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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재간택에 임할 이유 (42/125)

42. 재간택에 임할 이유

2021.02.22.

소진은 아침부터 몸을 숨긴 채, 안채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의정이 오늘 무언가, 무사에게 명령을 내려 봉희 집을 감시하라 할 것 같아서.

그때, 마당으로 향하던 숙자가 소진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에 섰다.

“아씨.”

“깜짝이야……!”

“여기서 뭐 하세요?”

“쉿.”

소진은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고는 다시 안채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 아무래도 봉희의 집을 감시하라 명을 내리실 것 같아서.”

“아마 봉희댁 남편이 잘 채비해 놓았을 것이어요.”

숙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채로 무사 하나가 서둘러 들어섰다.

이내, 잠시 후 무사가 곧바로 대문을 나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그 모습을 뚫어지라 지켜보던 소진은 숙자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대신 들었다.

“예?”

갑자기 자신의 바구니를 빼앗아 드는 소진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숙자.

소진은 숙자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속히 따라가 보아라.”

“쇤, 쇤네가요?”

“나는 곧 간택 수업이 있지 않으냐.”

“그치만…….”

겁이 나는 듯 머뭇거리는 숙자를 향해 소진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 그냥 네 볼일을 보는 척 뒤만 따라가면 돼. 얼른……!”

“알겠어요, 아씨.”

숙자는 머뭇거리다, 무사가 사라진 쪽으로 황급히 달음박질쳤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진이 깊이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봉희가 사라진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어제 숲속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 난 뒤라 마음이 더 뒤숭숭했다.

함께 있던 여인들이 순식간에 불에 타 죽은 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소진은 어젯밤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검게 그을린 시체들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단순한 실종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파헤칠수록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소진이 스르륵 주저앉으며 바구니를 꼭 끌어안았다.

“행수라는 사내만 찾으면 일의 실마리가 조금 풀릴 것 같은데.”

헌이 당연히 그의 뒤를 쫓았으니 그의 얼굴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한담…….”

그래도 소진에게는 ‘재간택’이라는 기회가 아직 남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허망하게 그 기회를 날릴 수 없었다.

소진은 자신이 재간택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마냥 실망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게 재간택이 봉희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영의정에게 듣기로 재간택은 초간택과 달리 까다로운 과제로 진행이 된다고 했다.

궁녀들과 함께 과제를 해결하거나, 궐 안팎을 오가며 자유로이 과제를 진행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을 빌미 삼아 궐에서 봉희를 만날 수 있길 기대했다.

여차하면 중전마마께 인사를 올린다는 명분으로 중궁전의 담도 넘어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단단히 했다.

고민에 잠긴 소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데 삐거덕 대문이 열렸다.

“아…… 상궁 마마님.”

간택 수업 때문에 궐에서 상궁이 발걸음한 것이었다.

소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그녀에게로 향했다.

***

“뭐라. 김 도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예, 저하. 김 도령이라는 자의 거처지를 밤새 수소문 끝에 찾긴 하였는데.”

“그랬는데.”

“……그것이, 밤새 집을 비우고 몸을 숨겼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헌은 읽고 있던 서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윤현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거칠어졌다.

“거처지는 어디인가. 내가 직접 가 보아야겠다.”

“가셔도…… 아마 김 도령은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윤현의 말에도 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입고 있던 곤룡포를 풀어헤치며 익선관도 벗었다.

윤현이 서둘러 그의 옷과 익선관을 받아 들며 그를 보필했다.

“만나지 못해도 흔적은 뒤져야지.”

“…….”

“내가 대체 왜 그자의 뒤를 따랐는지. 나만 모르는 그 날의 이야기가…… 밤새 나를 조롱하고 비웃는 것 같아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

그렇게 말하는 헌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윤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속히 채비하겠나이다, 저하.”

이내 헌은 잠행복으로 갈아입은 채, 서둘러 궐을 빠져나갔다.

길게 너울을 늘어뜨린 채, 그가 저벅저벅 저잣거리를 가로질렀다.

“어느 대신의 자제라도 된다더냐.”

뒷짐을 지고 묵묵히 걷기만 하던 헌이 별안간 윤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윤현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어떤 정보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어떤 정보도?”

“그저 김 도령이라고만 불릴 뿐. 그자의 나이도 이름도 또한, 가문도 알 수 없었습니다.”

“…….”

“다만 거처지를 수시로 옮긴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한양 사람이 아닌 것도 같고요.”

“수시로 거처지를 옮긴다?”

그 말에 헌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다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입술을 진득하게 쓸었다.

“정체도 숨긴 채, 한양 곳곳을 신출귀몰한다라…….”

“…….”

“해서 이번에는 어디에 숨었을까.”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곧 윤현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웬 으리으리한 기와집.

궐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헌은 미간을 구기며 기와집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하늘과 맞닿을 만큼 높이 솟은 지붕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곳인가.”

“예, 저하.”

“이리 좋은 집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군.”

“이곳에서 산 지도 얼마 안 되었다고 합니다.”

윤현의 말에 헌이 대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정말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집 안 꼴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간밤에 서둘러 이곳을 떠난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헌은 마당에 널브러진 서책 중 하나를 주워 느리게 책장을 넘겼다.

아무래도 청국 말로 쓰인 야담(野談)인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그러더냐.”

“이웃들을 수소문했습니다. 어언 일 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던데.”

“일 년 전이면…… 내가 이 자를 미행했다던 시기와 비슷하구나.”

순간, 그의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헌이 얼굴을 구기며 이마를 짚자 윤현이 걱정스럽게 그를 부축했다.

“저하…… 너무 무리는 하지 마옵소서.”

“어찌 무리를 안 할 수가 있겠는가. 내 기억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인데.”

