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밤새 나를 괴롭히던 얼굴.
2021.02.26.
서책 방으로 향하던 소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 가지의 과제로 그날, 반드시 궐에서 봉희와 관련된 단서를 찾아야만 해.’
자신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첫 번째 과제로 궁인들을 상대로 봉희의 행적을 좇고, 두 번째 과제로 봉희 외의 다른 실종된 여인들이 궐에 있는지 확인하고. 세 번째 과제로…….
“중궁전을 직접 들어가 보는 거야.”
야무지게 머릿속에 설계를 해 보는 소진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서 숙자가 소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 숙자야!”
“아가씨!”
숙자는 숨을 몰아쉬며 소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주위를 휘휘, 살피다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씨의 말대로 대감마님께서 봉희댁 집을 감시하라 일렀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소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숙자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해서 어찌 되었어?”
“마침 봉희댁 남편 누이가 봉희댁이랑 똑같은 행색을 하고 집 안에 돌아다니고 있어서 위기를 모면했지 뭐예요.”
“그것 참 다행이구나. 무사들은?”
“한 반 시진 정도……? 지켜보다가 모두 물러났습니다. 그것까지 지켜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잘하였다, 잘하였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며칠은 더 거짓 행색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한데 아씨, 어디 가셔요?”
그러자 소진이 숙자의 팔짱을 끼며 걸음걸이를 나란히 했다.
“마침 잘 되었구나. 서책 방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가자.”
“서책 방은 왜요?”
“과제 연습.”
“아…… 간택?”
“응. 가자.”
소진은 그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책 방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내릴 듯, 하늘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한데 과제가 뭔데 서책 방으로 가시는 거예요?”
“백성에게 유익할 만한 책을 골라오는 거.”
“……뭐, 글자라도 좀 알려주고 그런 과제를 내시던가. 하여튼, 본인들밖에 몰라.”
숙자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소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나 말이야. 글자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책이라니…….”
“해서 무엇을 골라 가시려고요?”
“어…… 간택에서 떨어져야 하니까. 음, 말도 안 되는 책을 골라 가야겠지?”
그때, 소진이 서책 방 앞에 도착하자 숙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소진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씨, 여기서 볼일 보고 계셔요. 저 안방마님 심부름 생각나서 후딱 다녀올게요.”
“알겠어. 여기에 있을게.”
“예!”
그리고 홀로 남겨진 소진은 서책 방 안으로 들어섰다.
특유의 종이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소진이 제일 좋아하는 냄새였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사르르 번졌고 소진은 열심히 서책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민화(民話)집부터 둘러보아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음…….”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며 그녀가 책방 이곳저곳을 분주히 둘러보던 그때.
“……?!”
바로 옆, 의자에 앉아 골똘히 서책에 집중하고 있는 헌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는 아직 소진을 발견하지 못한 듯, 열심히 서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멈춰선 소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멀쩡하네. 안색이 어제보다 더 훤한 걸 보니…… 잠도 푹 잔 것 같구나.’
그저 서책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헌.
아주 책에 푹 빠진 듯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소진은 못내 어젯밤 그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이 억울했다.
‘나만 못 잤지? 그치? 나만…… 또 나만.’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웅얼거리다, 홱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싸늘하게 그의 앞을 지나치며 자리를 옮기려는데.
“……!”
아무렇지 않게 툭, 소진의 손목을 꼭 움켜쥐는 헌이었다.
갑작스럽게 닿는 온기에 소진은 놀란 얼굴로 헌을 내려다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어찌…….”
소진이 얼굴을 구기며 헌을 빤히 내려다보았는데.
헌은 탁, 소리 나게 서책을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손은 소진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왜 피해.”
그렇게 말하며 헌이 그제야 소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감한 시선이 그녀의 콧잔등 위에 내려앉았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낭자께서 피하는 것입니까.”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미소도 찾을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헌이 소진의 손목을 슬그머니 놓았다.
“앞으론 내가 피할 것입니다. 하니, 신경 쓰지 마시고 볼일 보시지요.”
정중하게, 한편으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그 말을 남기고서는 헌이 등을 보였다.
“아…….”
소진이 서둘러 그를 잡으려 했지만, 헌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멀어지는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도 등을 돌렸다.
“그래. 잘못은 저하께서 해놓고…… 쌀쌀맞긴 왜, 쌀쌀맞은 것입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기억 소실증에 관해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소진은 그의 말대로 그에게 신경을 끄고 볼일이나 볼 참이었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녀가 책장을 둘러보다가 이내 서책 방 주인에게 걸어갔다.
“민화집을 찾소만. 어디에 있소?”
“아, 그건 저-기. 저쪽 끝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두 번째 책장에 있소.”
“……오른쪽으로 꺾어 두 번째. 알겠소.”
그녀는 주인이 일러준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오른쪽으로 꺾어, 두 번째 책장을 살피는데.
아무리 보아도 자신이 찾는 민화집은 없었다.
“어디에 있다는 거야……. 대체. 오른쪽으로 꺾어서 여기가 두 번째 책장이잖아.”
소진은 중얼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책장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책을 둘러보고 있던 헌이 이쪽으로 휘적휘적 다가왔다.
“아.”
자신에게 다가오는 헌을 발견한 소진은 괜스레 긴장해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소진의 앞에 다다른 헌은 바짝 그녀에게 붙어섰다.
그러자 그녀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어찌…….”
아무 말 없이 직진하는 헌과 그에게 밀려나 뒷걸음질 치는 소진.
이내 헌이 그 묵직한 발걸음을 멈추자, 소진도 멈춰 서게 됐다.
