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감히 누구를 탐내
2021.02.05.
“이리 깊은 산 속에서 투전판이 열린다고…….”
보은군은 더욱 말 고삐를 바투 잡아당겼다.
자신의 무사들과 함께 산속 더 깊숙이, 깊숙이로 향하는 보은군.
고삐를 쥔 그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서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고,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깜깜한 어둠이 숲속을 잠식할 것이었다.
“서두르자! 해가 지기 전에 닿아야 한다……!”
보은군의 목소리가 빈 숲속을 울렸다.
얼마를 더 달렸을까, 보은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급히 말을 멈춰 세웠다.
“조용.”
그는 자세를 낮추며 말에서 내렸다.
정면에 커다란 기와집 같은 것이 흐리게 보였다.
품에서 지도를 다시 꺼내, 들여다보니 그가 찾는 투전판이 맞았다.
“저기다…….”
보은군은 무사의 검을 빌려 손에 들고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소진 낭자가 있는지 살피고 와야겠구나.”
그때, 투전판을 향해 느리게 다가가고 있던 보은군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저하?”
세자, 헌이 그 기와집 안에서 휘적휘적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보은군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헌을 발견하니,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구나 싶었다.
이제는…… 소진만 찾으면 되었다.
***
“잠시 측간을 다녀오겠소.”
헌은 찌푸둥한 허리를 펴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장정도 조금 지친 기색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시오.”
벌써 몇 판 째, 헌은 일부러 지고 있었다.
그 덕에 소진을 담보로 잡아 빌린 돈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헌이 투전판을 지키는 장정들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섰다.
소진의 안위가 궁금해,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그는 의연하게 투전판을 지켰다.
이내 측간으로 향하는 척 발걸음을 옮기며 풀숲에 숨어 있는 윤현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았고 헌은 헛기침을 하며 태연하게 측간으로 향했다.
윤현 역시, 장정들의 동태를 살피다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저하.”
“한 규수는. 한 규수는 무사한 것이냐.”
헌은 윤현을 보자마자 소진의 안위부터 물었다.
그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윤현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헌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한 규수께서는 무사하십니다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는 말에 헌의 동공이 커졌다.
“뭐? 문제라니……! 속히 고하라.”
“한 규수만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뭐라?”
어째서 소진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인지.
그 말을 들은 헌의 눈빛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혹,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싶어 헌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무사들이 한 규수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데 왜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지?”
“함께 끌려가던 여인들이 향한 곳도 일부 무사들을 보내 감시하라 하였습니다.”
“별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느냐?”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튀어갈 기세로 헌이 주먹을 바짝 쥐었다.
그러곤 숲속 어딘가를 분주히 헤집어 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
“한 규수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행수가 이 물건은 따로, 라고 말했습니다.”
“뭐, 뭐? 물건……?!”
“꽤 쓸만한 것이 들어왔다며. 미모도 반반하다고…….”
윤현이 들은 그대로 헌에게 고하던 순간.
“이 개 같은 자식들을 보았나……!”
헌의 눈빛이 맹렬히 번뜩였다.
그는 그렇게 소리치며 투전판을 뒤엎기라도 할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감히 누구를 탐내! 감히, 누구를……!”
그러자 윤현이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들이 바짝 경계하며 삼엄하게 한 규수를 보호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그 말에 헌은 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입술을 뗐다.
“한 규수의 털끝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내 그는 오늘 반드시, 이 악의 무리를 소탕하고 말겠다는 듯 주먹을 바짝 쥐었다.
“무사들 수가 모자라지는 않겠느냐.”
“조금 빠듯한 인원이기는 하지만 해볼 만 합니다.”
“이곳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합류할 것이니.”
“…….”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거나, 낭자만 따로 어딘가로 끌려간다면.”
“…….”
“내가 없더라도 지체하지 말고 낭자를 보호해야 할 것이다.”
“예, 저하.”
