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법 쓸만한 물건.
2021.01.29.
행수라는 사내가 언뜻 소진의 눈앞을 스쳐 지났다.
그 얼굴이 너무도 낯이 익었기에 소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때 그, 저하를 습격했던 사내……?’
하지만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금 그 사내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장정들에게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목소리만 들려올 뿐, 사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곤 이 투전판의 주인인 것 같은 사내가 장정들과 함께 어느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훑는 소진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 사람이 우두머리인가 봅니다.”
헌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소진을 자신 쪽으로 좀 더 잡아당겼다.
‘아……. 그때 그 사내인 것도 같은데. 아닌가.’
소진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혹, 저 사내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혹시 하는 마음으로 소진이 헌을 돌아보았는데, 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곧 확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말하며 헌이 소진의 어깨를 톡, 톡 다독였다.
“예.”
아쉽지만, 그의 말대로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소진은 헌을 따라 투전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투전판 하나당 지키는 이들이 따라붙었다.
소진과 헌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투전판에 대해 익히셨지요?”
“일부러 져주기도 어려울 만큼 쉬운 논리였습니다.”
“그래도 져야만 합니다. 아시지요? 저를 팔아넘기셔야 합니다.”
“팔아넘긴다는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가짜라도 기분이 영 언짢으니.”
헌이 입술을 꽉 깨물며 소진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그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정 하나가 소진과 헌의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한 사람만 참여하실 수 있소.”
그의 말에 헌과 소진의 시선이 동시에 부딪혔다.
소진은 따로 나와 있어야 한단 말이었다.
헌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자 헌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장정을 향해 우악스럽게 입술을 뗐다.
“굳이 따로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는 비아냥거리듯 피식거렸다.
“마누라 팔러온 자식이…… 애처가인 척하기는.”
“뭐라?”
“여기 철칙이 그렇소. 판 하나에 한 사람씩. 처음이오?”
“그렇소만.”
“궐에 가면 궐의 법도를 따라야 하듯 여기서는 이곳만의 법을 따라야 하오. 그러니 그쪽 부인은 나가 있으시오.”
그 말에 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볼멘소리를 했다.
“감히 어디서 신성한 궐과 비교를……. 쯧.”
하지만 더는 맞설 수 없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가는 오히려 둘의 사이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었다.
소진은 괜찮다는 듯 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자리를 떴다.
그녀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투전을 시작한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꼭 누군가에게 팔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소진은 노름꾼들이 가지고 온 세간살이며 곡식들이 놓인 곳간 앞에 섰다.
“휴…….”
그 안에는 자신과 같이 서방을 따라온 여인들이 꽤 보였다.
아무래도 부인들을 담보로 잡고 투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로 얼굴을 한껏 가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모두 주정뱅이 노름꾼들의 아내일 것이다.
소진은 그런 여인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 무릎을 끌어안고서는 잔뜩 우울해진 얼굴로 자신의 발끝을 응시했다.
봉희의 낡은 짚신이 눈에 들어왔다.
‘봉희야 너도 꼭, 이런 기분이었겠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끌려와 다른 여인들과 함께 벌벌 떨고 있었겠지?’
소진은 이를 악물었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이상, 절대 맨몸으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 곳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행수라는 사내가 들어선 방을 응시했다.
“호랑이든 호랑이인 척하는 여우든, 오늘, 네 낯짝을 꼭 보고 말 것이야.”
***
도통 헌은 투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물론 져야만 하는 것이니 큰 부담은 없었지만, 자꾸만 그는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렸다.
“쯧쯧, 잘 좀 해보시오. 젊은 양반이 뭐 이렇게 재주가 없어.”
“…….”
“벌써 갖고 온 돈을 모두 잃었지? 그러다 금이야 옥이야 아끼던 부인까지 잃겠소만.”
“…….”
“한데 그쪽 부인 정도면 꽤 값을 쳐줄 것이니. 뭐 넉넉하게 잃어도 괜찮을 걸세. 미모가 아주 끝내주는 것 같던데.”
장정은 그렇게 말하며 뭐가 재미있는지 껄껄껄 웃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기만 하던 헌이 쯧, 혀를 찼다.
그러곤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손바닥으로 탁상을 탁 내리쳤다.
