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누구 마음대로 감히. (47/125)

47. 누구 마음대로 감히.

2021.03.12.

“표정이 너무 안 좋습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별채 화원에 보은군과 소진이 나란히 섰다.

그녀는 말없이 그가 안겨 준 꽃다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은군은 연신 소진의 눈치를 살피며 걱정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낭자…….”

보은군이 소진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러자 멍한 얼굴로 한 곳만 응시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보은군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안색이 어둡기만 했다.

“간택 준비가 많이 힘듭니까?”

“대감.”

“예. 말해보세요.”

“우리가 혼인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그 말에 보은군의 슬쩍 벌어졌던 입술이 맞물렸다.

다정한 눈길로 소진을 바라보던 보은군이 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것 때문에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습니까?”

그렇게 묻는 보은군의 목소리에 어쩐지 음울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소진이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고개를 갸웃했다.

“예?”

“영의정 대감께서 우리 둘이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보은군은 알고 있는 눈치인 것 같았다.

소진은 서둘러 그를 돌아보며 그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알고 있었습니까?”

하지만 보은군은 여전히 정면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것을…… 대감은 언제부터 알고 계시었습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예?!”

그 말에 소진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졌다.

그저 절친한 벗이라 생각했던 그였는데, 혼인이라니.

그런데 그 역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에게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는 것이 서운했다.

“하면 왜 제게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잖아요.”

속상하다는 듯이 그녀가 되물었지만, 보은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진이 다시 한번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대감…….”

“이럴까 봐.”

“아.”

“이리 어두운 얼굴로 근심에 빠져 있다, 나를 멀리할까 봐.”

“대감.”

“그래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미리 알아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요.”

그 말에 소진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이럴까 봐, 하지 못했다는 보은군의 말에 소진의 시선이 조금 떨렸다.

보은군은 쓴 미소를 삼키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도 낭자와의 관계가 지금과 달라질까 봐. 그게 두려웠습니다.”

“…….”

“지금도 나를 이리 서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아.”

“과연 낭자가 그 이야기를 미리 들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우리 둘 사이가 정혼자로 묶였더라면.”

“…….”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사이로 지낼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지냈잖아요…… 대감께서는.”

“…….”

“대감께서는 우리 둘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안한 얼굴로 날 보지 않았습니까?”

소진은 정면만 바라보고 서 있는 그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스며 있던 서운한 감정이 조금은 날아간 뒤였다.

한참 그렇게 소진을 바라보지 않던 보은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게도 그의 눈동자에 먹먹한 빛이 담겨 있었다.

“편안한 얼굴로 낭자를 보아야만 우리의 관계가 유지가 될 수 있으니까.”

“…….”

“나는 낭자와 보내는 시간이 좋고, 나의 시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낭자가 좋았습니다.”

“……대감.”

“그랬기에 그 소중한 시간을 겨우 혼담 때문에 깨트리고 싶지 않아 편안한 얼굴을 해 보였던 것이지요.”

그 말이 소진의 가슴 깊숙이에 닿았다.

그녀는 꽃다발을 꾹, 움켜쥐었다.

“낭자, 혹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어떤 말이요?”

“남녀 사이에 좋은 벗이 되려면.”

“……?”

“둘 중 하나는 연모의 감정을 꼭꼭 숨기고 있어야 한다는 것.”

“예?!”

보은군의 말에 소진의 눈동자가 무자비하게 흔들렸다.

“연모합니다.”

“……!”

“은애합니다.”

갑작스럽게 흘러내린 그 말에 소진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보은군은 따뜻한 눈길로 소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벗으로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으니까요.”

“아…….”

“마찬가지지요.”

“…….”

“혼담이 오간다는 사실도 나만 삼키고 있으면 언제까지일 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안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둘 중 하나는 연모의 감정을 꼭꼭, 숨기고 있어야 하는 것.

