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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비가 내릴 때마다 (45/125)

45. 비가 내릴 때마다

2021.03.05.

소진은 그렇게 말하는 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고백이 소진의 가슴에 닿자, 그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저, 저하…….”

그 순간에도 헌의 진지한 눈빛은 소진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심각한 얼굴의 소진을 보고는 피식, 그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올라섰다.

“내 고백이 그리도 큰일입니까.”

그 말에 가벼운 웃음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소진은 더욱 미간을 구기며 초조하게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표정 좀 푸시지요.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한 얼굴입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러곤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큰일은…… 맞지요.”

“…….”

“세자 저하의 고백인 것을요.”

소진의 중얼거림에 헌이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듯, 피식거리며 손등으로 슬쩍 입을 가렸다.

그의 눈동자에 곤란해하는 소진의 모습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내 고백이 왜 큰일입니까?”

“…….”

“행여 왕세자라는 위엄으로 낭자의 혼삿길이라도 막을까, 염려됩니까?”

웃음을 꾹꾹 밀어내며 헌이 근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정말 그런 걱정이라도 하는 양 소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소진의 낯빛이 적나라하게 창백해져 가자, 헌은 소진의 그런 모습마저 귀여운 듯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솔직히 혼삿길은 걱정 없습니다. 제 아버지가…… 절 처녀 귀신으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요.”

소진은 볼멘소리하며 근심 어린 얼굴을 해 보였다.

“하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이내 그녀의 명료한 시선이 헌에게 향했다.

“저하의 마음에 대한…… 저의 대답을 지금 하여야 합니까?”

대답을 듣고자 한 고백이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이 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 말에 헌이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아, 지금 하시겠습니까?”

“아뇨. 지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진이 헌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얼버무리자 헌이 뒷짐을 지며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대답하면 나만 손해 아닌가.”

“…….”

“당연히 낭자는 단칼에 날 거절할 것인데.”

“뭐, 나중이라고…… 아. 아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다, 소진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소진이 힐끔거리며 헌의 눈치를 살피자 헌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내가 낭자의 대답을 듣자고 한 고백은 아니지만, 낭자가 그렇게 말하니 이거 왠지 오기가 생기는 것을요.”

“사람 마음을 두고 오기를 부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연모하면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

아직 지금껏 누군가를 진심으로 은애해본 적 없는 소진에게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모든 방면에서 똑똑하고 영민한 소진이 유일하게 헤아릴 수 없는 연모의 감정.

소진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며 하염없이 땅을 적시는 빗줄기만 바라보았다.

비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헌이 그녀 옆으로 다가가 서며 빗줄기 사이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영의정 여식의 혼삿길이 막힐 일은 없을 테고. 하면 무엇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러곤 슬며시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이내 소진도 치맛자락을 살며시 쥔 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냥……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고백인지라.”

“감당해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헌의 목소리 위로 빗소리가 젖어 들었다.

“낭자의 대답을 듣고자 함도. 내 마음이 이렇다 응석을 부리는 것도 아니니.”

먹먹한 눈으로 내리는 비만 바라보던 헌이,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헌을 올려다보던 소진과 순간, 시선이 얽혔다.

“그리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냥 내 마음 편하고자 낭자에게 뱉어버린 고백입니다.”

“저하.”

“또한, 나는 지금 이 나라의 왕세자로 낭자의 앞에 선 것이 아니니 이 고백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세자의 권한으로 낭자를 삼간택에 올릴 것도 아니고. 빈으로 맞게 해달라 대비마마께 떼를 쓸 것도 아니고.”

“아.”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그대를 내 후궁으로 삼을 것도 아니니. 다른 이에겐 세자일지 몰라도 낭자에게만큼은 그저 부족함 많은 사내일 뿐입니다.”

그저 부족함 많은 사내일 뿐.

그 마지막 말이 소진의 귓가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것만 같은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 소진은 더 대꾸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입술을 굳게 맞다문 채, 헌을 따라 내리는 빗줄기만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빗줄기 소리만 무성했다.

이내, 소진은 고심에 빠진 듯한 헌의 얼굴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그때, 헌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이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곤 소진과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이고는 헌을 향해 무어라 속닥였다.

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진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환궁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저하.”

그러다 그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돌아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는 호위무사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내 헌이 그 우산을 받아 들어 소진에게 건넸다.

“아, 괜찮습니다. 저하 쓰고 가세요. 저는 여기서 비가 그치기를 좀 더 기다렸다가…….”

하지만 소진의 말에도 헌은 그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우산이 닿자 말을 멈추었다.

물끄러미 헌을 올려다보니, 그가 차분하게 소진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둘 중 하나 비를 맞아야 한다면 그대보다는 내가 맞는 게 낫지.”

소진은 난감하다는 듯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우산을 바라보다, 헌의 곁에 서 있는 호위무사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헌을 비에 젖게 할 수는 없었다.

“속히 환궁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만.”

소진의 물음에 헌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러자 망설이던 소진이 헌의 호위무사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저하 좀 잠시만 빌리겠습니다.”

“……예?”

소진의 말에 이번에는 호위무사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는 헌이 준 우산을 활짝 펴들었다.

헌은 그저 물끄러미 소진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데려다주시지요, 저하.”

곧 우산을 펼쳐 든 소진이 헌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산은 소인이 들겠습니다.”

