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조선 직진남, 이헌. (44/125)

44. 조선 직진남, 이헌.

2021.03.01.

“명하신 대로 살피고 왔습니다만. 봉희라는 여인은 집에 있었습니다.”

영의정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앉은 무사가 그렇게 말하자 영의정의 눈이 커졌다.

“확실한 건가.”

“예. 확실히 집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보았다는 말인가.”

영의정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얼핏 보기는 했지만, 확실히 봉희의 얼굴이었다.

소진이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고 집까지 오가던 벗이었기에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봉희가 집에 있다는 무사의 말을 듣고도 영의정은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알겠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 와야 할 것이 있다.”

“하명하소서.”

“마을의 여인들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돈다던데.”

“…….”

“그 소문에 대한 진상을 알아 오거라.”

“예, 대감마님.”

무사가 안채를 나섰고 영의정도 서둘러 출타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헌과 소진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두 사람은 서먹서먹한 얼굴로 정면만 응시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손끝이 스치자 둘은 서둘러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한데…… 서책 방엔 어찌 납시신 것입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자 소진이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헌이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행수라는 사내의 집을 갔었습니다.”

“아. 거처지를 알아냈습니까?”

“예. 한데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습니다. 그 집에서 행여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을까, 뒤지다가 서책 하나를 발견해서 어떤 책인지 알아보려고 갔었습니다.”

“그렇군요.”

“청국에서 떠도는 야담집인 것 같았습니다.”

“청국이요?”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헌을 올려다보았다.

곧 그가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소진에게 건넸다.

그녀는 서둘러 서책을 펼쳐 한 장, 한 장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

“겉으로는 청국을 오가는 무역 상인인 척 행색을 하고 다니는 듯싶습니다.”

“아……?”

“그래야 그 많은 재산이 타인의 시선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테니. 양반의 자제도 아니고 한양에서 유명한 권세가도 아니라면.”

“예.”

“무역 상인이 제격이지 않을까요. 해서 오늘부터 한양에 유명한 상인들을 상대로 탐문을 해볼까 합니다.”

그 말에 소진이 씁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꼭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만큼이나 먹구름으로 잔뜩 흐려진 하늘이었다.

헌도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그때, 소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헌의 귓바퀴를 쓸었다.

그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에게 닿았다.

먹먹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진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벗이…… 손 닿으면 있을 곳에 있는데.”

“…….”

“데리러 가지도 못하고 그 곁만 며칠을 맴돌고 있습니다.”

“낭자.”

“허무하다가도 그래도 눈앞에 있는 것이 어딘가 싶어, 다행이다가도.”

헌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자 소진이 고개를 돌려 헌을 바라보았다.

“재간택 때, 중궁전이 빌 것입니다.”

“……예?”

“중궁전이 비면 내가 직접 들어가 낭자의 벗을 찾아보겠습니다.”

“저하. 위험한 일입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낭자는 재간택에 임하시지요. 내가 직접 중궁전에 들어가 볼 것이니. 해서 낭자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데요?”

“벗의 용모화를 그려 재간택 날 내게 줄 수 있겠습니까?”

소진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소인도 어쩌면 그날 중궁전을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어찌.”

그녀의 말에 헌이 조금 놀란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소진은 말수를 아끼며 앞서 걸었다.

헌은 그녀의 뒤를 묵묵히 뒤따랐다.

“재간택에 임하면…… 종종 중궁전에서 중전마마를 뵙기도 한다더라고요.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낭자는 간택 때문에 간 것이니 중전마마만 뵙고 속히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소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을 돌아보며 미간을 구겼다.

“저하께서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서 그러지요.”

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슬쩍 구겨진 미간을 펴주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소진이 흠칫 놀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선 천지에 왕세자를 걱정하는 백성은 낭자가 유일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왕세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은 다 누려가며 요령껏 잘해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소진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헌도 소진과 발걸음을 나란히 하며 묵묵히 걸어가는데 이내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차례 소나기가 퍼부을 모양인 듯, 빗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우르르 쾅, 쾅 하는 천둥소리도 사방에서 들렸다.

소진은 한껏 어깨를 웅크린 채로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이쪽으로요.”

헌이 그녀의 손목을 가만히 쥐고는 처마 밑으로 이끌었다.

소진은 서둘러 그를 따라가 비를 피했다.

“금세 그칠 소낙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헌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소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집에 속히 돌아가 보아야 하는데…….”

“참, 할 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헌이 소진을 향해 물었다.

이곳에서 이렇게 할 말이 아니었는데 싶어, 소진은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비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슬쩍 닦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 일.”

“…….”

“그래도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얼굴이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덩달아 헌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날 일이라 하시면…….”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배웠습니다.”

“…….”

“아무리 제 기분이 언짢고 저하께 화가 났다고 해도…… 비겁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 놓으셔요.”

“아.”

아무래도 아버지인 영의정에게 헌이 기억 소실증에 걸렸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헌은 입술을 꾹 맞다문 채, 가만히 소진을 응시했다.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던 그녀가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곤 내내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슬쩍 꺼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드려야 저하께서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아서요. 화난다고 입 꾹 다물고 있는 건 내 손해니까.”

“낭자.”

“뭐, 저하가 걱정되어 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하께서 속히 기억을 찾아야 그 행수라는 사내의 정체를 알아낼 테니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녀는 부러 뾰로퉁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다 행여 기억 소실증이라는 병을 헤집는 것이 세자에게 아픔이 될까, 그녀는 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이 나시는 겁니까? 배후를 물으셨으니…… 아무래도 미행하던 순간부터 잃으신 것이지요?”

