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암행어사 출두다. (38/125)

38. 암행어사 출두다.

2021.02.08.

“아, 어디로 가는 것이냐니까요!”

소진은 발버둥을 치며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여종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여인 둘을 감당하기는 힘든 법, 결국 힘없이 그들 손에 끌려가고 말았다.

“말이나 해주시오, 거참! 야박하네!”

소진이 시간을 벌어보려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여종 하나가, 성가시다는 듯 소진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씻으러 가는 것이다, 씻으러!”

그 말에 소진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당장 어딘가로 끌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니…….

소진은 그들에게 끌려가며 좀 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여인들이 있는 방을 돌아보았다.

그 누구도 문을 열 수도, 또한 도망칠 수 없게 자물쇠로 굳게 잠긴 문.

‘내 반드시 그대들을 구해주리다.’

소진이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여종들에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목욕탕 앞에 멈춰 섰다.

***

“자, 더 하시겠소?”

소진을 담보로 잡은 돈마저 모두 잃게 된 헌.

장정은 그에게서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부러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장정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내 마누라는!”

“이거 놓으시지?”

“내 마누라는 어디에 있소……!”

헌이 장정을 잡고 늘어지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투전판 안에 있든 장정들이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못 이기는 척, 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한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마누라 내놓으라고……!”

그러자 쯧쯧 혀를 차던 장정 하나가 헌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해야지.”

“……!”

“이미 네 마누라는 저 멀리, 팔려 가고 여기에 없다.”

그 말을 피식거리며 뱉어낸 장정이 고갯짓을 해 보이자 헌을 투전판 밖으로 끌어냈다.

“놓아라, 놓아라…… 이것들아……!”

헌은 무사들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끌려 나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결국, 헌이 투전판 밖으로 끌려 나와 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졌고.

“썩 꺼지거라!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장정들은 헌을 그렇게 내버려 두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흙이 묻은 옷을 털어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그들이 남긴 말을 곱씹으며 헌이 비식, 조소를 터뜨렸다.

해가 저물려 하자 투전판 밖을 지키던 사내들도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헌은 무사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팔을 들고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래. 오늘 누구의 목숨이 떨어져 나갈지 한번 지켜보자고.”

그 말을 남긴 채 헌은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헌에게 칼과 무사복을 건넸다.

“너희는 지금 이곳을 당장 소탕하라. 나는 곧장 한 규수에게 갈 것이니.”

“예, 저하……!”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은군이 헌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삐거덕, 문이 열리고 뜨거운 물이 담긴 커다란 목욕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목욕하고 나오라는 말 같았다.

여종들은 문을 굳게 닫고서는 강제로 소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어, 어……? 내가, 내가 하겠소!”

“우리가 씻겨 줘야 한다.”

“옷은 내가 벗겠소! 잠시만.”

소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분주히 문틈 사이를 살폈다.

‘곧 해가 질 것 같던데……. 왜 이리 저하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이지? 이 와중에 투전에 재미를 붙여 눌러앉아 있는 것은 아닐 테고.’

그녀는 뭉그적거리며 목욕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옷고름만 움켜쥐고 있었다.

여종들은 그 모습을 뒤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단 목욕까지는 해……?’

혼자 고민하며 옷고름을 느리게 풀던 소진의 등 뒤로 여종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뭐 하는 건가! 얼른 벗지 못하느냐!”

“지금 벗소이다! 벗어!”

거참, 성질 한번 급하네.

소진도 덩달아 언성을 높이며 그들을 힐끔거렸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적미적 옷고름을 풀었다.

이내 그녀가 조심스럽게 저고리를 벗자 희고 고운 살결이 드러났다.

같은 여인이 보아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매끄러운 피부였다.

꼭 달빛이 그 위로 부서지듯, 그녀의 맨살에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치마도 미끄러지듯 발아래로 떨어졌다.

“후.”

맨살에 닿는 공기가 너무도 차가워, 몸이 절로 떨렸지만 소진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저하께서는 어디에 계신 것이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문틈 사이를 서둘러 살피다, 두 팔로 가슴을 감싸고는 목욕통 안으로 몸을 담갔다.

미지근한 물이 그녀의 맨다리에 닿았다.

“……씻으면 되오?”

그녀가 쭈뼛쭈뼛 여종들을 돌아보며 물었고 이내 두 사람은 손수 그녀의 몸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목욕만 전문적으로 맡는 듯, 어쩐지 그 손길이 능숙하기만 했다.

소진은 슬쩍 둘의 눈치를 살피다,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 오는 여인들의 수가…… 꽤 되는 것 같은데 이리 손수 씻겨 주시오?”

“…….”

“일이…… 참, 많겠소.”

혼잣말처럼 그 말을 중얼거리자 소진의 어깨에 물을 끼얹던 여종 하나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뭐 잘난 것들이라고 일일이 씻겨.”

“……?”

“값이 나가는 것들만 씻기지.”

“아……. 값이…….”

소진은 여종의 짜증 섞인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다시금 여종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소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씻기기에만 열중했다.

“한데 아까…… 함께 온 여인들은 어디로 갔소?”

“…….”

“내 잠깐이지만 친해진 벗이 있는데. 생사라도…….”

소진이 여종들의 대꾸 없이도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자, 그녀를 씻기던 손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공기에 소진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거참, 말 되게 많네.”

“…….”

“조용히 입 다물고 있거라. 성가시게 굴지 말고.”

