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금슬 좋은 부부 (34/125)

34. 금슬 좋은 부부

2021.01.25.

순간 굳어버린 헌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아.”

그의 잇새에서 작은 탄성이 흘렀다.

이상하게 명치 끝이 간질간질한 것도 같고 가슴 깊숙이가 뜨끈뜨근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타는 헌의 마음도 모른 채, 소진은 생긋 웃어 보였다.

“처음 올린 머리라 영, 서툴렀던 모양입니다.”

그러곤 그의 손에 쥐어진 비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멋쩍게 입술을 달싹였다.

“홀로…… 올리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

“저 머리 좀 올려주시겠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헌은 여전히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어렵지 않은 그 말이 헌의 귀에 턱 걸리고 말았다.

그러자 소진이 조금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하……?”

그녀의 부름에도 헌은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몸이…… 어찌 이러는 것이지.’

소진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 위로 부서지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소진은 점점 얼굴이 상기되는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그의 이마에 제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

동시에 헌의 심장이 또 한 번 바닥 아래로 추락하는 듯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열이 나는 것도 같은데…….”

“아, 아닙니다. 뒤, 뒤를 도시지요.”

“예?”

“머리. 올려달라면서.”

헌은 서둘러 말을 돌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내 소진이 빙그르르 돌아 등을 보였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차분하게 놓였다.

“제가 돌돌 말겠습니다. 하면 저하께서 비녀를 깊이 꽂아주시면 됩니다. 다시는 안 풀리게 확실히 꽂아주셔야 해요.”

소진은 쫑알거리며 손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틀어 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그녀의 하얀 목선 위에 헌의 시선이 떨어졌다.

“하.”

왜 자꾸만 소진에게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인지.

헌은 당황한 듯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껏 달아오른 숨결이 소진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목에 닿았다.

자신의 살갗에 닿는 뜨거운 입김에 그녀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열병이 나신 건가……. 어찌 이리 뜨겁지.’

헌은 휘휘 고개를 저으며 소진이 동그랗게 만 머리카락에 비녀를 꽂았다.

“되었습니다.”

“단단히 꽂으셨습니까?”

“풀리면…… 또 꽂으면 되니까.”

평소와 달리 그는 조금 가라앉아 보였다.

소진은 그런 헌을 의아하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닙니다.”

평소 같았으면 시답잖은 농담도 툭, 툭 던지며 눈도 서슴지 않고 맞추었을 텐데.

오늘따라 그는 평소와 달랐다.

이제부터 점잖은 척을 하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세자의 체통을 지키기로 한 것인지.

소진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그저 땅만 바라보며 말수도 아끼는 것 같았다.

“어디 불편하시면 그냥 보은군 대감과…….”

“아니! 보은군은 아니 됩니다!”

“깜짝이야!”

분명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었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예뻐 보이는 소진이었다.

이렇게 예쁜 그녀를 보은군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헌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먼저 돌아섰다.

‘아니 왜 저래……? 오늘따라 왜 저렇게 적응 안 되게 무게를 잡아?’

소진은 앞서가는 헌을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같이 가요!”

“…….”

“저하……!”

“…….”

“아이참. 같이 가자니까, 어!”

소진보다 발이 조금 더 큰 봉희의 짚신을 신고 온 탓에 자꾸만 짚신이 벗겨지려 했다.

그 때문에 소진이 헌을 따라잡기 위해 서두르다, 그만 삐끗하고 말았다.

“……!”

휘청이는 그녀를 헌이 황급히 붙잡았다.

“조심하여야지.”

그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소진이 그의 옷깃을 꾹 쥐었다.

헌의 시선이 자신의 옷깃을 꼭 잡은 소진의 작은 손 위에 머물렀다.

“먼저 가지 마세요. 같이 가요.”

“……!”

“오늘만큼은 우리, 부부잖습니까.”

소진의 말에 헌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왜.’

자꾸만 오늘따라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데.

또한, 오늘만큼은 부부라는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그녀의 서방이 되겠다, 먼저 나선 것은 자신인데.

헌은 멍한 얼굴로 소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잊었습니까?”

