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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기억 소실증 (40/125)

40. 기억 소실증

2021.02.15.

소진은 굳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 헌이 내려다보며 살며시 그녀의 팔을 쥐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

“혹 아까 물에 젖었던 것 때문에 고뿔이라도…….”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헌의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자신의 팔을 다정하게 그러쥐는 그의 손도 어쩐지 피하게 됐다.

“낭자.”

조심스럽게, 하지만 경계의 얼굴로 자신을 외면하는 소진을 헌이 바라보았다.

“참으로 모르십니까?”

묻고 넘어가기엔 소진에게는 너무 큰 일이라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소진은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되물었다.

왜 그 사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그날 소진이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언뜻 스치듯 본 것이라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잊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못 알아보는 것이야.’

가까운 거리에서 무슨 색의 옷을 입었는지도 알 정도로 봤는데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사내를 못 알아보는 것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생각이 스치자, 소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모른다…… 하지 않았습니까.”

소진의 물음에 헌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어찌 그러는 거지……. 꼭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되묻고 있다.’

헌은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금 행수라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이가 맞는데 어찌 이리 되묻고 있는 것일까, 헌도 입술을 굳게 말아 물었다.

“제게 거짓을 고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찌 거짓이라 하십니까, 낭자.”

“하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요?”

“내가 여기까지 낭자와 함께 와놓고 이제 와 숨길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헌의 얼굴은 결백했다.

소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그를 처음 마주했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기방 온천장에서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쥐새끼라고 소리치던 헌.

그 순간 소진의 머리에 번쩍, 하고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너무 갑자기 습격을 당한 것이라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일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저하께서는 분명 저 사내와 저 사내의 부인인 듯한 여인의 뒤를 미행하다, 습격당했어.’

저 사내가 머리를 직접 내려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분명 사내 부부를 호위하는 자객들이 헌을 공격한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소진은 다시 행수라는 사내를 응시하며 그날의 기억을 헤집었다.

헌이 피를 흘리고 쓰러짐과 동시에 소진이 발견했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땐, 저 사내 부부가 앞서 도망치고 그 뒤를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이 급히 뒤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 년 뒤, 기방에서 그는 자신의 손수건을 보자마자 배후가 누구냐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기억을 헤집어 보던 소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건 애초에 배후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소리인데……?’

배후를 묻는 것은 자신이 처음부터 누구를 미행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땐 이상하다고 생각 못 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참 이상한 소리였다.

소진은 가만히 숙였던 고개를 들어 헌을 올려다보았다.

헌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채였다.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급히 미행했을 리도 없고.”

“……?”

“그럼 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짜고짜 고심에 빠졌던 소진이 그렇게 말을 내뱉자 헌은 당황하고 말았다.

“낭자, 그것이 무슨.”

“그날 밤, 일 년 전.”

“……!”

“저하께서는 누군가를 급히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라면.”

“그런데 어찌 방금 그 행수라는 자를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

“그날 밤, 저하께서 쫓고 있던 이가 바로 저…… 행수라는 사내였습니다.”

소진의 말에 헌의 머리가 크게 울리고 말았다.

“아.”

그의 슬쩍 벌어진 잇새에서 탄식이 뱉어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소진의 눈빛에 원망과 실망감이 뒤섞였다.

“낭자, 그것은…….”

“그리고 일 년 후, 기방에서 저를 처음 만난 저하는 제 멱살을 쥐고서 배후를 토설하라 하셨지요.”

“…….”

“배후를 모른다는 것은 저하께서 미행했던 이도 모른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가 모두 알아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설명하기도 전에, 진실을 고백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들키고 만 것이었다.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행수라는 사내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헌.

그리고 그가 제게 세자빈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던 말들.

자신에게 첫눈에 반해 자신의 마음을 사려던 난봉꾼의 유혹이 아니라.

기억 소실증에 걸린 것을 숨기기 위한, 혹은 자신을 이용해 그날의 기억을 되찾으려 한 왕세자의 치밀한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모두 다……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헌의 말에 소진은 그만 실소를 뱉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이라는 듯, 헌이 얼굴을 구기며 소진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손을 뿌리쳤다.

“낭자의 말대로 난 기억 소실증에 걸렸습니다.”

“……하.”

“지금까지 말 못 했던 것은…… 사정이 있어…….”

소진은 그런 헌의 말허리를 싸늘하게 잘랐다.

“혹 아직도 내가…… 은인이 아닌 그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날 지켜보았던 것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헌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내게 기억 소실증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습니까? 내가 영의정의 여식이니까. 행여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아버지께 말한다면 자신과는 반대 세력에게 흠 하나를 잡히는 꼴이 되는 것이니까.”

“…….”

“아, 그게 아니라 나를 이용해 그날의 기억을 되찾으려 하신 것입니까? 아예 세자빈으로 앉혀 그날의 일은 발설치도 못하게 해놓고?”

이해가 되면서도 섭섭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함께 했으면서 왜 단 한 번도 내색지 않았던 것일까.

소진은 이제 어느 정도 헌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제 마음을 두드리는 헌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헌은 그 순간에도 진심이 아닌, 다른 흑심을 품고 자신에게 다가왔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갑갑해져 왔다.