그는 한계에 다다른 듯, 턱을 치켜든 채 무지근하게 입술을 뗐다.
“입 좀 다물지.”
“뭐, 뭐?!”
“이러다 그쪽 목숨이 여기서 끝날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헌의 말에 장정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헌은 좀 전보다 더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쪽이 자꾸 비아냥거리면서 내 성질을 살살 긁으니까. 내가 여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그, 그게 내 탓이라고?!”
“그럼 여기 그쪽하고 나 말고 누가 있지.”
“…….”
“입 좀 다물거라. 성가시게 하면 그 입을 찢어 놓을 수도 있으니.”
그저 그런 노름꾼의 허세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헌에게서는 가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장정은 무어라 대꾸하려다 사나운 헌의 눈빛에 슬그머니 입술을 닫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한마디라도 더 거들었다가는 입을 다 찢어 놓을 기세였으니까.
헌은 다시 투전판에 집중했다.
자꾸만 홀로 떨어져 있는 소진이 걱정되어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앞에 앉은 장정이 손장난을 치는 것이 헌의 눈에 보였다.
‘그래…… 이딴 장난질이 있을 줄 알았지.’
소진의 걱정에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사내의 꼼수가 보였다.
아마 정말 투전에 미친 노름꾼이었더라면 어떻게든 이번 판에서 역전하기 위해 흥분을 한 상태니 당연히 사내의 손장난은 보이지 않을 테였다.
헌은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그의 농간에 놀아나 주기로 했다.
“하. 또 잃었네.”
“쯧쯧, 잘 좀 하시지.”
곤란하다는 듯이 헌이 구부렸던 허리를 펴며 이마를 매만졌다.
그러곤 보란 듯이 빈 주머니를 털어 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가 핏, 조소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고 온 돈을 모두 잃은 게지?”
“……한 판만 더. 딱 한 판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인데.”
“하면 뭐라도 걸지?”
“하지만 마누라만큼은…….”
헌은 일부러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며 연기를 했다.
사내는 허리를 구부려 달콤한 목소리로 헌에게 속삭였다.
“담보로 걸고. 어떻소?”
“담보……?”
“그쪽 마누라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줄 테니 한 판 더.”
그 말에 헌이 눈을 반짝였다.
소진과 자신의 계획대로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헌은 슬그머니 소진이 기다리고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속만 바짝바짝 태우고 있을 그녀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낭자.’
헌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러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는 원하는 먹잇감을 손아귀에 넣은 듯, 비열한 웃음을 띠었다.
곧 그는 손을 들어 누군가를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또 다른 장정 둘이 서둘러 이쪽으로 뛰어왔다.
“이쪽 부인, 방으로.”
미리 입구에 서서 출입하는 이들의 얼굴을 익힌 장정들이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내 사내는 투전을 벌이던 탁상 바로 밑에서 돈 꾸러미를 꺼냈다.
헌은 느리게 제법 많은 양의 돈이 들어있는 듯,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훑어보았다.
“다른 이들보다 세 곱절은 더 많이.”
“…….”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쪽 부인이 여기에서는 값어치가 좀 나가거든.”
“…….”
“마누라 잘 둔 줄 아시오. 허허허.”
다시금 사내가 목젖이 보여라, 껄껄 웃었고 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
“이제부터는 그쪽 마누라를 담보로 한 판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 할 것이오.”
조소 섞인 사내의 목소리는 헌의 귀에 더 들리지 않았다.
헌은 굳은 얼굴로 장정 둘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소진이 그들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조금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의 소진이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우뚝 일어선 헌.
그는 타는 속만 붙잡은 채 멀어지는 소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낭자……!’
거짓이었지만.
모두 계획된 연기였지만 이상하게 헌은 심장이 터져나갈 듯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뭐하쇼? 얼른 안 하고.”
그때, 헌과 끌려가던 소진의 시선이 부딪혔다.
“아…….”
헌의 일그러진 잇새에서 뜨거운 한숨이 흘렀다.
그것은 소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스레 헌과 눈이 마주치니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소진은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곤 자신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응시하고 있는 그를 향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는 걸, 애써 그러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헌은 잘 알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참으로 애틋한 순간이었다.