“무엇을요?”

“지금 우리는 금슬 좋은 부부가 아닙니다.”

“……?”

“나는 투전판에 그대를 팔아넘기러 가는 파렴치한 서방이고…….”

“나는 투전판에 팔리러 가는 파렴치한 서방의 마누라라고요?”

소진이 헌의 말을 가로채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갑자기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하지만 여기는 투전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여기서부터라도 제법 부부인 것처럼 연습을 해야 나중에 팔러왔든, 팔리러 왔든 남들 눈에 부부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맞았다.

소진은 눈빛을 반짝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동시에 헌의 손을 꼭 잡으며 흔들어 보였다.

“잘할 수 있겠지요?”

“…….”

“부부 행색은 처음이라…… 실수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고개를 젖혀 헌을 올려다보았다.

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나도 처음입니다.”

이내 그는 소진이 잡은 손을 고쳐 잡으며 그녀와 손깍지를 꼈다.

“그래. 한번 해봅시다.”

“……?”

“투전판에 들어가기 전까진 금슬 좋은 부부.”

헌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자신의 곁에서 분주히 발을 움직이는 그녀를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호위대의 수를 넉넉히 채비해 뒤따르라 일러놓았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매번 이렇게 신세를 지니…….”

“해서 계획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어깨를 나란히 맞추었다.

누가 보면 정말 꼭, 금슬 좋은 부부 같아 보였다.

“우선 투전판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확인할 것입니다.”

“우두머리라…….”

“예. 그리고 여인들을 따로 가둬놓은 곳도 눈여겨보아야겠죠?”

“투전판을 샅샅이 뒤질 계획이신가 봅니다?”

“당연하죠. 해서 그들이 그 여인들을 어디로 빼돌리는지도 꼭 알아내고 말 겁니다.”

“…….”

“그러니 저하께서 꼭 투전에서 져서 저를 팔아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다 낭자께서 다치기라도 하면.”

“설마 그 안에서 저를 패기라도 할 것이라 생각하시어요?”

사내보다 더 큰 배포를 지닌 여인인 것 같았다.

헌은 그녀의 호방함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은 사람을 사고파는 물건이라 생각하는 파렴치한들입니다.”

“…….”

“하니 물건을 팔기도 전에 흠집을 낼 리가 있겠습니까? 혹여 제가 가둬져서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만 잠자코 지켜보다, 제가 안에서 난동을 피우거든 호위무사들과 함께 투전판을 엎으시면 됩니다.”

“엎는 거야 문제는 안 되겠지만. 다치시면 안 됩니다.”

소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정의감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성정도 올곧고 정의롭고 영민한 여인이다.’

이 여인의 정의감을 단순한 오지랖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날……. 자객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쓰러진 나를 이 여인이 정말 구해주었을 수도 있다.’

자꾸만 믿게 되었다.

소진과 함께하는 날이 잦을수록 헌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믿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여인이라서.

아무래도 마음이 자꾸만 소진을 향해 기우는 것 같았다.

“저하.”

그때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소진이 헌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저하께서는 소녀가 왜 세자빈이 되었으면 하세요?”

“그거야 당연히…….”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헌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소녀가 좋아서라는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말고.”

“……!”

“솔직히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자 헌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그는 소진과 맞잡은 손을 지그시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하면 낭자는 왜 세자빈이 되기 싫으신 겁니까?”

“음……. 난봉꾼에 호색한이라 소문난 저하시니까요?”

그녀는 숨김없이 말했다.

솔직한 소진의 대답에 헌은 다시 한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해서 지금도 그 소문에 대한 확신은 여전한 것입니까?”

“영 뜬 소문은 아니구나 싶다가도.”

“싶다가도?”

소진이 헌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소문이 좀 과장됐구나 싶기도 하고 그럽니다.”

“반반이다……?”

“예.”

“하면 세자빈이 되기 싫었던 그 마음도 반으로 줄어들었습니까?”

헌도 희미한 웃음기를 입가에 매단 채 그녀를 향해 물었다.

“글쎄요? 한데 저하께서는 왜 제 질문에 답을 않으셔요?”