“…….”

“저하께서 이 세찬 비를 맞고 환궁하시는데 소인이 어찌 편한 마음으로 귀가할 수 있겠나이까?”

“불편하다?”

“사내의 마음으로 제 앞에 선 것이라 하시었지요?”

소진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헌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면 데려다주시지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이 불편하면 사내의 마음도 덩달아 불편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돌한 그 말에 헌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의 작은 손에 쥐어진 우산을 대신 받아 들었다.

“이것은 제가…….”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그럽니다.”

“예?”

“여종도 아닌데 사내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여인이라.”

“아…….”

“사내구실 못한다, 타박 듣기 딱 좋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헌이 소진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둘렀다.

아차, 할 틈도 없이 소진은 헌과 가까워졌다.

“이 여인을 데려다주고 환궁할 것이다.”

“예, 저하.”

호위무사가 몇 걸음 물러났고 헌은 소진과 함께 빗속으로 나아갔다.

세찬 빗줄기에 소진은 본능적으로 그의 곁에 바투 붙었다.

“아…….”

헌은 그녀를 향해 슬쩍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그 때문에 그의 왼쪽 어깨는 점점 젖어갔다.

“용모화는…… 잘 그릴 수 있겠습니까?”

침묵이 길어지자, 괜스레 맞닿은 팔이 신경 쓰여 헌이 슬쩍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소진도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대답했다.

“예.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잘 그릴 필요는 없고 그저 눈, 코, 입만 알아보게 그리면 됩니다.”

“…….”

“그때 보니…… 눈인지 구멍인지 알 길이 없어 난감하긴 했습니다만.”

그 말에 소진이 홱, 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그때는 처음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아닙니다.”

버럭하는 그녀가 귀여운지 헌의 얼굴에는 장난 가득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목구비가 분간이 되게만 그려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아…… 놀리지 마십시오. 아주 깜짝 놀랄 실력을 보여드릴 것이니까요.”

사실 그날 이후로 용모화를 몇 번 그려보았지만.

여전히 구멍 두 개면 눈, 기다란 구멍 하나면 코라는 숙자의 놀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장 집으로 가, 밤새 봉희의 얼굴을 그려볼 참이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낭자의 입으로 깜짝 놀랄 실력이라 하였으니.”

“흠, 흠흠.”

“이번 재간택에서도 떨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실 요량입니까?”

그러다 헌은 그렇게 슬쩍 물었다.

소진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묵묵부답에 헌이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하긴…….”

“…….”

“영의정께서 낭자를 내 반려로 허락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감히 신하 된 자로서 세자 저하의 반려를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다만 소인이 부족하니 저하의 반려로 제격이 아니다, 그리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소진의 대답에 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헌은 그녀 앞에 물웅덩이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소진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

놀란 소진이 헌의 가슴팍을 짚으며 그에게 안기다시피 했다.

“물웅덩이 때문에.”

“……예.”

“조심히 보고 걸으시지요.”

이내 두 사람은 영의정의 사가 앞에 당도했다.

세찬 빗줄기를 우산 하나로 피해야 했기에 둘은 제법 가까이 붙어왔다.

그 때문인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때보다, 헌의 고백에 서먹해졌을 때보다 마음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았다.

“들어가 보시지요.”

헌의 말에 소진이 계단 위로 올라서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아……. 저하, 어깨가 젖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어깨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찌합니까? 우산이 너무 작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에 비해 소진은 머리카락 끝에 물이 조금 묻은 것이 다였다.

소진이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소인이 괜히…….”

그러자 헌은 다시금 그녀를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따스한 미소를 입매에 걸었다.

“괜찮습니다.”

“하오나.”

“이런 것이 연모가 아니겠습니까.”

“…….”

“이제 비가 내릴 때마다 난 낭자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소진의 고개가 헌을 향해 서서히 젖혀졌다.

헌은 물끄러미 젖은 어깨를 내려다보며 환한 얼굴을 했다.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젖어본 것이 처음이니.”

가만히 손을 모으고서는 헌을 따라 그의 젖은 어깨를 바라보는 소진.

이내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조아렸다.

“바래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면 살펴 가시옵소서, 저하.”

“그날 재간택 때.”

“…….”

“어디서 용모화를 받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마 오늘 그 서책방.”

“……?”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기다려 주시지요.”

“알겠습니다. 간택장의 사정을 보고 있다, 낭자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도록 하지요.”

헌이 얼른 들어가 보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이며 돌아섰다.

치맛자락을 살며시 쥔 소진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금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의 젖은 어깨가 신경이 쓰였다.

“저기…… 저하.”

소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헌이 돌아서다 말고 소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인 역시, 비가 올 때마다 저하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사정없이 흙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소진이 그렇게 말했다.

조금 부끄러운 듯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며 그녀는 땅바닥만 바라봤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젖은 것이 처음이니까요.”

“……!”

“하면 살펴 가십시오!”

그 말을 냅다 던지듯 뱉어내고 소진은 서둘러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곤 쿵, 대문을 닫으며 떨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미쳤어.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야.”

소진은 분주히 숨을 고르며 슬쩍 뒤를 돌아 문틈 사이를 바라보았다.

헌이 여전히 대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어쩐지 소진의 가슴이 수줍게 콩, 콩, 콩 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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