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왜, 기억을 못 하십니까?
2021.02.12.
“암, 암행어사?!”
헌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헌의 호위대와 맞서고 있던 투전판을 지키는 무사들은 암행어사라는 말에 반으로 나뉘었다.
반은 이곳에 남아 헌의 호위대와 맞섰고 반은 어딘가로 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엇 하느냐! 쥐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모두 생포하라!”
헌은 거칠게 그 말을 뱉어내며 소리쳤다.
호위대는 가차 없이 투전판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그들 역시 격한 반항으로 호위대를 공격했다.
두 무리는 순식간에 한데 섞여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헌이 잽싸게 목욕탕 안에 있던 소진을 돌아보았다.
소진을 씻겨 주던 여종 둘은 금세 몸을 숨긴 뒤였다.
“괜찮습니까!”
“괜, 괜찮은데…… 옷, 옷을…….”
소진이 더듬더듬 손가락만 겨우 드러내 옷가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곳에서 갈아입을 수는 없는 법.
이미 목욕탕 바로 앞에서부터는 무사들 간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소진은 난감하다는 듯, 목욕탕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눈만 깜빡였다.
헌 역시, 곤란하다는 얼굴로 주위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그렇고.”
“……?!”
“그…… 내 옷으로 대충 가리셨습니까?”
“가리긴 가렸는데.”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낭자.”
헌은 그렇게 말하며 목욕탕에 숨어 있던 소진을 번쩍 안아 올렸다.
“어머……!”
그러곤 그녀의 살이 보이지 않게 자신의 몸으로 감싸며 그녀의 옷가지들을 주웠다.
소진이 조금 빨개진 얼굴로 헌을 올려다보았는데, 그는 소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소진은 가만히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와 함께 목욕탕을 빠져나와 흙바람을 일으키며 싸움을 하는 무사들을 지나쳤다.
도망가기에 급급한 사람들과 그들 모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헌의 호위대.
그때, 헌은 숲속 바위 위에 소진을 가만히 내려다 주었다.
그러곤 등을 돌리며 그녀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말없이 그에게 옷을 받아든 소진은 불안한 듯 연신 주변을 살폈다.
곧 헌은 자신이 입고 있던 다른 옷마저 벗어 그녀의 앞을 가려주었다.
“저하…….”
“속히 갈아입으시지요. 내가 이리 가리고 있을 테니,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고개를 돌리며 헌이 그렇게 말했고 소진은 서둘러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고름을 꼭 여미고 나서야 소진은 조심스럽게 헌의 팔을 잡았다.
“다,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소진이 있던 기와집 안에서는 비명과 괴성이 오갔다.
그때, 풀숲에서 누군가가 소진과 헌을 향해 황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앗……!”
헌은 한껏 경계하며 소진을 자신의 뒤로 감추었는데 돌아보니 보은군이었다.
“보은군…… 네가 여길 어찌……!”
“대감!”
보은군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미 아수라장이 된 집 안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이끌고 온 호위대를 속히 안으로 투입 시켰다.
“뭣들 하느냐! 모조리 추포하라!”
그렇게 명을 내리고서야 보은군은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저하. 소인, 피치 못한 사정으로 저하를 미행하였나이다.”
“오늘 대신들과 사냥을 간다 하지 않았던가. 한데 네가 여기에 어찌.”
“낭자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보은군은 소진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헌은 감싸 쥔 소진의 팔을 스르륵 놓았다.
“내가 있는데 걱정은 무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헌이 보은군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보은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기와를 돌아보았다.
“한데 저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이 산속에 이런…… 기와집이라.”
“여기에 말고도 또 있습니다, 대감.”
“또 있다니요?”
“저하, 여기에 말고 이런 곳이 또…….”
소진은 자신이 들은 것을 헌에게 전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는데 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 또 있지요. 아니 그래도 그쪽으로도 무사를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아…….”
“모조리 생포해 이 일의 배후를 반드시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어?! 어! 부, 불!”
갑작스러운 헌의 호위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투전판 사람들은 기와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 돼! 아니 된다!”
저 안에 모든 증좌들이 들어 있을 테였다.
소진과 헌, 그리고 보은군은 서둘러 안으로 달려갔다.
어마어마한 불길이 기와집을 우악스럽게 잡아먹고 있었다.
물을 끼얹어 불을 꺼볼 새도 없이 기와는 활활 타들어 갔다.
소진은 치맛자락만 움켜쥔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저, 저쪽에도 불길이 보입니다!”
“하……. 어째 이런 일이……!”
반대편에서도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니 또 다른 곳도 이미 불을 질러 증좌를 모두 없애려는 것 같았다.
“사람…… 사람들!”
소진은 서둘러 아까 자신과 함께 있던 여인들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헌과 보은군도 속히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이보시오! 불이오, 불……!”
소진이 여인들과 함께 머물렀던 방에도 이미 화마가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 소진은 털썩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불길이 잡아먹은 방 안에는 이미 그 여인들이 모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소진은 입을 틀어막은 채 도리질을 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낭자.”
헌이 서둘러 바닥에 주저앉은 소진을 안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에 뿌연 눈물이 차올랐다.
“어찌 사람이……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소진은 그렇게 울부짖으며 얼굴을 감싸고야 말았다.
좀 전까지 함께 있던 여인들이었다.
같은 방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불과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죽고 만 것이었으니.
소진은 허탈함과 분노감에 할 말을 잃고 눈물만 뚝, 뚝 흘렸다.
헌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아 그녀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가려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슬픔으로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따스하게 다독였다.
“그들은 이미 사람이길 포기한 자들입니다.”
“……흐읍.”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그들 눈에는 물건일 뿐일 테니까요.”