그리고 이내 헌이 몸을 돌려 책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소진도 덩달아 그에게 밀려 책장에 등을 딱 붙이고 섰다.
그런 그녀를 무지근한 시선을 내려다보는 헌, 두 사람의 거리는 겨우 한 뼘이었다.
소진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빳빳하게 젖혀 헌을 올려다보았고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경을 끄라더니, 왜……!”
“여기.”
어찌 그러냐고 물으려던 찰나.
헌이 손가락을 뻗어 소진이 찾는 민화집을 무심하게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아.”
“여기가 오른쪽에서 두 번째.”
“……?”
“저기는 오른쪽에서 첫 번째고.”
그렇게 말하며 헌이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다시금 등을 돌렸다.
“아, 예. 감사합니다.”
소진은 그의 손에 들린 민화집을 서둘러 받아 들고서는 헛기침했다.
괜스레 긴장했던 것이 창피해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둘러 손부채질을 하며 민화집을 살폈다.
그러다 힐끔, 곁눈질로 헌을 돌아보니 그는 다시 서책에 집중한 채 멀어졌다.
이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헌.
‘어디로 갔지……?’
소진은 민화집을 품에 안은 채, 까치발을 하고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아까 가까이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이 연신 눈앞에 왔다 갔다,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간밤에 푹, 잔 얼굴이었다.
그가 얄미웠다가 또 궁금하기도 했다가…….
소진은 널을 뛰는 자신의 마음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슬쩍 말아 물며 허리를 굽혀 반대편 책장 아래를 살폈다.
그런데 헌의 신발이 자신의 바로 건너편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
화들짝 놀란 소진이 서둘러 굽혔던 허리를 펴, 고개를 정면으로 들었는데.
“엄마야!”
서책 하나를 뽑아 들며 헌이 서책과 서책 사이에 생긴 틈으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소진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이러면 제가 잘 보이지요.”
이내 헌이 서책 하나를 더 뽑아 들자 그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아.”
“아까는 피하더니.”
“……!”
“이제는 어찌 찾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게.”
“낭자가 정해주시지요.”
“……무엇을요.”
책장 하나를 두고 헌과 소진의 나지막한 음성이 오갔다.
소진은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며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피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얼굴을 보여야 하는 건지.”
“저하.”
“낭자를 피해야 하는 것도, 낭자를 마주해야 하는 것도. 내게는 둘 다.”
“……?”
“벌을 받는 것처럼 아픈 일이니까.”
그 말에 소진이 아래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그를 향해 들었다.
“어찌 벌이라 하십니까?”
그렇게 되묻는 소진의 목소리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피하라고 하면 낭자의 얼굴을 못 보아서 괴롭고.”
“……!”
“또 마주하라고 하면 이 마음이 더 깊어지니 괴롭고.”
“놀리지 마십시오. 이제는 그 꿀 발린 말에 속지 않을 것이니까.”
소진이 뾰로통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하자 헌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자신이 소진이 그랬던 것처럼 되물었다.
“어찌 꿀 발린 말이라 하십니까.”
“하나도 괴롭지 않던 얼굴이니까요.”
“…….”
“소인은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그런 큰 비밀을 알아버려서…… 앞으로 내가 어찌해야 할지, 너무도 고민이 되어서.”
“…….”
“저하께 너무한 것은 아닐까. 내 기분에 치우쳐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섰던 건 아닐까. 잠 한숨도 못 잤는데.”
그 말에 헌은 서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는 성큼 소진에게로 걸어왔다.
소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소진의 앞에 멈춰선 그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 역시 한숨도 못 잤습니다.”
“한데 잘 잔 얼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원체 타고난 얼굴이라.”
“……?”
“잘 잔 것처럼 보일 뿐이니까.”
그 말에 소진이 그의 얼굴을 살피다, 시선을 거두었다.
바닥 위로 떨어지는 그녀의 시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헌이 뒷짐을 지고선 입술을 달싹였다.
“밤새 괴롭히던 얼굴이 있었습니다.”
“……?”
“김 도령이라는 내 기억 속에 없는 그자의 얼굴이 밤새 어른거려 그런 줄 알았는데.”
“…….”
“이제 보니 밤새 내 꿈에 나와 잠 한숨도 못 자게 나를 괴롭히던 얼굴이, 여기에 있었네.”
소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헌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매단 채,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부터는 나만 괴롭겠습니다.”
“저하.”
“하니, 낭자는 더 마음을 앓지 말고 편히 주무십시오. 나 때문에 낭자께서 잠까지 설친다면 내 마음이 더 괴로울 것 같으니.”
헌은 그렇게 말하며 그 특유의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마주하자 어쩐지 소진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헌은 이내 그 말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소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용기 내 한 걸음을 뗐다.
“정해달라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그의 옷깃을 슬쩍 쥐었다.
헌의 두 발이 바닥 위에 가만히 멈춰 섰다.
“잘못은 저하께서 하셨으니까.”
“……?”
“저하는 그대로 계십시오.”
그 말에 돌아섰던 헌이 빙그르르 몸을 돌려,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헌과 소진의 시선이 찰나에 부딪혔다.
“피하는 것도 마주하는 것도…… 모두 소인이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민화집을 있던 자리에 꽂아두고는 헌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해 보였다.
“따라오시지요. 할 말이 있으니까.”
당돌하게 그 말을 남긴 채 쪼르르 사라지는 소진을 바라보며 헌은 그만 핏,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큰일이구나……. 널 보면 자꾸 웃음이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