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함부로 그 여인을 가슴에 새긴 책임.
2021.02.19.
소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헌을 올려다보았는데, 헌이 손을 뻗어 소진의 머리카락에 묻은 낙엽을 떼어 주었다.
“얼마든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헌은 소진의 눈을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그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녀의 맑고 고운 눈동자를 바라보려니 괜히 가슴에 찬 바람이 부는 듯, 시려왔다.
소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에 쥐여진 그녀의 용모화를 내려다보았다.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최선을 다해 변명해 보겠습니다.”
“…….”
“그러니 낭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난 그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헌은 소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먼저 등을 보였다.
소진은 그런 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미웠지만.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 괘씸하고 용서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한소진이라는 여인이 내 속에 깊이 박혀 있구나.
소진 역시, 헌의 말처럼 자신의 가슴 속에 헌이라는 사내가 깊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애써 그녀는 발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그녀는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말입니다.”
“……?”
“낭자와 함께했던 시간 모두, 따뜻했습니다.”
“…….”
“내가 기억 소실증에 걸렸다는 것도 그리고 목적이 있어 낭자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잊어버릴 만큼.”
“…….”
“내게는 따뜻하고 소중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랬을까.
헌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소진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마음 약해지지 마, 한소진. 그래도 날 속인 사람이야. 나를 떠보려고, 날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헌은 그런 소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이, 그리고 머릿속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
“아씨! 아씨……! 내 말 듣고 있어요?”
숙자가 곁에서 쫑알쫑알거렸지만 소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잔뜩 골이 난 채, 얼굴을 구기고서는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투전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 화가 나셨대……? 아니, 넋이 나간 건가.”
숙자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씨…….”
숙자가 슬쩍 소진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제야 그녀가 얼이 나간 얼굴로 숙자를 돌아보았다.
“어? 뭐라고?”
하지만 그렇게 묻는 소진의 미간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소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침소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고름을 풀었는데.
“아, 아버지께서 봉희에 대해 물으셨다며?”
낮에 보은군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옷을 벗다 말고 숙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숙자가 그녀의 옷을 대신 벗겨주며 침소복을 서랍에서 꺼냈다.
“예.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간담이 서늘하던지. 그래도 어찌어찌 보은군 대감께서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씨랑 저랑 대감마님 손에 꽥, 처치될 뻔했어요.”
“……그러게.”
“그동안 그럼 어디를 다닌 거냐, 왜 거짓말을 한 거냐……. 아휴……!”
“보은군에게 봉희 이야기를 할 정도면…… 무언가 조금 눈치를 채셨을 수도 있어.”
소진의 말에 숙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의 침소복 옷고름을 곱게 매듭지었다.
그러다 여전히 안색이 어두워 보이는 소진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한데 아씨. 무슨 일 있었죠?”
“……일은 무슨.”
“아까 투전판에 다녀오신 이후로 내내 이러시잖아요. 물어도 대답도 않으시고 말을 걸어도 듣지도 않으시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진은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헌이 숲속에서 제게 했던 말들과 지금껏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 치열하게 머릿속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며 이해가 되기도 했다가 그래도 괘씸한 것은 어쩔 수 없다며 그를 향한 서운함과 원망이 치솟았다.
마음속에서 두 생각이 부딪히고 싸울수록 소진의 기분은 가라앉고 있었다.
“하…….”
소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서안 앞에 앉았다.
그러곤 재간택 예상 과제들이 적힌 서책을 펼쳐 들었다.
잡생각을 떨치기에는 서책이 최고였으니, 밤새 이 예상 과제들을 달달 외울 예정이었다.
“그래. 한소진.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이야.”
“……예?”
“재간택에서 떨어져야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그딴 형편없는 사람의 부인이 될 순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진이 글자를 읽어 내려갔고 숙자가 의아하다는 듯, 소진을 바라보았다.
“싸웠……습니까?”
조심스럽게 소진을 향해 물었다.
그 말에 소진의 손이 별안간 멈췄다.
“싸운 것은…… 아니다.”
“…….”
“일방적으로 내가 당했으니까.”
