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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부녀, 한 소진. (33/125)

33. 유부녀, 한 소진.

2021.01.22.

집으로 돌아온 영의정은 곧바로 소진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재간택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소진은 영의정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 손을 모았다.

그러자 그가 무심한 얼굴로 소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 상궁 마마님께서 성심을 다해 지도해 주시고 계시옵니다.”

“그래. 오늘 중궁전에 다녀오는 길이다.”

“중전마마를 뵈었사옵니까?”

“너의 재간택 일로 마마께서도 근심이 많으신 모양이야.”

“……예, 아버지.”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소진도 얼추 중전과 자신의 아버지가 같은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중전 역시, 세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소진은 고개를 조아리며 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정녕 그 넓은 궐 안에서 그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돕는 신하는 없는 것일까.

홀로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간 들은 적이 있었다.

기울어져 가는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세력들로부터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헌은 고군분투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헌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아버지인 영의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소진은 잘 알았다.

“재간택 과제를 대비전과 중궁전이 함께 고심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는구나.”

“예.”

“해서 중전마마께서 과제가 정해지는 대로 내게 알려주기로 하였으니 이번에는 결코, 실수 없이 재간택에서 떨어져야 할 것이다.”

“예, 아버지.”

소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의정을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저 이런 말을 하려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닐 텐데.

그녀는 조금 예민한 눈빛으로 영의정의 안색을 살폈다.

그때,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데 오늘은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그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괜히 소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호위무사가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소진은 분주히 영의정의 눈치를 살폈다.

“봉희네…… 집을 다녀오는 길인데, 어찌.”

“봉희댁을 만나러 갔다 왔다……?”

“예. 아버지.”

그렇게 되묻는 영의정의 눈빛이 날이 서 있었다.

“봉희댁은…… 잘 지내고 있는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아버지가 봉희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되레 전처럼 그녀를 만나러 간다고 할 때마다 언제까지 평민인 봉희와 어울릴 거이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는데.

소진은 영의정의 뜻밖의 물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예…….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영의정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어찌 봉희를 물으시는지요?”

그러곤 의아하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영의정은 소진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냥. 네 벗이니.”

그럴 리가 없었다.

단지 소진의 벗이라 하여 그가 봉희의 안부를 물을 이유가 없었다.

소진의 촉각이 곤두섰다.

“예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 집에 들르지를 않는 듯하구나?”

“…….”

“예전에는 간혹 들러 너와 담소도 나누고 네 어머니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고받더니.”

“…….”

“도통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그렇게 묻는 영의정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봉희가 잘 지낼 리 없다는 듯 되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소진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오늘 중궁전에 다녀오는 길이다.

영의정이 좀 전에 했던 말이 소진의 귓가를 울렸다.

‘설마……?’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 봉희가 요즘 몸이 안 좋아 집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해서 제가 봉희를 만나러 가는 것이고요.”

“그렇구나. 그래, 알겠다. 물러가보거라.”

“예…….”

소진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의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는데.

“아, 한데 그때 네가 했던 말.”

“……?”

“마을의 여인들이 사라진다는 것.”

영의정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소진은 확신했다.

그가 중궁전에서 봉희를 본 것이라는 걸.

소진은 숙였던 얼굴을 들어 영의정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역시 조금은 단단한 눈빛으로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저 소문이.”

“소문?”

“예. 봉희에게 들은 이야기여요. 마을의 여인들이 간밤에 사라진다는.”

“……해서.”

“예?”

“해서 실종된 여인들이 모두 돌아왔다고 하더냐.”

“아니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봉희 댁이 해준 이야기라고?”

“예…….”

소진은 말끝을 흐리며 연신 영의정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찜찜한 듯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이들의, 더군다나 같은 양반도 아닌 평민들의 일에 조금도 신경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 물으십니까?”

“그냥. 네가 했던 이야기가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나서.”

“소상히 알아볼까요?”

“아니다. 되었다. 나가보거라.”

“예, 아버지.”

안채를 나서는 소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심 그날 중궁전에서 봉희를 닮은 궁녀를 본 후, 찝찝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자신이 행여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줄곧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닮아도 너무 닮은 얼굴에 마을의 소문까지 가세하니 소진은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봉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단 한 곳, 중궁전.

그곳에서 그녀를 닮은 궁녀를 보았으니 소진은 기필코 중궁전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영의정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도…… 중궁전에서 봉희를 본 거야. 확실해.”

소진은 굳은 얼굴로 안채를 돌아보았다.

***

다음 날.

“내가 잘못 보았을 리는 없는데.”

영의정은 다른 종친들과 사냥을 하는 와중에도 도통 사냥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아녀자의 몸으로 봉희가 중궁전의 궁녀로 지내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소진도 자신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고.

“봉희라는 그 아이의 집을 며칠 지켜보면 답이 나오겠지. 궁을 오가며 궁녀로 지내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것인지.”

그때, 홀로 고심에 잠겨 앉아있기만 하는 영의정을 보은군이 바라보았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것인가…….”

보은군은 영의정을 한참 응시하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찌 근심이 있으신 듯한 얼굴입니다.”