***
“대체 여기가…… 무엇 하는 곳입니까?”
자신보다 하루 이틀은 먼저 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여인들인 듯.
그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경계 가득한 얼굴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소진은 바깥이 잠잠한 틈을 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여인들은 모두 자포자기한 얼굴로 바닥만 응시하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소진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여인들의 차림새를 다시금 살피는데.
다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고름의 색이 달랐다.
누구는 붉은색 옷고름이고 누구는 푸른색 옷고름이었다.
‘옷고름 색깔이 다른 것으로 보아……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소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여인들의 행색을 하나, 하나 유심히 살폈다.
표정도 혈색도 없는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모두 깨끗한 차림새였다.
그때, 방문이 덜컥 열리고 자신을 이쪽으로 끌고 온 여종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섰다.
그러더니 붉은색 옷고름의 저고리를 입은 웬 앳된 여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끌려가는 그 여인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여인을 끌고 가던 여종 하나가 소진을 향해 옷을 툭 던졌다.
“그것으로 갈아입거라.”
서둘러 소진이 그 옷을 헤집어 보니 붉은색 옷고름이었다.
순간 그녀는 방 안 여인들의 옷고름 색을 다시 훑었다.
‘푸른색 옷고름이 제일 많고 그다음이 이 붉은 색이다…….’
대개 어린 여인들에게 붉은색 옷고름이 정해지는 것일까.
그때, 소진이 붉은색 옷고름의 저고리를 받아들자 방 안의 여인 몇몇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쯧쯧…….”
“붉은색이구려.”
그 말에 소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붉은색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자 푸른색 옷고름의 여인 하나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뭐긴 뭐야. 제일 값이 많이 나가는 물건이지.”
“……하면 어찌 됩니까?”
“뭐, 돈이 더 많은 사내를 상대하겠지?”
상대.
소진의 미간이 그 두 글자를 듣는 순간 무자비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누가 누구를 상대하여야 한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그녀의 말문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상대라 하시면.”
“이 푸른색 옷고름을 가진 우리는 돈 많은 집, 노리개로 팔려 가는 것이고.”
“……!”
“새댁처럼 붉은색 옷고름을 지닌 여인들은 돈이 더 많은 사내의 첩실로 팔려 가는 것이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진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뱉어내고 말았다.
“노리개, 첩실이요?”
“젊고 반반한 새댁들은 죄다 첩실로 팔려 간다오.”
“하면 가만히 나 잡아 가시오, 팔려 갑니까? 어떻게든 이 부당함을 밖에 나가서 알려야지요.”
안타깝다는 얼굴로 소진이 소리쳤다.
“여기서 이리 꼼짝없이 갇혀 있는데 어찌 알리나. 쯧쯧. 그리고 우리가 강제로 끌려온 것도 아니고…… 죄다 망할 서방 놈들이 제 손으로 팔아넘겨 이곳에 있는 것인데.”
소진과 대화를 나누던 여인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소진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소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금 입술을 뗐다.
“아니, 팔려 가서라도 말이에요. 조선 팔도 천지에 여기 사람들 구해줄 이 하나 없겠습니까? 다 같은 조선 말 쓰고, 하다못해 이 두 발로 도망이라도 치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눈길은 다시금 불같이 타올랐다.
조선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반드시 되돌아오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스며 있었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다른 여인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거참. 희망에 찬 소리만 하네, 새댁.”
“예?”
“조선 땅덩어리에서는 한참 떨어진 이름 모를 섬에 팔려 가는데.”
“……?”
“돈 한 푼 없는 우리가 어찌 돌아올 수가 있겠소. 우리를 돈 주고 산 주인들이 우리 말을 들어줄 리도 없고.”
“……아.”
“게다가 섬사람들은 뭍에서 온 사람들은 이방인 취급을 해.”
이방인이라는 말에 슬쩍 벌어졌던 소진의 입술이 맞물렸다.
