁이 규수들에게 일러 주었던 주의사항을 곱씹으며 소진은 속으로 아쉬워했다.

“아…… 궁녀 옷을 가지고 왔어야 했나. 그래도 못 들어갔겠지?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네.”

소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호랑이 굴을 못 들어가면 호랑이 시중드는 토끼 굴이라도 들어가 봐야지?’

아까 궁녀가 말해준 중궁전 나인들의 처소를 향해 소진이 걸음을 옮겼다.

이쯤일까, 아니면 조금 더 가야 할까, 홀로 고심에 잠겨 나아가고 있던 그때.

“어.”

눈앞에 처음 보는, 너무도 예쁜 들꽃이 보였다.

지천에서 본 적 없는, 궐 안에서만 자라는 이름 모를 풀꽃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궐 안에는 진귀하고 희귀한 꽃들이 많으니 그 꽃씨들이 뒤엉키며 자란 돌연변이 풀꽃인 듯했다.

소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서서 쭈그리고 앉았다.

“이름도 모르는 풀꽃이니…… 이걸 가지고 가면 되겠지? 이 꽃의 이름과 이것을 선택한 연유를 물으실 때 나는 당연히 이것의 이름을 모르니 감점을 당할 테고.”

이 꽃이면 적당한 대답이 될 것 같았다.

소진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며 그 꽃을 꺾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

갑자기 옆에서 다른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그 꽃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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