“예? 하면 저하께서 아씨께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한 건 아니고.”
그 순간, 진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헌의 얼굴이 떠올랐다.
-후회했습니다.
어쩐지 조금 잠겨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도 연신 귓가에 번졌다.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앞으로 뭘 어찌해야 하는지.”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다시 서책에 집중하려던 그때, 숙자가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아씨, 재간택 날짜가 나왔다고.”
“……어?”
“아까 대감마님께서 아씨께 일러 주라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언제인데……?”
소진의 동공이 자잘하게 떨렸다.
***
“저하, 소인이옵니다.”
동궁에도 밤이 찾아오고 침소의대로 갈아입은 헌은 보은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라.”
동궁 문이 열리고 보은군과 윤현이 나란히 들어섰다.
두 사람은 헌에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그래. 어찌 수습하였느냐.”
“시신들은 모두 식솔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생포한 인원들은 우선 따로 가둬는 두었지만 모두 같은 반응입니다.”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는가.”
“예. 정말 모르는 이들도 있고 입을 다무는 이들도 있어 아무래도 간부들을 찾기에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헌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쌌다.
언제 어느 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일을 감행한 것이었다.
조금 더 지켜본 후 치밀하게 계획을 짜 덮쳤어야 했나, 헌은 좌절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보은군은 그런 헌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하나…… 행수라는 자의 거처지만 알아내면 일은 일사천리로 될 것이니.”
“…….”
“소진 낭자와 저하께서 그 행수의 얼굴을 기억해내 한양을 뒤지면 나올 것도 같습니다.”
순간, 행수라는 사내의 얼굴을 헌이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그는 사색에 잠기고 말았다.
‘내가…… 그날 밤 그자를 쫓았다고? 대체…… 무슨 연유로. 생판 처음 보는 이였는데.’
그날 밤의 기억만 사라진 것이라고 했다.
누가 그 순간의 기억만 도려낸 듯, 그 부분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났는데 어째서 그 사내의 정체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일까.
정말 소진의 말대로 자신이 모르는 이의 뒤를 쫓았을 리는 없었다.
헌은 고심에 빠진 채 연신 거칠게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자 보은군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낸 것은.”
“말하라.”
“간부 중에 하인들이 안방마님이라 부르는 여인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행수라는 사내의 부인인 것 같습니다.”
“부인이라.”
“예. 여종들이 달아나면서 안방마님께 이 사실을 고해야 한다고 했는데…….”
“…….”
“그랬는데 이상하게 다들 행수와 그 부인이 사는 거처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행수라는 사내의 차림새를 본다면 보통 부잣집은 아닐 것이었다.
한양에서 권세를 좀 누린다는 집들을 샅샅이 뒤지면 분명, 그 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헌은 서둘러 종이를 꺼내 낮에 마주쳤던 행수의 얼굴을 그려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선명할 때, 용모화를 그려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헌의 기억을 찾는 데도 중요하게 쓰일 것이었다.
“참, 김 도령이라고 불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물끄러미 붓을 쥔 헌을 바라보던 윤현이 말했다.
“김 도령이라…….”
“하지만 정확하게 김 가(家)의 사람인지는 모르지요. 그저 그리 부르는 호칭에 불과할 수 있으니.”
“…….”
“저는 우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김 도령이라 불리는 사내의 거처지가 어디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겠군.”
헌은 씁쓸하게 실소를 터뜨리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곤 윤현을 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타버린 집에서는 쓸만한 증좌가 나오지는 않았고?”
“예. 애초에 증좌 따위는 그곳에 놔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치밀하군. 알겠다. 보은군 너는 나가보아라.”
“예, 저하.”
보은군이 인사를 올린 후, 동궁을 나섰고 헌은 한숨을 내쉬며 붓을 멈추었다.
헌이 갑자기 그림을 그리다 말자, 윤현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지요, 저하.”
“…….”
“차라도 올리라 명을 내릴까요.”
“아니. 되었다.”
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붓질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슥슥, 종이를 가로지르는 붓 소리만이 동궁을 울렸다.
그 어느 때보다 그림을 그리는 헌의 손길이 거칠기만 했다.