그래야 남녀 사이에 좋은 벗이 될 수 있다는 보은군의 말이 이상하게 귓가를 맴맴 맴돌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지……?’

소진이 차마 묻지 못하고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달라질 것 없습니다.”

“……예?”

“아니, 실은…… 달라질 것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은군은 살며시 소진의 손을 잡았다.

“우리 둘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고 해서. 설령…… 우리가 혼인을 한다고 해도.”

“……!”

“혹은 혼담이 깨진다고 하여도.”

“아.”

“낭자는 내게 여전히 좋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하니 서운해하지도 말고 걱정도 마세요.”

그럴 수 있겠냐는 듯이 그가 슬쩍 소진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소진은 자신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있는 보은군의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녀 사이에 진정한 벗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까?”

“…….”

“진정, 벗이라는 것이 어려울까요? 대감의 말대로라면 우리도 둘 중 하나는 지독한 연모의 감정을 숨기고 있어야 하는데.”

“…….”

“우리는 그런 것도 없이 이리 좋은 벗이 될 수 있었지 않습니까.”

“…….”

“지금까지도 둘도 없는 벗으로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리 지낼 수 있을 것이어요. 하니…… 우리 사이에 오가는 그 혼담을…… 대감께서 좀 물러 달라, 아버지께 청을 드리면 아니 되겠습니까?”

보은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혼인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에서 소중한 벗을 잃고 싶지 않았다.

보은군이 나서서 혼담을 없던 것으로 해달라고 한다면 영의정이 그의 청을 들어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보은군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내가 너무 잘, 숨겼나 봅니다.”

그 말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흐르는 순간, 소진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젠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차마 그 말까지 뱉어내지 못한 보은군은 먹먹한 눈으로 소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

“혼담은 제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낭자. 제 어머니와 영의정 대감께서 일찌감치 정하신 일인지라.”

“아…….”

“하나 너무 걱정은 마세요. 말 그대로 혼담이니.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 혼담 아니겠습니까? 바람이 차갑습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내일이 간택인데 고뿔에 걸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여전히 그는 따스하고 자상했다.

소진은 멍한 얼굴로 보은군을 바라보다가, 그가 주었던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꽃…… 감사합니다. 화병에 잘 꽂아두겠습니다.”

“그래 주면 내가 더 고맙고요.”

이내 그는 얼른 들어가 보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멈춰선 소진은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별채 안에서 숙자가 쪼르르 달려와 소진의 품에 안긴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나…… 이 추운 날, 이리 어여쁜 꽃은 어디에서 났대요?”

“…….”

“보은군 대감마님께서 주셨어요?”

“응. 화원에서 얻어 왔다는구나.”

“아씨 주려고요?”

“그렇다는구나.”

“에휴……. 혼인은 보은군 대감마님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사내와 해야 한다고 했어요.”

숙자의 말에 소진은 가만히 그가 주고 간 꽃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무 잘, 숨겼나 봅니다.

옅은 미소가 어렸지만 어쩐지 슬프게 들리던 음성.

소진은 설마 하는 얼굴로 그가 있다 사라진 자리를 다시 돌아보았다.

***

“저하, 소신이옵니다.”

다음 날, 윤현이 다급한 목소리로 동궁을 찾았다.

헌이 검은 무사 복으로 갈아입다 손을 멈추고 윤현을 돌아보았다.

“들라.”

윤현 역시 헌과 똑같은 복색을 하고 있었다.

“지금 막 재간택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어디에 있는가.”

“대비마마와 중전마마, 그리고 간택에 참가한 규수들 모두 간택 장에 있습니다. 무슨 요리를 하는 과제인지라 모두 간택 장에 붙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하면 지금 중궁전이 완벽하게 비었겠구나.”

헌이 윤현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가 검은 복면을 건넸다.

복면까지 쓰자 완벽하게 세자의 모습을 지워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윤현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감히, 왕세자라고 상상도 못 할 것이었다.

“가자.”

