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보은군과의 혼인. (46/125)

46. 보은군과의 혼인.

2021.03.08.

“아씨!”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숙자의 목소리에 소진이 서둘러 등을 돌렸다.

“뭘 보고 계시는 거예요? 혼자 웃으시면서……?”

“아니다, 아무것도……!”

소진은 황급히 대문을 막아서며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자 숙자가 비가 이리 세차게 내리는 데도 하나도 젖지 않은 그녀를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래도 지금 아씨 걱정돼서 저잣거리로 나가보려던 참인데……. 우산도 없이 어찌 여기까지 오셨대요? 그것도 하나도 안 젖어서?”

“데려다주셨어, 저하께서.”

소진은 그렇게 속닥이며 숙자가 쓰고 있는 우산 속으로 성큼, 뛰어 들어갔다.

“저하께서 여기까지요?”

숙자 역시,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여기까지.”

“아…… 그래서 방금 아씨가 대문 밖을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살펴보고 계셨구나.”

“뭘 또 내가 도둑고양이처럼 살펴봤대?”

“대문에 딱 달라붙어서는, 꼭 도둑고양이 같던데요? 아, 맞다. 상궁 마마님은 아씨 기다리다 좀 전에 가셨습니다.”

“그러셨구나.”

“예,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온다고 하시었어요.”

그 말에 소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숙자의 팔짱을 꼈다.

“오늘 밤새 너와 내가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요?”

“봉희 용모화 그리기.”

“그거…… 굳이 그려야겠어요? 도움 하나도 안 될 것 같던데.”

“꼭 그려야 해. 가자, 얼른.”

두 사람은 빗속을 헤집고 서둘러 별채로 향했다.

***

“대, 대감마님께서 여, 여기까지 어쩐 일로……!”

갑작스러운 영의정의 포도청 방문에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던 포도부장은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러곤 황급히 영의정의 앞에 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영의정은 굳은 얼굴로 포도부장을 내려다보다, 포도청 앞에서 곡소리를 내고 있는 백성들을 돌아보았다.

심기가 불편한 듯 영의정의 미간이 세차게 구겨져 있었다.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피던 포도부장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영의정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포도청 앞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인가.”

마을의 여인들이 실종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무사의 말에 영의정은 곧장 포도청으로 출두했다.

그러자 포도청 앞에는 정말 백성들이 진을 치고 앉아 마누라를 찾아 달라, 내 여식을 찾아내 달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저…… 그, 그것이.”

“…….”

“우,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한껏 겁에 질린 포도부장은 속히 영의정을 포도청 안으로 뫼시었다.

하필 지금 이럴 때, 포도대장이 자리를 비운 것이 야속했다.

포졸들 역시 영의정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암행어사라도 등장한 듯, 모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만 죽이고 있었다.

영의정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포도청 앞에서 울부짖는 백성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포도부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숨김없이 고해야 하네.”

“……예?”

“조금의 거짓이라도 보탰다간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전하께 고할 것이니.”

“대, 대감마님……!”

살려달라는 듯 포도부장이 손바닥을 비비며 울상을 지었다.

영의정은 의자에 앉으며 싸늘한 시선으로 포도부장을 응시했다.

“마을에 여인들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의 진상은.”

“……그것이 말입니다.”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포도부장은 연신 머뭇거리며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영의정은 더 재촉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포도부장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홱 일어났다.

당장 입궐할 기세로 영의정이 등을 보이자, 포도부장은 서둘러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실, 실종이 아니라 가출입니다……!”

“……?”

“요 근래…… 부녀자들이 다른 동네 사내들과 눈이 맞아…… 가, 가출을…….”

포도부장이 고개를 조아린 상태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자 영의정이 허리를 굽혀, 그의 고개를 치켜세웠다.

“앗……!”

포도부장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영의정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우악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자네는 나를 물로 보는 것인가.”

“예?!”

“아니면 내가 우스운 것인가.”

