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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36/125)

36.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2021.02.01.

행수라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소진은 굳었다.

“……!”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훑다, 흡족의 미소를 지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있는 상태라 소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물건은 따로.”

그때, 사내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곁으로 온 장정들에게 말했다.

그를 응시하는 소진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꽤 쓸만한 것이 들어왔구나. 미모도 반반하니…….”

그녀는 행수라는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투전판에 들어설 때 얼핏 보았던 그 얼굴이, 맞았다.

‘그때 그 도령이잖아. 대체 어찌 이 사내가 여기를……!’

헌이 괴한들에게 습격당한 날, 젊은 여인과 도망치던 사내.

그리고 일전에 저잣거리에서 헌과 함께 마주친 적도 있었던 그 사람.

소진의 가슴이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이렇게 마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었다.

소진이 사내의 얼굴을 분주히 살피며 홀로 고심에 잠겼는데, 그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다시 그녀를 집어삼켰다.

‘봉희의 실종과 관련된 인물이 세자 저하께서 미행하던 이라니……. 대체 세자 저하께서는 저 도령을 왜, 쫓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봉희는 왜 중궁전 궁녀로 있는 것이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그녀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자세한 일의 전말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봉희의 실종과 헌의 그날 밤 일이 연관되어 있을 테였다.

얼른 헌이 이 행수의 얼굴을 보았으면 싶었다.

그렇다면 분명 그에게서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저잣거리 투전판은 어찌 되었어.”

어딘가로 끌려가는 소진의 귓가에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소진은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그 말소리에 집중했다.

“모두 정리했습니다.”

“이유는.”

“소인도 딱히 이유를 전달받은 것은 없고 그저 안방마님께서 그리 명을 내리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부인이 그리 명령을 내렸다.”

“예, 행수 어르신.”

“하면 어쩔 수 없지.”

부인이라 하면 아무래도 그때, 함께 달아나던 앳된 여인일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일의 모든 주도권을 저 행수라는 사내의 부인이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소진은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면 서로 닮는다는 말처럼 두 부부는 남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얼굴이었다.

다시금 분주히 머릿속에 그 얼굴을 새기며 소진은 더듬더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을까.

발바닥에 닿는 흙길이 좀 전보다 더 울퉁불퉁했다.

아무래도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선 모양인 듯했다.

그때, 앞서 걷던 여인이 멈춰 섰고 소진도 그녀를 따라 발길을 멈추었다.

“자, 데리고 가거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소진은 앞선 여인들과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순간 당황했지만, 소진은 마음을 다잡고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애썼다.

함께 끌려온 여인들이 제게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발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것을 보니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삐거덕, 오래된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진은 한 사내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오가는 발소리도 들리고 밥을 짓는 듯 고소한 쌀 냄새도 났다.

잠시 뒤, 소진을 끌고 온 사내가 그녀의 눈가리개를 풀었다.

결박된 손도 풀어졌다. 

소진은 서둘러 주위를 살폈는데, 세간살이가 모두 갖추어진 기와집 한가운데 자신이 서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웬 여인 둘이 제 양팔을 결박했다.

“왜 이러시오……!”

소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는데.

뒤에서 저벅저벅 행수가 걸어왔다.

“오셨습니까, 행수 어르신.”

그러자 자신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채던 두 여인이 그 팔을 놓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곳에서 그의 일을 돕는 여종들인 것 같았다.

소진은 이내 거칠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다치지 않게 잘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예, 어르신.”

“간만에 값이 나갈만한 물건이 들어왔으니.”

그렇게 말하며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얼굴 또한, 무감각했다.

그러자 소진은 자신을 결박하는 여종들을 거칠게 밀어냈다.

“감히 아녀자들을 납치, 감금하다니……!”

소진은 우악스럽게 사내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진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소진 역시,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주제 파악을 좀 하지.”

“……뭐라?”

“감히 아녀자들을 납치, 감금한 것이 아니라.”

“……!”

“네 서방이 직접 자기 손으로 널, 우리에게 판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소진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소진은 그 말에 조소를 터뜨리며 지지 않고 그에게 한걸음 바짝, 다가갔다.

“너희에게 팔 수밖에 없도록 종용한 것이겠지.”

“종용……?”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은 어디서 배워먹은 논리요.”

“…….”

“돈으로 그 겉은 번지르르하게 치장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내면까지는 돈으로 채우지 못하는 것.”

“……!”

“보아하니 꽤 권세 있는 양반의 자제인 것 같은데.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좋은 일에 그 수저를 써야지. 어찌 고작 한다는 일이 금수저로 백성들의 살림살이나 퍼먹고 앉았을까.”

그녀가 행수라는 사내에게 일침을 가하자, 어쩐지 그 딱딱한 얼굴이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을 내려다보는 그 삼엄한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되레 사내의 곁에 서 있던 여종들이 소진의 놀라운 기세에 모두 입만 떡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진은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여종들을 뿌리치며 다시금 무지근하게 입을 열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 새끼가 호랑이 노릇을 한다더니.”

“……!”