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잠행을 나간 순간과 머리를 다쳐 의원에 누워 있던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만 주억거리자 소진이 슬그머니 그를 돌아보았다.

“하면…… 저와 저잣거리에서 마주친 것은요?”

“내가 낭자와 마주쳤었습니까?”

“예. 해서 그때 저하가 손수건을 떨어뜨려서 제가 그걸 돌려드리기 위해 저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아.”

“그러다 우연히 저하께서 습격당하시는 것을 보았고요. 저하께서 쓰러지던 순간에 그 행수라는 사내와 그의 부인이 달아나는 것도 봤고요.”

소진의 말에 조금씩 궁금증이 해소되고 있었다.

헌은 그녀의 말을 토대로 그날의 풍경을 머릿속에 분주히 그려보았다.

풍등제가 열리던 밤. 잠행 중이던 자신과 마주쳤던 소진.

그리고 습격을 당했고 쓰러진 자신을 소진이 부축했다.

거기까지 그려보았지만, 여전히 헌의 머릿속은 흐릿하기만 했다.

“한데 그 배후가 왜 기녀라고 생각하시었습니까?”

소진 역시,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사건 직후 애월루로 뛰어 들어갔다는 것을 내 무사가 보았다고 하더군요.”

“아.”

“해서 애월루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아 1년을 기방에 오갔습니다.”

“그 때문에요……?”

“애월루가 워낙 소문도 빨리 돌고 양반들 사이의 비밀도 많이 오가니, 충분히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그럼 그것 때문에 헌에게 난봉꾼 세자라는 추문이 뒤따랐던 것일까.

순간 헌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서 저하께 그런 추문이 따랐던 것입니까?”

추문이라는 말에 헌은 익숙하다는 듯이 미소를 그려보았다.

그러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것 역시 기억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한 내 책임, 아니겠습니까?”

“…….”

“하면 이젠 낭자의 오해가 조금 풀렸습니까?”

“예?”

“난봉꾼에 호색한에 망나니 세자.”

“……아.”

먹먹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헌을 바라보며 소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함께 있던 여인은 제 또래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김 도령이라는 사내의 부인은 오늘 보았습니다.”

“아, 보셨습니까?”

“예. 한데 역시나 초면이었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기억이 지워진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에 헌도 허탈한지 실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리만큼 깨끗합니다. 나와 연관된 자들을 뒤따랐을 것인데.”

“…….”

“지금 마주한 자들은 전혀 일면식이 없는 자들이니. 대체 그날 밤, 난 무엇에 홀려 그들을 뒤따른 것인지……. 도깨비라도 본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소진은 어쩐지 가라앉은 듯한 그의 팔을 슬며시 쥐었다.

그러자 헌이 고개를 돌려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반드시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낭자.”

“저하는 강한 분이시니까요.”

“내가…… 강한 사람입니까?”

소진의 위로에 헌이 재미있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럼요. 저희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세자 저하는 참으로 강하신 분이라고요.”

“영의정 대감께서 나를 그리 생각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니 꼭, 기억해 내세요.”

“…….”

“그날 대체 저하께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를 돌아보며 헌이 나지막이 미소를 띠었다.

소진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낭자.”

헌의 낮은 목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예?”

“이젠 내가 낭자에게 할 말이 있는데.”

“…….”

“음. 나의 마음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마음이라는 글자가 그녀의 귓가에 콕 박혔다.

헌은 진지한 얼굴로 소진을 돌아보며 그녀의 양팔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낭자에게 내 마음을 이해해달라, 헤아려달라.”

“…….”

“혹은 나의 마음과 같아 달라,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편안하게 들어주십시오.”

“저하.”

“내 마음은 나의 것이라 하였지요?”

“…….”

“예. 낭자의 말에 밤새 생각해 보았습니다. 덜컥 나의 마음은 이렇다고 낭자에게 쥐여주는 것은 참 별로인 것 같더이다.”

찬찬히 말을 이어가는 헌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고요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소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이제부터 나는 낭자를 향해 직진하는 이 마음을 멈추게 할 생각도. 또한, 깊어지지 말라 제지할 생각도 없습니다.”

“예?!”

“낭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어디까지 깊어지려나, 고민하지 않고 그저 좋아할 생각입니다.”

“저하…….”

단도직입적인 그 말에 소진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기 시작했다.

묘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마음에 대한 부담을 낭자에게 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럼.”

“홀로 좋아해 보겠습니다.”

“지, 지금…… 저를 연모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소진이 입술을 슬쩍 벌린 채 물었다.

그때, 그녀의 뺨 위로 물방울 툭 떨어졌고.

이내 물방울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입술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헌은 그런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손을 뻗었다.

그녀의 아랫입술 끝에 묻은 빗방울을 헌이 손가락 끝으로 닦아냈다.

그의 온기가 소진의 입술을 예민하게 스쳤다.

“예. 해보려 합니다.”

“저하……!”

“멀지도 가깝지 않은 이곳에서 낭자를 열심히 연모해 볼 생각이니.”

“……!”

“혹시나 그런 내가 가엾어서 나의 마음을 받아주고 싶다면 그때 받아주시지요.”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소진의 머릿속은 하얘져 갔다.

“지금 이거…… 고백, 입니까?”

하지만 헌은 진심이라는 듯,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예. 이젠 이 관계에서 갑(甲)이 되어버린 낭자를 홀로 연모해보겠다는.”

“……!”

“을(乙)의 서글픈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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