짧은 그 두 글자를 끝으로 윤현과 헌은 동시에 동궁 뒷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궁인들의 눈을 피해, 전각 아래 통로를 이용해 중궁전 쪽으로 쉼 없이 달렸다.

“……쉿.”

그때, 중궁전에 다다른 두 사람은 황급히 몸을 숨기며 중궁전 안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궁인들 대부분이 간택 장에 가 있는 상태라, 중궁전 앞이 한산했다.

윤현과 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식간에 중궁전 안으로 쳐들어갔다.

궁녀 몇이 중궁전 안을 오가고 있을 뿐,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중궁전 담벼락에 기댄 헌은 유심히 중궁전 안을 살폈다.

‘설마 봉희댁을 중궁전 안에다가 숨겨놓지는 않았을 테고…….’

잠시 뒤, 소진에게 용모화를 받고 난 뒤 중궁전 나인들이 쓰는 처소를 뒤져 봉희댁과 닮은 궁녀를 찾을 요량이었다.

그러려면 지금, 중궁전이 비었을 때 중궁전에 수상한 것은 없는지 모조리 찾아내야 했다.

헌은 고심에 잠긴 얼굴로 으리으리한 중궁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그 앞을 오가는 궁녀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일정한 속도와 같은 움직임으로 궁녀들이 중궁전 주변을 휘휘, 돌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중궁전을 차례로 돌았다.

“이상한데…….”

그의 말에 윤현 역시, 무언가 수상쩍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순찰을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하.”

“그러게.”

잠자코 궁녀의 움직임만 살피던 헌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저쪽으로 가볼 테니 너는 내 반대편으로 가 살펴보도록 하라.”

“예, 저하.”

헌이 중궁전 바로 아래에 있는 통로를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윤현이 먼저 동태를 살피다가, 후다닥 헌이 가리킨 반대쪽으로 달려갔고 그가 무사히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는 헌도 움직였다.

“…….”

이내 헌도 무사히 중궁전 처소 바로 아래 틈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뒤편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궁녀들의 발이 보였다.

헌은 허리를 굽혀 궁녀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모두 일정한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헌의 시선이 궁녀들이 나온 쪽을 향했다.

그가 엉금엉금 기어 궁녀들이 나오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는데.

“어……?”

웬 지하 통로 하나가 보였다.

“저하……!”

반대쪽으로 갔던 윤현 역시, 궁녀들의 발을 따라 움직이다가 헌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한 돌로 담이 쌓여 있었지만, 그 사이로 좁은 문이 하나 보였다.

도무지 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 공간이었다.

궁녀들은 익숙한 듯 그 돌담 앞을 기웃거리다가 별다른 움직임이 없나 확인 후, 곧장 지나치고 있었다.

꼭 무언가를 감시하는 듯한 눈빛과 행동.

헌은 복면을 더욱 끌어 올리며 돌담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주 나인, 이쪽으로.”

“……!”

그때,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과 윤현은 서둘러 자세를 낮추며 몸을 감추었다.

중궁전 김 상궁이 웬 궁녀 하나를 데리고 돌담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헌은 온 감각을 곧추세웠다.

“준비되었겠지.”

“예. 지금 간택 장으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마마님.”

“한 규수의 동태를 살피다가 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네가 무사들에게 한 규수의 존재를 알려야 할 것이다.”

“무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궐문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예.”

순간, 한 규수라는 말에 헌의 눈이 커지고 말았다.

“저잣거리로 가면 보는 눈이 많아 곤란할 것이니. 네가 한 규수를 한적한 곳으로 끌어들이거라.”

“예. 마마님.”

“그때 무사들이 한 규수를 납치할 것이니 너는 그때까지 그 여인의 시선을 잘 잡아둬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윤현도 화들짝 놀라며 헌을 돌아보았다.

“저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헌을 불렀다.

그러자 헌이 거칠게 복면을 벗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감히, 내 여인을 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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