점점 그들과 같이 무력감에 빠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감히 나라님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이 깊은 산 속에서 반인륜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 사람들처럼 정이니, 이웃이니 그런 것이 없다고. 저들끼리 똘똘 뭉쳐 뭍 사람들은 괄시하고 무시한다는데, 괜히 이방인이라 부르겠어? 또 더러는 바다 건너로도 팔려 간다고 하니…….”
“바다 건너라니요?!”
소진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녀가 놀라자 오히려, 소진이 왜 놀라는지 모르겠다는 듯 방 안의 여인들은 덤덤했다.
“우리 같은 것들이 어딘들 못 가겠나. 바다 건너도…… 갈 수 있지.”
그 말을 잇던 여인이 씁쓸한 듯 말끝을 흐렸다.
소진은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릎 위에 얹어진 붉은 색 옷고름의 저고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리야 그저 돈 많은 집에 팔려 가 하룻밤의 노리개가 되다, 결국 허드렛일을 하는 여종이 되겠지만. 새댁은 두 번 시집가는 꼴이니……. 여인으로서는 참, 기구한 삶이지. 차라리 하룻밤의 노리개가 낫지 않겠소?”
“…….”
“듣도 보도 못한 곳에 끌려가 갑부 사내들이 주욱―앉아 있는 곳에 서서는 나 사가시오, 사내들이 첩실로 맞을 여인들을 직접 고른다는데. 무슨 시장 바닥에서 물건 내놓고 파는 것처럼……. 그건 너무 비참하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쯧쯧, 그러니 차라리 도긴개긴한 신세라도 새댁보다는 우리가 낫다는 거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내한테 평생 겁탈당하는 것이랑 무엇 달라……!”
언제부터 이런 추악한 일이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었단 말일까?
그렇다면 궁녀로 있던 봉희는 어떻게 그곳으로 갔단 말인지.
소진은 좀 전에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여인들의 행방이 궁금했다.
“한데 혹시 이곳 말고 다른 곳에도 여인들을 이리 가둬 놓고 파는 곳이…… 있습니까?”
“다른 곳……?”
“아까 투전판에서 끌려오기 전에 함께 있었던 여인들은 저랑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아서요.”
“글쎄……. 그건 우리도 잘.”
“혹, 그러면 이곳 여인 중 궁으로 가는 여인들은 없습니까?”
궁이라는 말에 방 안 여인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들은 숙덕거리며 소진이 해괴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궁?!”
“예.”
“임금님이 사시는 궐을 말하는 거요?”
“예……. 그런 여인들은 없습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인들의 반응에 소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자 정말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여인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같이 천한 것들이 어찌 궐에…….”
“차라리 궐이 낫겠네. 사내들 손에 팔려 가는 것보다.”
그 말에 소진은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아까 함께 있던 여인들이 따로 향한 곳이…… 궁녀로 들어갈 사람들이 있다는 것일까?’
저고리를 움켜쥐는 소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면 봉희는 이곳 사람들과는 다른 경로로 납치를 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만 쳐들어오면 모든 것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곳에 대부분 며칠 머무릅니까?”
“내가 제일 오래됐소만. 닷새도 안 되어 거의 팔려 간다 보면 되오. 붉은 옷고름이 제일 먼저 팔려 가고 그다음이 푸른색 순이니.”
소진은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다.
헌을 만나면 남김없이 이야기를 해줘야지, 다짐했다.
그때, 소진이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좀 전에 여인을 끌고 갔던 여종들이 다시 들어와 이번에는 소진의 양팔을 결박했다.
“……이거 왜 이러시오!”
자신은 이제 막 이곳에 당도했는데.
어찌 다짜고짜 자신을 끌고 가려는 것인지, 소진은 당황해하며 발버둥 쳤다.
“놓으라니까?!”
하지만 소진을 결박한 여종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붉은색 옷고름의 저고리가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