보은군도 참담한 마음으로 헌의 품에 안긴 소진을 바라보았다.
소진은 헌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윤현이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와 밖의 상황을 전했다.
“투전판 안의 모든 이들을 생포했지만, 행수라는 자는 없었습니다.”
“없다……?”
“예. 주요 간부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것 같았습니다. 또한, 저희가 잡은 이들은 그저 오늘 하루 삯을 받고 투전판을 지켰던 이들이라 합니다. 행수와 주요 인물들의 행적도 거처지도 이름도 모릅니다.”
“하아…….”
윤현의 말에 헌이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뺨을 쓸었다.
그러자 소진이 서둘러 윤현의 앞에 서며 입을 열었다.
“행수는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함께 이곳으로 왔어요!”
그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소진에게 닿았다.
“이곳을 뒤져보면…….”
하지만 이내 윤현은 소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없습니다.”
“……예?”
“이곳도 모두 뒤져 보았으나 이곳을 관리하는 여종 몇 명과 무사들뿐.”
“…….”
“간부들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진과 헌, 그리고 보은군은 절망하고 말았다.
이럴 줄 알고 아마 서둘러 자리를 피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사들에게 혹, 이런 일이 생기거든 집부터 태우라고 미리 지시도 내린 것 같았다.
허탈함에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활활 타는 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듯 소진이 헌의 옷깃을 쥐었다.
“제가 행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낭자께서 보았다고요?”
“예……. 한데 저하.”
소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헌은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우선 불길을 최대한 잡아 증좌가 될 만한 것은 드러내고 생포한 인원들은 모두 비밀 집결지에 가둬놓고 배후를 추궁하도록 하라.”
“예, 저하.”
“이것은 너와 한 규수, 그리고 보은군.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헌은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을 돌아보았다.
“나는 한 규수와 할 말이 남았으니 너도 속히 환궁하도록 하라. 그리고 네 무사에게도 오늘의 일은 발설치 말라, 명을 내리고.”
“저하께서는 바로 환궁하시지 않으실 것입니까.”
“나는 낭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도록 할 것이다.”
그 말에 보은군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헌의 곁에서 여전히 멍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진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낭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소진을 불렀다.
곧,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예, 대감.”
힘이 빠진 듯, 소진이 힘겹게 대답하며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헌은 그런 두 사람을 곁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낭자의 여종에게도 일러는 두었지만, 낭자에게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무엇을 말입니까?”
“영의정 대감께서 뭔가를 눈치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봉희 댁에 관련해 제게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봉희를요……?”
자신에게도 봉희의 이야기를 꺼내더니 보은군에게까지 그랬다고 하니 소진의 가슴이 철렁했다.
“해서 봉희 댁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혹시나 영의정 대감께서 그 집을 감시하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비책을 세우라 했습니다.”
“하……. 봉희가 없다는 것을 알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텐데. 지금까지 속이고 대체 어딜 다녔던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인데.”
난감하다는 듯 소진이 입술을 구기자 보은군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 순간에도 헌의 시선은 소진의 어깨에 닿은 보은군의 손 위에 머물렀다.
“봉희댁 남편이 제 누이를 봉희댁으로 변장시켜 당분간 집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면 저하와 함께 조심히 내려가십시오. 난 이곳 상황을 함께 정리하고 돌아가도록 할 테니.”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이 소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소진도 그를 따라 인사를 했다.
“부탁하네.”
헌도 짧게 인사를 건네며 소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나무 타는 냄새가 숲속을 진동하고 있었다.
***
“할 말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숲길을 내려갔다.
그러다 헌은 넌지시 소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진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행수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에도 이상하게 소진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유 모를 긴장감도 그녀를 잠식해 나갔다.
“아, 행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하였지요.”
“혹 저하께서는 행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까?”
소진이 그리 물으며 헌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지난날, 저잣거리에서 부딪혔을 때는 분명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때는 언뜻 스치듯 본 것이라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면 오늘은.
분명 가까이에서 보았을 테니,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아, 보았습니다. 보긴 보았는데.”
“언제……요?”
순간 헌의 대답에 소진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리고 소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헌의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됐다.
“아까 낮에 투전판에서. 낭자가 그렇게 끌려가고 한 시진인가 후에 다시 투전판에 모습을 드러냈었습니다. 그러고 다시 사라지기에 저 기와집으로 간 줄 알았는데.”
“정확하게 보시었습니까……?”
“예. 뭐, 얼굴은 나름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던데. 행수라면 분명 그 투전판의 주인일 테고 그럼 낭자의 벗을 궐로 보낸 장본인이자 그 세력의 배후일 텐데.”
“…….”
“그런 것치고는 많이 어려 보였습니다. 혹 낭자가 본 그 행수라는 사내도 어렸습니까? 내가 본 자와 낭자가 본 자가 같은 인물일는지요.”
모르는 눈치다, 이건.
아니면 알고도 굳이,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소진은 분주히 그의 표정을 살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어렸습니다. 청색 도포를 입고 있었고요…….”
그 말에 헌이 자신이 본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듯,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청색 도포.”
“……아.”
“한데 어찌 그러십니까. 혹, 아는 사내입니까?”
그 순간, 소진은 벌렸던 입술을 꾹 다물며 심각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니라 저하께서…… 아셔야 하는 인물이 아닙니까?’
차마 그녀는 그 말을 뱉어내지 못한 채, 헌의 얼굴만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뇨.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혹 저하께서 아는 얼굴일까, 싶어.”
그러자 그녀의 말에 헌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궐에서만 나고 자란 내게 바깥 동무가 있을 리도 없고.”
소진의 시선이 헌의 얼굴 위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그 사내가 맞는데……. 저하가 미행하고 있던 사내가 확실한데 어찌, 왜. 기억을 못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