그때, 대문 밖에서 요란스럽게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헌과 윤현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이내 조심스럽게 대문이 열리고 여종인 것 같은 하인 하나가 먼저 마당으로 들어섰다.

“없는 것 같습니다, 마님.”

여종이 밖을 향해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자 이내 너울로 얼굴을 가린 웬 여인이 황급히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그녀의 호위무사인 듯한 무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쇤네가 직접 찾아와도 되는데…….”

비단옷으로 치장한 여인은 홀로 어딘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중요한 것이니 내가 직접 찾아야 한다 하지 않았더냐.”

“아, 예…… 마님.”

“너희는 대문을 단단히 지키고 있거라. 서방님께서 언제 어느 때, 그놈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하였으니.”

그 말을 남긴 채 여인이 서둘러 사라졌고 그것을 지켜보던 헌과 윤현은 그 여인이 김 도령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앳된 목소리가 꼭 헌의 또래 같았다.

윤현과 헌은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여인이 향한 곳과 이어진 길이 있을 테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기다, 화원 앞에 멈춰선 여인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은 주위를 휘휘, 살피더니 이내 너울을 벗었다.

순간, 헌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날아가 꽂혔다.

“……?!”

너울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여인은 쭈그리고 앉아 흙을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저하……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까?”

윤현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춘 채, 헌에게 물었다.

하지만 헌은 말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여인이다.”

아무래도 저 여인이 김 도령의 부인일 것이었다.

자신이 그날 밤, 저 여인과 김 도령 뒤를 황급히 뒤따랐다고 했다.

‘대체…… 나는 왜 얼굴도 모르는 자들을 미행했단 말인가.’

의문만 남긴 채, 여인은 흙 속에 묻어 두었던 서찰 하나를 꺼내 품에 넣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헌은 윤현에게 저 여인의 뒤를 따르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고 윤현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 근처를 호위대에 지키라 하였으니, 제가 저자들의 뒤를 따르고 나머지 몇 명은 저하의 뒤를 호위하라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서책 방에 가서 이 책에 대해 알아볼 것이니 궐에서 보자꾸나.”

윤현이 그들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하고 헌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김 도령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뭐 하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찾지 못한 헌은 너울을 늘어뜨렸다.

곧, 그의 발걸음은 서책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가 네 놈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야겠구나.”

***

“과제가 세 가지나 된단 말씀입니까?”

“예. 심도 있는 평가를 위해 그리 정했다 들었습니다.”

소진이 서찰 세 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중전이 몰래 빼돌린 재간택 과제가 적힌 서찰이었다.

소진은 그중 하나를 들어 펼쳐 보았다.

“백성을 위한 음식 만들기……?”

“예. 백성에게 주고 싶은 음식을 만들란 과제를 대비마마께서 출제하셨다, 하옵니다.”

“이건 따로 연습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워낙 음식 솜씨가 없어서요.”

“결과물보다는 과정을 주로 볼 것입니다. 이번에는 중전마마께서도 직접 참관하실 예정이니까요.”

그 말에 소진이 멈칫하며 다시금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저…… 그럼 이 과제를 저 혼자 합니까?”

“아닙니다. 소주방 나인 중 하나를 선택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아, 꼭 소주방 나인이어야 합니까?”

“예?”

“혹, 교태전…… 나인 중에서는.”

“교태전은 이 과제와 관련이 없으니 배제됩니다.”

그렇다면 소주방 나인들에게 봉희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그녀의 행방에 관해 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종이를 들었다.

“두 번째 과제는 궐 안에서 가장 어여쁜 꽃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과제를 핑계로 중궁전의 담을 한번 넘어 볼까, 소진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퍼뜩 스쳤다.

“저 혹 이 꽃을 꺾어야 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습니까?”

“장소라시면.”

“뭐 간혹 대전……이라던가, 아니면 중궁전……이라던지?”

“안됩니다. 대전, 중궁전, 대비전, 그리고 동궁전은 출입 금지입니다.”

지금까지의 과제들로는 봉희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 그녀는 속이 상했다.

그녀가 마지막 종이 한 장을 들어 펼쳤는데.

“백성에게…… 유익한 서책을 가지고 오라?”

“예, 아가씨.”

“아니, 백성들이 글자를 못 읽는데 어찌 서책을……?”

소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궁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성들이 읽으면 유익할 것 같은 책을 골라오시면 됩니다.”

“참 까다로운 과제들이네요.”

“이건 직접 아가씨께서 저잣거리로 나가 서책 방을 다녀오셔야 합니다.”

소진은 잔뜩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 과제들로는 봉희를 찾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재간택에 오르면 중궁전을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야속하다는 얼굴로 종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과제들이라면 굳이 자신이 간택에 참여하지 않고 보은군에게 부탁해, 궁녀 행색을 하고 궐을 돌아다녀도 충분히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과제 같은 경우에는 아예 궐과는 상관없는 과제이니, 소진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어두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상궁이 묻자, 소진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과제들이 너무 어렵네요.”

“하지만 마지막 과제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

“그것은 전적으로 중전마마께서 심사를 내리실 것이라.”

“……예?”

“먼저 서책을 찾은 이는 중궁전으로 가, 중전마마를 뵙고 책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면 끝입니다.”

그 말에 소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다면…… 제가 중궁전으로 직접 가야 한다는…….”

“예, 아가씨. 한데 어차피 중전마마께서 아가씨 간택의 뒤를 봐주기로 하였으니.”

“……!”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순간 소진이 재간택에 임할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고 상궁은 소진의 꿍꿍이도 모른 채, 입술을 달싹였다.

“하면 오늘은 쉬운 것부터 해보지요.”

“예?”

“지금 서책 방으로 가서 백성에게 유익할 만한 책 하나를 가지고 오시지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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