“나라님이 보이지 않는 이런 깊은 산속에서 감히, 이런 추잡한 짓을 벌이며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다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그제야 행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조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독이 바짝 오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몰락 양반가의 여식인가.”

“뭐?”

“꼴을 보니 쌀 한 톨 구경 못 한 지가 꽤 된 것 같은데. 서책을 좀 읽은 티가 나는구나.”

“…….”

“한데 현실을 받아들이거라. 네 꼴을 좀 보란 말이다.”

“……!”

“네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네 서방은 이미 너를 팔아넘겼고.”

“…….”

“너는 이미 거지꼴로 여기에 팔려 온 것이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 말을 고스란히 들은 소진은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 사내의 멱살을 쥐고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감히 영의정의 여식을 욕보인 죄를 엄히 물어도 시원찮을 판국이었다.

“그러니 닥치고 현실을 받아들이란 말이다.”

“…….”

“지금 누가 누구에게 금수저를 운운하며 가르치려 드는 것인지……. 참으로 우습구나.”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진이 멱살을 쥔 사내의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그래. 어디 내 콧대라도 꺾어 보겠느냐? 한데 지금 내 콧대를 꺾지 못한다면 곧 너의 콧대가 꺾일 것이다.”

“……!”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야.”

하지만 사내는 그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색깔 없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만 빤히 내려다보다, 등을 돌렸다.

“준비하라.”

그러곤 간단한 그 말을 남긴 채 사내는 사라졌다.

여종들은 서둘러 소진을 에워쌌고 소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다, 어쩔 수 없이 그들 손에 끌려갔다.

***

“해서…… 지금 저하와 함께 그곳에 가셨단 말이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봉희의 집을 찾은 보은군.

숙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예. 벌써 두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 어찌 소식이 없는 것인지.”

“저하의 호위 무사들은?”

“함께 가신다고 들었어요. 한데 이리 늦으시는 연유가 무엇일까요?”

그녀는 슬그머니 문을 열어 요지부동 자세로 서 있는 소진의 호위 무사를 바라보았다.

보은군도 슬슬 걱정이 된다는 듯, 노을이 지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시진 전이라…….”

“봉희댁 옷으로 변장을 하고 가시긴 했는데. 저하는 제대로 만나셨을지…….”

“아마 저하께서 따로 낭자를 찾으러 오지 않았으면 두 분이 만나긴 하셨을 것이다.”

그러다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던 그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숙자를 불렀다.

그러곤 곁에 있던 봉희의 남편도 가까이 와보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오늘부터 이 집에서 봉희댁인 척해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

“봉희인 척……?”

봉희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의정 대감께서 곧 사람을 보내 봉희댁의 안위를 살필 것 같소.”

“……어째서 우리 봉희를?”

“나 또한 자세한 연유는 모르나 왠지 영의정 대감께서 이곳을 주시할 것 같아서.”

“한데 그럼 더 잘된 일 아닙니까? 소진이가 영의정 대감마님께는 말씀을 안 드렸다고 하던데. 높으신 분이니……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실 것 같은데.”

봉희 남편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보은군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보은군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벌렸다.

“영의정 대감께서 알게 되면 소진 낭자만 곤란해지게 될 것이오.”

“……소진이가요?”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고 행여 다른 이들의 구설에 오를까, 이곳은 더욱 얼씬도 못하게 할 것이오. 자신에게 조금만 흠이 될 만한 것은 애초에 제거하시는 분이시라…….”

“아……. 그래서 소진이가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구나.”

망연자실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봉희의 남편.

숙자는 자신이 더 심각해져서는 고심에 잠겼다.

“이 사실을 얼른 아씨한테 말씀드려야 할 텐데.”

“……오늘은 늦었으니 그렇다 쳐도 내일부터는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네.”

“그럼 쇤네가 지금 봉희댁을 대신할 만한 인물을 구해보도록 할까요?”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봉희의 남편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면 제 누이를 잠시 불러다, 며칠 지내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누이가 있소? 하면 누이가 괜찮을 것 같소만.”

“봉희랑 체격도 비슷해서 얼핏 보면 봉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보은군이 그의 말에 조금 더 말을 보탰다.

“부부인 것처럼 보여야 할 것이오.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이시오. 또한, 얼굴은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해야 할 것이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숙자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다 영의정에게 모든 것을 들키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분명 소진이 앞으로 피곤해질 것인데, 숙자의 고민이 점점 무거워졌다.

“우선 낭자가 돌아오는 대로 이 사실을 꼭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대감마님.”

보은군은 여기서 좀 더 있다가 소진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보고 환궁을 할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마냥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보은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되겠네.”

그러다 소진의 걱정을 떨칠 수 없다는 듯 그가 숙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 그때 자네가 낭자에게 건넸던 여분의 지도가 있는가?”

“여분의 지도라 하시면.”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던 숙자가 손뼉을 딱, 쳤다.

“예. 여기요. 혹시나 해서 더 들고 있었는데…….”

그러곤 소맷자락 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보은군은 가만히 지도를 살피다, 자신에 데리고 온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여기로.”

“…….”

“이곳으로 가야겠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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