다른 말 없이 그 말만 내뱉었는데 포도부장은 몸을 파르르 떨고야 말았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베낼 것만 같은 영의정의 기세에 포도부장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바른대로 고하여라.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대감마님…….”

그러다 이내, 깊이 한숨을 내쉰 포도부장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참으로……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모르는 일이다?”

“하나…… 가출이 아닌, 실종은 맞습니다. 하오나 정말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수색을 해 보았지만, 여인들은 간밤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

“증좌도 또한 목격자도 없으니 저희가 무슨 수로 그 여인들을 찾습니까…….”

그 입술이 무자비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결백하다는 듯 포도부장은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말을 이어갔다.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저희도 속수무책입니다. 참말입니다.”

포도부장을 내려다보는 영의정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

“하암……. 언제까지 그리실 요량이어요?”

밤이 깊어가도록 소진의 붓질은 멈추지 않았다.

소진은 뺨에 먹이 묻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제법 봉희의 얼굴이 종이 위에 나타나고 있었다.

“완벽하게 완성될 때까지.”

“이러다 내일 늦잠 주무시면 큰일인데…….”

숙자가 소진의 왼쪽 뺨에 묻은 먹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때, 별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소진은 서둘러 종이를 치웠다.

“소진아, 안자고 뭐하느냐.”

“아버지……!”

영의정의 목소리에 소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먹이 잔뜩 묻은 손바닥을 등 뒤로 감추었다.

이내 별채 문이 열리고 영의정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서책을…… 조금 읽고 있느라.”

“그랬구나.”

영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을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

소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의 앞에 앉으며 영의정의 눈치를 살폈다.

“밤늦도록 무슨 서책을 읽기에.”

“내일…… 상궁 마마님께서 오시기로 하셔서요. 내어주신 과제가 있거든요.”

“그렇구나.”

“아버지께서는 침소 드시지 않으시고 어찌…….”

“잠도 오지 않고 또, 네가 재간택에 임한다고 생각을 하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예…….”

그렇게 말하며 영의정이 가만히 땅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의정은 그녀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무남독녀(無男獨女)로 귀한 여식이었기에 영의정은 그녀의 혼사만큼은 최고의 가문과 이어주고 싶었다.

국구(國舅) 자리가 탐이 나기도 했지만, 제 여식을 왕비의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영의정은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진이 교태전의 주인이 되는 상상을 했다.

그랬기에 지금의 세자는 더욱이 그녀와 함께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간택이 마무리되는 대로 민 소용 마마를 찾아갈 참이다.”

“……예?”

영의정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소진이 얼굴을 들었다.

덩달아 곁에 앉아 있던 숙자의 눈도 동그래졌다.

“민 소용 마마는 어찌…….”

“너는 보은군과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소진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보은군 대감과 혼인이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보은군과 네가 어릴 때부터 민 소용 마마와 주고받던 이야기였다.”

“……하오나 어린 시절부터 대감과 저는 남매처럼 허물없이 지내며 자라왔습니다.”

“…….”

“그런 대감과 어찌 갑자기 혼인을.”

“소진아.”

당황해하는 소진을 영의정이 나지막이 불렀다.

소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벙끗거리다, 멈추었다.

야속하게도 영의정은 진지한 시선으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인이라는 것은 사사로운 정으로 엮일 문제가 아니다.”

“압니다. 알지만…… 보은군 대감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벗처럼 남매처럼 지내 온 보은군과 혼인이라니.

숙자가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했을 때도 소진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단언하고는 했었다.

할 말을 잃은 소진은 그저 멍한 얼굴로 영의정만 바라보았다.

“초간택에서 떨어져야 했을 네가 재간택까지 임하게 되었으니.”

“…….”

“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재간택까지 간 여인이 왕친과 혼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껄끄럽고 불편한 일인지 너도 잘 알 것이니.”

“굳이 그리 껄끄럽고 불편한 일을 해야만 합니까, 아버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진이 애원하듯 다시금 입술을 달싹이자 영의정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껄끄럽고 불편한 것은 내가 다 처리할 것이니. 너는 신경 쓸 것 없다. 나의 여식이 그 정도에 손가락질받게 내가 내버려 둘 성싶으냐.”

