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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눈독이라도 들이고 계십니까? (48/125)

48. 눈독이라도 들이고 계십니까?

2021.03.15.

상궁의 명을 받은 궁녀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 사라졌다.

헌은 멀어지는 궁녀의 발을 바라보며 입술을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그의 아랫입술은 피가 날 것만 같이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곁에 섰다.

그러곤 복면이 찢어져라 움켜쥐고 있는 헌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저하.”

상궁도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곧 궁녀를 따라 중궁전을 나서고 있었다.

“납치를 할 것이다……? 감히, 한 규수를?”

그녀의 간택을 방해하여야만 하는 중전의 간절한 속마음은 헌도 잘 알았다.

소진 역시, 중전과 같은 마음으로 이번 재간택에 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진이 부러 간택 과제에서 실수를 범하고, 중전이 그녀의 탈락을 위해 힘을 쓴다 해도 침묵하고 넘길 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결코,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단 영의정도 제 여식의 간택을 방해하기 위해 중전이 납치까지 감행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을 터.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헌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헌은 다시금 복면을 쓰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궁녀들이 수상쩍게 머뭇거렸던 돌담 틈 사이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여기를 좀 더 살피다 갈 것이니, 너는 서둘러 한 규수에게 가보아라.”

“예, 저하.”

“그러다 아까 저 상궁이 지시한 대로 한 규수가 궐 밖으로 움직이려거든 서둘러 내게 고하여라.”

윤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황급히 중궁전을 빠져나갔다.

헌은 굳은 얼굴로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 막 돌담을 스쳐 지나는 궁녀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헌이 재빨리 전각 아래 틈 사이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곤 서둘러 돌담 틈에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쇠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

꼭 옥문(獄門)과 같은 형태의 쇠창살로 된 문이었다.

행여, 궁녀들이 이쪽으로 다가올까 한껏 경계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서서히 문 앞으로 다가가니 까마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쇠창살 틈으로 헌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손바닥 끝에 닿았다.

“지하…… 통로가 있구나.”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터라, 더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조그마한 불빛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헌은 최대한 문 앞으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하지만 계단만 눈앞에 보일 뿐, 칠흑 같은 어둠만 헌의 눈동자에 담길 뿐이었다.

더 들어갈 수 없다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동시에, 이 안에 무언가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중궁전에.

그것도 이렇게 돌담을 부수고 지하를 만들어 쇠창살을 달아놓았다는 것은 쉬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당장 의금부에 명을 내려 이 안을 샅샅이 뒤져보라 해도 중전은 막아설 수 없을 테였다.

“대체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하지만 헌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비밀스럽고 음산한 지하 통로도 제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되어 있을 수도 있을 테니.

자신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내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가려낸 후,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그리고 소진도 위험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헌은 숨죽인 채 쇠창살 틈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안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리지는 않을까,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궁녀들이 이 주위를 빙빙 맴돌며 무언가를 감시하고 있는 거라면.

분명히 이 안이 비어 있지는 않을 테였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궁녀들을 움직이게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난희가 그랬다니까? 제법 큰 놈이었대!”

“에구머니나! 이놈의 쥐새끼들이……?”

그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오는 궁녀들의 말소리에 헌이 다시 몸을 숨겼던 곳으로 숨어들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빛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좋을 텐데. 방법이 없을까.’

헌이 고심에 잠겨 있던 그때.

“으악!”

헌의 앞을 지나가던 궁녀 둘이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놀래라! 고양이잖아.”

“그러게. 난 또 쥐인 줄 알았네. 얼른 가자.”

고양이 한 마리가 휙, 담을 넘어 궁녀들 앞을 지나친 것이었다.

고양이는 돌담 앞을 어슬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 쇠창살 안으로 쏙,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헌은 힘없이 실소를 뱉어냈다.

“고양이, 네가 나보다 낫구나.”

고양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궁녀들도 제 갈 길로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헌은 지하 통로를 뚫어지라 바라보다, 혹 다른 곳에 이런 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일각(一刻)이 흘렀을까.

다른 단서를 더 찾지도 못하고 헌이 반쯤 포기한 얼굴로 쇠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야옹, 하는 고양이 소리가 작게 들렸다.

좀 전에 그 안으로 들어간 고양이가 총총총 계단을 딛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막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를 무심코 바라보던 헌의 눈이 커지고 말았다.

“안에…… 사람이 있었구나.”

고양이가 안에서 보리밥 같은 것을 물고 와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다시금 쇠문을 돌아보는 헌의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안에 있던 누군가가 고양이에게 밥을 준 것이었다.

***

<백성들을 위한 한 가지의 요리>

상궁이 미리 언질을 준 대로 재간택 첫 번째 과제는 요리였다.

그것도 백성에게 해주고 싶은 요리.

상궁과 미리 연습한 대로 소진은 평범하게 고깃국 밥을 선택했다.

딱히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처지지도 않는 무난한 요리라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 숙자가 소진을 바라보며 힘내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궁녀 한 명씩 규수들에게 배치가 되고 소진은 자신의 앞에 선 어려 보이는 궁녀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 부탁하오. 한소진이라 합니다.”

“중전마마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궁녀는 그렇게 속닥이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벌써 중전이 손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진의 시선이 발 뒤에 대비와 함께 나란히 앉은 중전에게 향했다.