“저하…….”
그의 어지러운 심중을 파악한 듯 윤현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그러자 강직하게 닫혀 있던 헌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 사내를 내가 미행했다고 한다.”
“……예?”
“그날 밤. 일 년 전. 내가 기억을 잃던 날.”
“……!”
“내가 미행한 것은 이 사내라고 한다.”
“그것이 무슨.”
“……한 규수가 말해주더구나.”
“예?”
윤현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헌이 그려 낸 행수라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윤현 역시, 초면인 낯선 얼굴이었다.
“이 자를 어찌 저하께서……. 왕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저하와 연이 닿은 사내도 아닌데?”
“하니…… 더욱 그날 밤의 일이 미궁 속으로 빠질 수밖에.”
“……한데 저하. 한 규수께서 저하께 말을 한 것이라면.”
그렇게 되묻는 윤현의 뺨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무래도 헌이 내내 그늘진 얼굴로 한숨만 내쉬던 연유를 알 것 같았다.
“들키고 말았구나.”
“……아.”
“내 입으로 토설치 못하고…… 들키고 말았어.”
“저하.”
“한데 말이지. 참 이상하게도…….”
“…….”
“아니라는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헌은 그렇게 말하며 쥐고 있던 붓을 놓았다.
그의 손끝이 자잘하게 떨렸다.
다시 낮에 소진을 마주했던 때로 돌아간 듯, 그의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낭자께서 잘못 본 거라고.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음이나 터뜨리며 쉬이 넘길 수 있는 일인데.”
“…….”
“그러지 못했다.”
“저하.”
“아니…… 그러기 싫었다.”
괴로운 듯 눈을 지그시 감는 헌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며 나를 원망하던 한 규수의 눈빛을 보는 순간.”
“…….”
“나는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저하.”
헌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제 곤룡포 밑에 가지런히 놓아둔 소진의 용모화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돌아보는 헌의 눈동자에 비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다.
“내내 한 규수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연유를.”
“…….”
“한 규수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그 여인을 만나러 갈 때마다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던 연유를.”
“…….”
“목적이 있어 그 여인을 유혹하려던 내가 어느 순간, 그 여인에게 되레 홀린 것만 같이 느껴졌던 연유를 알아 버린 것이야.”
“저하. 어째서…….”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듯한 그 얼굴이 내 폐부를 찌르더구나.”
“…….”
“그 순간에 난, 참으로 바보같이 엉뚱한 바람을 품었다.”
“……!”
“아, 이 여인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게 등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바람.”
갑작스러운 헌의 고백에 윤현이 당황스럽다는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래서 변명도 아니라는 거짓도 하지 못한 채, 천치처럼…… 입술만 꾹 닫고 있었다.”
“그날의 일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여인인데……. 아무래도 저하께서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해 다시는 저하를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
“아니 행여 한 규수가 영의정에게 저하의 기억 소실증을 발설하기라도 한다면……!”
윤현은 자신이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오히려 헌은 덤덤한 표정으로 용모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함부로 그 여인을 가슴에 새긴…… 나의 책임이겠지.”
“저하……!”
“얼음장 같던 여인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 동안 결국, 내 무덤을 파고 있었구나.”
“당장이라도 내일 한 규수를 찾아가서.”
“아니. 아니다.”
“저하.”
“이제는 그 여인의 마음을 강요하고 싶지 않구나.”
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달빛에 눅눅히 스며든 입술을 뗐다.
“거짓된 마음이 진심이 되고 보니 그러고 싶지 않다.”
윤현은 그런 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하오나 저하…….”
“…….”
“재간택은 그럼.”
“그 여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야지.”
“이 와중에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
“재간택 날짜가 정해졌다, 하옵니다.”
그의 말에 창밖을 응시하던 헌이 윤현을 돌아보았다.
“언제인가.”
“삼일 뒤.”
“…….”
“이번에는 중전마마와 대비마마 모두, 참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중전이라는 말에 헌의 눈이 형형해졌다.
“중전이…… 참석한다고?”
그 말은…….
교태전에 주인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