“아버지…….”

“그저 너는 몸가짐 바르게 하고 행동거지 똑바르게 하며 이 아비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왜 그 순간.

보은군의 얼굴이 아닌 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

-이제 비가 내릴 때마다 난 낭자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한 얼굴을 하던 헌이 소진의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

소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선 그리 알고는 있거라. 세자의 국혼이 치러지고 난 뒤, 네 혼사를 진행할 것이니 아직 서두를 것은 없다.”

그 말을 남긴 채 영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휘적휘적 별채를 나섰다.

소진은 그 뒷모습을 허탈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늦은 오후.

소진은 내일 헌에게 줄 봉희의 용모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어젯밤, 영의정에게 듣게 된 갑작스러운 혼담에 그녀는 종일 혼이 나간 얼굴로 별채에만 있었다.

“대체…… 보은군 대감과 어찌 혼인을 하라는 말이야.”

그 말만 연신 중얼거리며 그녀는 땅이 꺼지라,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별채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숙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씨…….”

어두운 낯빛의 소진의 눈치를 살피며 숙자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하염없이 용모화만 내려다보던 소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하루 종일 방에만 있을 것이어요? 지금 대감마님 출타하고 안 계시는데.”

“…….”

“활이라도…… 쏘러 가실래요?”

영의정에게 들키면 큰일이 날 일이라, 늘 숙자가 말리던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괜찮을 것도 같았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한숨만 내쉬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기에.

“되었어. 활은 무슨…….”

평소 소진답지 않은 대답에 숙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씨.”

“나 좀 혼자 있고 싶구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소진이 감싸 안은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에 숙자가 소진의 앞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잠시 밖에…… 나가보셔요.”

“싫대도.”

“아니…… 누가 오셨어요.”

누가 왔다는 말에 소진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누구?”

“하…… 이 와중에 참.”

“누군데?”

“아씨께서 좋아할 얼굴인지는 쇤네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가보셔요. 아씨 손님 오셨어요.”

손님이라는 말에 소진이 숙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냐니까?”

“아무튼 나가보시면 압니다.”

좋아할 얼굴인지는 모르겠다는 숙자의 말을 소진이 곱씹었다.

‘아, 혹시……?’

그러다 소진은 혹시 하는 마음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별채를 나섰다.

이상하게 대문으로 향하는 그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소진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흠. 흠흠.”

대문 앞에 선 소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괜스레 옷매무시를 살폈다.

그러곤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대문을 살며시 밀었는데.

“……!”

“낭자, 내일이 재간택이지요?”

“아.”

보은군이 환한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반갑게 맞았을 그인데 어쩐지 소진의 부풀었던 가슴에 실망감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속도 모른 채 보은군은 그저 소진을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감…….”

“잠깐 나왔다가 낭자 생각이 나서요.”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이 소진을 향해 들꽃 한 아름을 내밀었다.

“화원에 들렀다가 꽃이 너무 예뻐.”

“…….”

“낭자에게 주면 좋겠다 싶어, 얻어 왔습니다.”

소진을 향해 꽃다발을 내미는 보은군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아…… 고맙습니다.”

소진은 애써 그를 따라 미소를 그리며 그가 건넨 꽃다발을 품에 안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어디, 아픕니까. 낭자?”

“아닙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이것도 가지고 왔지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던 보은군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소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는 색깔 없는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설당과자입니다.”

“…….”

“아무래도 간택 준비로 외출도 못 하고 집에서 혼자 따분하게 있을 것 같아서. 낭자가 설당과자 참, 좋아하지 않습니까?”

“…….”

“이거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입니다.”

보은군은 여전히 다정한 눈길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설당과자를 받고도, 그리고 품에 어여쁜 꽃을 한 아름 안고서도 소진은 기쁘지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앞에 헌이 서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낭자……?”

아무래도 자신은 보은군이 아닌 헌이 찾아왔길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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