곧 소진은 사내들과 함께 어떤 방으로 들어섰고 헌은 먹먹한 눈으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거참. 누가 보면 마누라 뺏어가는 줄 알겠네!”
헌은 자리에 앉았다.
정말 사내의 말대로 소진을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에 그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그러게. 왜 이렇게 뺏기는 기분이 들지.”
“뭐?”
“기분이 참으로 더럽군.”
“……뭐라는 거야.”
“시작하지.”
이것이 진짜 현실이 아님에 감사하며 헌은 다시 투전판을 응시했다.
***
“담보라고…… 하지 않았소? 한데 어딜…… 간다는 겁니까?”
소진은 황당하다는 듯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손에 이끌려온 또 다른 방 안에도 꾀죄죄한 모습의 여인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그들 역시 하나같이 벌벌 떨며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담보지. 네 서방이 투전으로 그 돈을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래, 이런 식이지. 늘 이런 식이었겠지.’
소진은 그 말을 꾹꾹 속 깊숙이에 억누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해서 어디로 데려간다는 것이오?”
“거참, 말이 많네. 이제부터는 어떤 질문도 금지다. 알겠느냐?!”
사내는 소진을 향해 윽박질렀다.
분명 담보 개념이라 이 방에 잠시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소진이 들어서자마자 사내들은 이미 방에 먼저 와 있던 여인들과 함께 또 어딘가로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것인데…….’
소진이 조금 겁에 질린 얼굴로 조그마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풀숲이 우거진 산속이었다.
하지만 그 어딘가에서 헌의 호위무사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테였다.
조금만 소진이 위험해지면 곧바로 달려들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하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해. 빨리 움직이지 않고.”
“예!”
사내의 호통에 안에서 여인네들을 감시하고 있던 다른 사내 둘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여인네들이 쓰고 있던 복면을 벗기더니 입에 재갈을 물리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뭐, 뭐 하는 짓이오……! 대체 이게 뭐 하는……! 웁!”
소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입과 눈이 틀어막혀졌다.
“네 서방들은 절대 너희를 되찾지 못한다.”
“……!”
“왜냐면 이 투전에서는 돈을 딸 수가 없거든.”
“…….”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네 서방들은 무사히 이 투전판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너희와는 달리. 하니, 너희 집의 남은 식솔들을 네 서방들이 잘 보살필 것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따르거라.”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댔다.
늘, 매번 이런 식으로 노름꾼들의 심리를 이용해 제 부인을 직접 팔도록 종용한 것일 테다.
소진도 잘 알았다.
이 투전판에서는 결코, 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잃기만 하는 투전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헝겊으로 눈으로 가렸지만 환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소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여인들이 이 투전판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다인가?”
이내, 또 다른 사내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아까 그 행수라는 작자의 음성……?’
소진의 온 촉각이 그에게 쏠렸다.
“예. 1차로 먼저 보내 놓으려고요, 행수 어르신.”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행수가 직접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해야만 하는데.
소진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조금은 앳된 목소리가 다시금 소진의 귓바퀴를 움켜쥔다.
“오늘은 어제보다 물건들이 더 상태가 안 좋구나. 얼른 데려가서 씻기고 교육 시키거라.”
“예, 행수 어르신.”
‘교육……? 씻기고 교육을 시키라고……?’
소진은 행수라는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라와!”
그때, 소진과 앞선 여인들이 밧줄로 한데 칭칭 묶이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지. 이 꼴로 저잣거리를 지나칠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이 산속에 이들의 비밀 집결지가 있을 것인데.’
소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들과 한데 뭉쳐 더듬더듬 발을 떼어가고 있는데.
“잠깐.”
그때, 행수라는 사내가 여인들을 멈춰 세웠다.
이내 무어라 저들끼리 속닥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소진의 눈을 감싸고 있던 헝겊이 풀렸다.
“……!”
놀란 소진이 얼굴을 구기며 눈을 떴는데 누군가가 제 턱 끝을 추어올렸다.
“아.”
소진과 행수라는 사내와 눈이 딱 마주쳤고.
“제법 쓸만한 물건이 들어왔네?”
그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는데 동시에 소진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
행수의 얼굴을 확인한 소진은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