“…….”

그런데 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혹은 아니라는 말도 없이 그저 씁쓸함이 가득한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랬군요.”

“…….”

“그럼 아까 저하께서 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던 것도.”

“…….”

“미완성이던 용모화를 준 것도, 활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것도. 여기까지…… 호위대를 이끌고 온 것도, 모두.”

“…….”

“계획된 것이지요. 그리 많은 우연과 함께 보낸 시간이 모두…… 저하의 손에 만들어진 것이란 거지요?”

섭섭한 마음은 이내 그를 향한 분노로 뒤바뀌고 있었다.

믿었던 이에게 크게 뒤통수를 맞은 것도 같았다.

원망스러웠고, 쉽게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연 자신이 밉기도 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다시금 헌을 올려다보았다.

“좋아졌다고 했던 것도.”

“…….”

“그것도 거짓입니까?”

그렇게 되묻는 소진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만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던 헌이 소진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아니.”

“……!”

“그건 인정 못 해.”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이 굳어버렸다.

“다른 건 다, 인정하겠습니다. 애초에 낭자에게 용모화를 주었던 것도 활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도.”

“…….”

“여기까지 오려고 한 것도 모두.”

“…….”

“낭자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헌은 그 말을 이어가면서도 소진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지금까지보다 더 절절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졌다는 말, 내게 낭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

“진심입니다.”

그 말에 소진이 입술을 꾹 깨물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헌을 노려보았다.

“뻔뻔해.”

“…….”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저하.”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홱 돌아섰는데 헌이 그녀의 앞을 속히 가로막았다.

“후회했습니다.”

“…….”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체 내가 무엇을 후회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 소진이 물끄러미 헌의 눈빛을 응시했다.

“낭자에게 처음부터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건지.”

“…….”

“아니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헌이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물끄러미 소진을 바라보다,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때, 활인서에서 소진에게 용모화를 가르쳐주며 헌이 그렸던 소진의 얼굴이었다.

소진은 헌이 이걸 왜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다시금 올려다보았다.

“이 용모화를 그린 순간을 후회하는 건지.”

“그게…… 무슨.”

“이것을 그리던 순간…… 깨달았으니까.”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한 소진이라는 여인이 내 속에 깊이 박혀 있구나.”

헌의 말에 소진의 눈빛은 떨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말조차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는 도리질했다.

“한 번이면 족합니다. 이 용모화로 내 환심을 사보려 하는 것은 한 번이면…….”

“내 처음은 그때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

“그때는 정말 낭자의 환심을 사려 그린 것이었지만 이건…… 아니니까.”

“저하.”

“여기에는 낭자를 향한 내 마음이 처음 담긴 그림이니까.”

그 말을 하며 헌은 그 용모화를 소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작은 손 위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감쌌다.

“버리든…… 찢든, 태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

“내 진심은 이제 낭자 손에 달린 것입니다.”

“저하.”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해해달라는 말 하지 않을 테니.”

“…….”

“애써 이해하려 낭자도 낭자의 마음을 괴롭히지는 마십시오. 하지만 낭자가 앞으로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낭자의 벗과 관련된 일은 제 선에서 최선을 다해 갈무리하겠습니다.”

“…….”

“이건 이제 나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헌이 앞서 걸었다.

소진은 그런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한참 바라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헌이 앞서 걷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미워 죽겠지만 우선 집에는 가야 하니.”

“…….”

“멀리 떨어져 걷겠습니다, 뒤따라만 오시지요. 낭자를 혼자 두고 가기에는 숲이 너무 험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헌은 다시금 걸음을 뗐고 소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녀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감이 어색한 두 사람을 감쌌다.

사그락, 사그락 낙엽 밟히는 소리만 숲속을 울렸다.

소진은 헌이 쥐여준 용모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녀는 입술을 질끈 말아 물었다.

말없이 한참 걷기만 하던 둘은 이윽고 저잣거리 근처에 다다랐고 헌은 걸음을 멈춰 서서는 소진을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는 것이 편하겠지요.”

“……예.”

소진은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헌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그리고 재간택은.”

“…….”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둘의 운에 맡겨보도록 하지요.”

그 말을 남긴 채 헌이 씁쓸하게 뒤돌아서자, 소진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헌이 물끄러미 소진을 내려다보았고 소진은 여전히 땅바닥만 응시한 채, 그에게 용모화를 다시 건넸다.

“어찌 저하의 진심을 제게 주고 가십니까.”

“…….”

“저하의 마음이니 저하가 알아서 하세요. 나와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휙 돌아섰는데.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았는지, 그녀가 다시 슬쩍 몸을 돌렸다.

“어찌 된 건지. 정말 왜 내게 처음부터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

“…….”

“아니, 않았던 것인지는…… 아직 저하께 듣지 못했습니다.”

“…….”

“그러니 혹, 다음에 제가 오늘의 일을 묻거든 그때는 숨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상히 제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물론 저하를 이해하겠다는 것도 저하의 진심을 헤아려 보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서 소진이 슬쩍 헌을 올려다보았는데 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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