발로 가려진 터라, 중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 뒤에서 소진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을 테였다.

만삭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직접 이곳까지 발걸음해 간택을 지켜볼 정도면 중전에게도 이번 재간택이 중요한 것 같았다.

소진이 궁녀를 따라 소주방(燒廚房)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 그 모습을 중전과 대비가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저 규수가…… 영의정의 여식인가 봅니다.”

대비가 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중전이 대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독이라도 들이고 계십니까?”

조금은 날이 선 듯한 중전의 목소리에 이번에는 대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우리 세자와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어찌 겉만 보고 판단하시는지요. 손주 며느릿감으로 어떤지 오늘 한번, 판단해 보시지요. 대비마마.”

“판단해서.”

“…….”

“내 마음에 쏙 들면, 이 늙은이가 주책 한 번 부려 봐도 되겠습니까?”

주책이라는 것이 권력으로 소진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중전도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미리 간택 과제를 일러 주어, 철저하게 대비를 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밖에서 그녀를 납치해, 마지막 과제는 아예 치르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으니 중전은 의기양양했다.

“그러시던지요. 마음대로 하시지요. 제 며느리도 되지만 대비마마의 며느리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유가 넘치는 중전의 대답에 대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어라 대꾸를 하려다 말고 대비가 소진을 다시 돌아보았다.

차분하게 궁녀와 함께 요리에 대한 의논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규수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미모였다.

어쩌면 세자가 소진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중전이 은밀하게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미리 지시한 곳에서 나인 하나가 이쪽을 숨어서 지켜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 이번에는 절대 실수 없이 탈락시켜야 할 것이야.’

한편 소진은 궁녀와 함께 고기를 고르고 있었다.

갖가지의 고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난 이 돼지 뼈로 육수를 우려 된장을 풀고 시래기를 넣어 백성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국밥을 만들려고 하오.”

“제가 돕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그 모습을 상궁들이 하나하나 살펴보며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핏물을 좀 제거하여야 할 것 같은데.”

소진의 말에 궁녀가 따라오라고 눈짓을 해 보였다.

“상궁 마마님. 돼지 뼈 핏물 좀 제거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여라.”

궁녀가 상궁에게 허락을 맡고 소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몇몇 규수들과 궁녀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다른 걸 먼저 준비하시지요.”

“알겠소.”

궁녀의 말에 소진이 그녀에게 재료를 맡겨두고 시래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구석에 놓여 있는 채소들을 가지러 가기 위해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슬쩍 궁녀들과 상궁들의 눈치를 살피며 소주방 근처를 서둘러 오가는 궁녀들 중 하나를 잡았다.

“저…….”

소진이 조심스럽게 궁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 중궁전이 멉니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궁녀가 황급히 소진의 차림새를 살폈다.

자신을 좀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궁녀의 눈초리에 소진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간택에 참가 중입니다. 혹 나중에 있을 과제 때문에 궐 안 구조를 좀 익혀 둬야 할 것 같아서……. 짬을 내어 다음 과제를 대비하고 있거든요.”

능청스럽게 웃으며 소진이 눈 한쪽을 깜빡여 보이자, 궁녀가 작게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바로 돌아서 보이는 큰 전각이, 중궁전이어요.”

“아…… 그렇구나. 저기 그럼.”

“……?”

“중궁전…… 궁인들의 처소는 여기서 멀까요?”

“처소는 어찌.”

“아. 내 여종 아이 벗이 중궁전 궁녀로 들어왔다고 하여서요. 혹시나…… 여종 아이에게 벗의 소식이나 전해줄 수 있을까 싶어서.”

당황한 기색 없이 소진이 말을 이어가자 궁녀도 별다른 의심 없이 입을 열었다.

“멀지 않습니다. 중궁전 바로 옆에 기다란 전각이 궁녀들의 처소이기는 한데. 거기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벗이 있다고 해도 허락된 자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그렇소? 아쉽네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고맙소.”

소진이 생긋 웃으며 등을 돌렸고 궁녀도 제 갈 길을 따라 사라졌다.

‘바로 옆이 중궁전이라 이거지…….’

소진은 품에 꽁꽁 숨기고 있던 봉희의 얼굴이 담긴 용모화를 가만히 쓸어 보였다.

마지막 과제 때 헌에게 넘겨줄 봉희의 용모화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중궁전을 꼭 둘러보아야겠어.’

고개를 끄덕이던 소진이 다시 채소를 가지러 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러다 소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곤 조금 전 궁녀가 일러준 중궁전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지금 헌이 중궁전을 살펴보고 있을 테였다.

부디 단서가 될 만한 것을 그가 찾길 바라며, 소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주방을 돌아가니 조금 어둑한 곳에 말린 채소들이 놓여 있었다.

가만히 채소를 내려다보던 소진이 시래기 말린 것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는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진이 조금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바로 앞 화단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것 같아 소진이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아무래도 고양이나 궁에 사는 들짐승이 낙엽을 밟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소진이 시래기 한 웅큼 쥐고서 다시 소주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때.

“……!”

갑자기 누군가가 소진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아버리자, 소진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소진은 품에 안고 있던 시래기 단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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