소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이내 헌이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접으며 알 듯 말 듯,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낭자가…… 필요하니까, 내게.”

진심을 담아 그렇게 대답하며 헌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그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보드랍게 젖어 들었다.

“그리고 낭자가 좋으니까.”

“…….”

“좋아…… 졌으니까.”

소진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정확히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가슴이 따뜻해지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필요해서.’

그녀는 헌의 대답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다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뭐……. 소녀도 반반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그 대답을 툭, 뱉으면서.

어쩐지 소진과 헌의 뺨이 동시에 붉어지는 듯했다.

***

“여깁니다.”

헌은 그녀와 꼭 맞잡았던 손을 스르륵 놓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복면을 쓴 얼굴을 치켜들었다.

깊은 산 속에 이런 어마어마한 투전판이 열리고 있을 줄이야.

이미 투전판 앞에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고요한 산 중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다…… 노름꾼들이라 이거지요?”

소진이 입을 떡 벌린 채 으리으리한 규모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서 그렇고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지.”

“…….”

“감히 전하의 눈을 피해 산중에서 이딴 짓을 벌였다니…….”

“들어가시지요.”

소진과 헌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누가 봐도 서먹한 부부 사이인 것처럼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헌이 먼저 안으로 들어서고 그 뒤를 이어 소진이 들어섰다.

그러자 그 안에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모여 서로 돈을 따겠다고, 옥신각신 다투는 중이었다.

한 곳에서는 돈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이들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환희에 잠겨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소진의 안색이 절로 굳었다.

대체 투전이 뭐길래.

집 문서도 날리고 식솔까지 팔아넘기는 것일까.

그때, 소진과 헌의 앞을 장정 하나가 가로막고 섰고 헌은 본능적으로 소진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흠.”

의심쩍은 눈을 소진과 헌의 차림새를 살피던 장정이 무언가 내놓으라는 듯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헌은 여유 있게 고개를 까딱이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은 숙자에게 건네받았던 이곳 지도가 그려진 종이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이 종이의 유무로 출입이 가려지는 것 같았다.

헌이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던 장정이 헌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의 뒤에 쭈뼛쭈뼛 서 있는 소진을 응시했다.

“부부?”

“그러하오.”

그러더니 그 장정은 소진의 위아래를 빤-히 훑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원하던 먹잇감을 찾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내리고 있었다.

“무엇을 걸고 하시려고.”

그 눈빛이 너무도 기분이 나빠 헌은 당장이라도 그 장정의 얼굴에 주먹을 가격하고 싶었다.

울컥하는 분노를 꾹, 꾹 누르며 헌이 입술을 뗐다.

“일단은 돈.”

“후에는?”

마치 헌이 돈을 잃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순간, 헌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알면서 뭘 물어.”

“……뭐?”

“투전판에 마누라는 왜 데리고 왔겠는가.”

“허허. 알겠소. 거참, 마누라 팔러 왔으면서 되게 당당하네?”

“무조건 이길 것이니 마누라 팔 일 없소.”

그렇게 말하며 헌은 정말 소진을 잃을 것만 같은 기분에 입술을 꽉 악물었다.

장정은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소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 애틋하면 처음부터 데리고 오지를 말던가……. 흠. 안으로 들어가시오.”

소진 역시,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밖에서 호위대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함을 가시질 않았다.

소진은 저도 모르게 헌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그러곤 자신을 여전히 빤히 응시하는 장정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가, 같이 가요, 서방님…….”

겁에 질린 소진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헌이 말없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내 뒤를 바짝 따르시오.”

그때, 갑자기 투전판 안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투전을 하는 사람들을 뒤에서 감시하고 있던 장정 여럿이 우르르 입구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 어어…….”

소진은 휘청이며 헌의 팔을 꼭 잡았다.

헌 역시, 굳은 얼굴로 장정들이 몰려가는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싼 장신구들로 휘어감은 사내 하나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행수 어르신……!”

아무래도 판을 벌인 이 투전판의 주인인 것 같았다.

소진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 행수라는 사내를 바라보았는데.

“아니……. 저자는……?!”

그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소진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