하지만 그대로 굴할 소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무는 시늉만 하다, 다시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뻐서 이쪽으로 왔다고 하던데……. 하면 저쪽은 못생긴 이들만 가는 것인가.”

눈치 없는 새댁인 척, 굴었다.

그러자 소진의 팔을 닦던 여종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팔을 놓았다.

“자꾸 시끄럽게 굴면 재갈을 물릴 것이다. 알겠느냐……?!”

더는 입을 벙끗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진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목욕탕 이곳저곳을 살폈다.

언제부터 산속에 이런 곳이 지어졌던 것일까.

여기서 밥도 해 먹이고 씻기도 하고 잠도 자고…….

이곳에서 여인들을 며칠씩 데리고 있다가 마땅한 자리가 나면 팔아넘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묵묵히 그들의 손길을 받아들며 뭐,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목욕탕 안을 분주히 돌아보았다.

“이년은 따로 빼놓아라 하였다.”

“안방마님께 바로 보일 것이라서?”

“그렇다네.”

안방마님……?

순간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행수라는 사내와 장정들의 대화에서도 이곳에 관해 막강한 힘을 쥐고 있는 것만 같았던 여인.

소진이 입술을 앙다물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모레 다 같이 묶어서 보여 드리기로 한 것 아닌가?”

“그랬는데 행수 어르신의 명이니 어쩌겠나.”

어마어마한 권세를 지닌 여인이 이런 누추한 산속에 있을 수는 없을 테고.

자신을 바로 안방마님께 보인다고 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값이 제일 나가는 것 같아 서둘러 팔아치워 버릴 심산인 것 같았다.

안방마님이란 그 부인의 명에 따라 여인들의 거처지가 정해지는 것인가.

아무래도 헌을 만나 이곳 우두머리들이 그때 그날 밤의 사내와 여인이었다고 말해주면 단번에 그들의 거처지를 알아낼 수 있을 테였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소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일 새벽에, 아니면 지금 곧바로?”

“해가 지면 움직일 것 같다.”

한데 이 와중에 대체 봉희는 왜, 궐에 있다는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봉희가 궐에 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과 다른 쪽으로 보내진 이들은 몸을 쓰는 자들이라니…….

혹, 그들이 궁녀로 선발이 되어 가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궁녀는 자발적으로 궁인이 되겠다는 여인들을 선발하면 될 일.

굳이 궐 사람들이 이리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곳에서 여인들을 뽑을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한참 소진을 목욕시켰고 소진은 깊은 생각에 잠겨 그들 손에 씻겨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데…… 너.”

두런두런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던 여종이 문득 말을 멈추고는 소진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오……?”

싸늘한 그 목소리에 소진이 조금 긴장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몸을 한참 씻기던 여종 하나가 의심쩍은 눈으로 소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양반인 것이냐?”

갑작스러운 그 말에 소진은 사색이 됐다.

“양반……이라니? 양반이 돈이 없어, 여기에 팔려 왔겠소? 나원 참, 누구 놀리오?”

이내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태연하게 말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도 미심쩍은 눈을 하곤 여종은 소진의 등허리를 살폈다.

“하면 어찌 살결이 이리 곱지…….”

값비싼 목욕제로 관리를 받은 것처럼 소진의 살결은 이곳 다른 여인들과 달리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인들의 몸을 씻기는 그들의 눈에 소진의 피부가 달라 보일 수밖에.

“타, 타고난 것이오!”

“아무리 새댁이라고 해도 꼭, 사내 손 한번 안 타본 것처럼…….”

“……?”

“몸도 너무 깨끗하고?”

“그런 것을 어찌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이오?! 참 웃기는 여편네들이네.”

소진은 서둘러 대답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황급히 목욕탕에서 나오려는데.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낀 여종 하나가, 소진의 손목을 턱 잡아챘다.

“잠깐.”

그러더니 그녀의 긴 머리를 돌돌 감싸고 있던 비녀를 확, 빼냈다.

“아……!”

그러자 소진의 길고 풍성한 머리가 등 뒤로 쏟아졌고.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향긋한 꽃 내음이 풍겼다.

향만 맡아도 그들은 이것이 얼마나 값이 비싼 목욕제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돈이 없어 마누라까지 팔아넘기는 사내와 함께 사는 여인에게서는 당연히, 맡을 수 없는 향이었으니까.

“너?!”

무언가 일이 잘 못 되었음을 직감하며 소진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여인을 거칠게 밀쳤는데.

“……!”

그때, 우당탕탕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목욕탕 문이 활짝 열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무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어머나!”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목욕탕 안으로 몸을 숨겼다.

헌의 무사들인지, 이곳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발가벗고 있는 채라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놀란 소진이 목욕탕 안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고.

그때, 누군가가 무사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곤란하다는 듯이 목욕탕 안을 살폈다.

“이런……, 하필 이런 때. 목욕이 끝나면 구할 것을…….”

그 역시 곤란하다는 듯이 그렇게 읊조렸는데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목욕탕 안에 웅크리고 있던 소진의 몸 위로, 얇은 천 하나가 감싸졌다.

“……!”

덕분에 소진은 맨살을 겨우 가릴 수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려는데.

“누구냐! 감히 누구기에 남의 사업장을……!”

우당탕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더니, 이번에는 이쪽 사람들이 나타난 듯 무사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는 소진을 단단히 막아선 채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그들 한 명, 한 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진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는데.

“나?”

그 뒷모습은 다름 아닌, 헌이었다……!

“암행어사다, 이 벌레 같은 자식들아!”

헌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이곳 안팎을 지키고 있던 헌의 무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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