그가 희미한 웃음을 매단 채 영의정의 곁에 앉았다.

“아, 오셨습니까. 사냥은 좀 어떠십니까?”

그러자 영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은군을 향해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고는 다시금 앉았다.

“오늘은 영, 활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데 대감께서는 여기에 홀로 앉아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지요?”

보은군의 물음에 영의정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냥……. 이것저것 좀 생각하느라.”

“소진 낭자의 재간택으로 혹 고민이 많으신 것인지요?”

“물론 그것도 고민입니다.”

영의정은 허허, 소리 내어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소용 마마께서는 강녕하시지요. 소인이 찾아 뵈어야 하는데…… 요즘 간택이 한창인지라.”

“예. 강녕하십니다. 저도 어머니를 잘 뵙지 못하는 처지인 것을요. 괜찮습니다.”

“한데 출궁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찌……. 국혼도 치르기 전에.”

“대비마마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어차피 출궁해야 할 것, 조금 더 서두른다 하여 문제 될 것은 없으니. 기쁜 마음으로 차근차근 채비하고 있습니다.”

보은군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음을 띠었다.

그때, 영의정이 그런 그를 돌아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우리 소진이와 자주 만남을 가지십니까?”

그러자 보은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에는 간택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그렇지요. 소진이가 많이 섭섭해하겠습니다. 마마를 많이 믿고 따르며 함께 담소 나누길 즐기던 아이였는데.”

“…….”

“간택 때문에 이제는 마음 놓고 만나지도 못하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 역시 소진 낭자와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도 나누고 동무처럼 편히 지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보은군은 정말로 그때가 그립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갔다.

그런 보은군을 말없이 돌아보던 영의정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는 사가에 우리 소진이 말고도 다른 벗이 있으십니까?”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보은군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늘 사가에서는 우리 소진이와 어울렸던 것 같아서.”

“아, 예……. 어린 시절에는 가끔 소진 낭자의 벗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는데. 요즘에는 함께 어울릴 일이…….”

“그렇군요. 하면 우리 소진이의 친한 벗이라는 봉희 댁을 혹 아십니까?”

봉희라는 이름에 보은군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물으며 영의정은 보은군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보은군은 부러 환하게 웃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알다마다요. 소진 낭자의 제일 절친한 벗, 아닙니까? 이름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데…… 그 봉희 댁이 시집을 간 뒤에는 저도 도통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 소진이가…… 반가의 규수들과는 통 어울리지 못하고.”

“…….”

“그저 평민들과 어울려 지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규수들과도 어울려야 배우는 것도 많을 것이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들을 것인데.”

“아닙니다. 소진 낭자는 그런 규수들에게서 더 배울 것이 없는 분입니다.”

보은군의 말에 영의정의 입술이 슬그머니 맞물렸다.

소진을 떠올리는 보은군의 얼굴이 따뜻하기만 했다.

“평민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고 느끼는 여인이니까요. 따뜻한 심성을 지녔고 영민하고 지혜로운 분입니다.”

“마마께서 그리 우리 소진이를 잘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보은군은 내심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그가 봉희의 이야기를 넌지시 건넨 것일까.

내내 고민하던 얼굴로 앉아있던 이유가 혹, 봉희라는 여인 때문일까.

보은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띤 얼굴로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색깔 없는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빛이 무언가에 빠져 있는 듯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진 낭자에게 얼른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겠어.’

***

“어때, 숙자야? 나 좀 제법 유부녀 같으니?”

오늘은 헌과 함께 부부 행색을 하고 투전판에 잠입하기로 한 날.

소진은 봉희의 중에 제일 허름한 옷을 빌려 입고 그녀의 비녀까지 꽂고는 완벽하게 변장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출타를 한 틈을 타, 숙자와 함께 또다시 봉희의 집을 찾아 변장 중이었다.

소진은 머리를 단단히 틀어 올린 채 비녀를 꽂았다.

그것은 당연히 봉희의 것이었다.

숙자는 그녀의 머리칼을 곱게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녀에 궁녀에 그것도 모자라 이젠 마누라 팔아넘기는 망나니의 부인이라니.”

“…….”

“대체 이게 누굴 위한 변장인지 모르겠네요.”

소진은 숙자가 구시렁거리든 말든 경대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옷고름을 묶었다.

“한데 뭐를 입어도 죄다 잘 어울리지 않느냐? 얼굴이 너무 귀티가 나.”

“어련하시겠어요.”

호위무사가 문밖에서 지키고 있었지만, 소진이 안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슬쩍 문을 열어 아무것도 모른 채 밖만 쳐다보고 있는 호위무사를 바라보았다.

“매번 이리 속이고 거짓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호위무사님. 하지만 결코, 아버지께 혼쭐날 일은 없게 소녀가 잘, 속여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저하는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는데요?”

“정자나무 언덕.”

그때, 봉희의 남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봉희의 옷으로 완벽하게 변장을 한 소진을 바라보고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봉희한테 제대로 된 옷 한 벌 해준 적도 없는데…….”

그러자 소진이 그런 봉희 남편을 흘겨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라는 말도 모르니? 있을 때는 기방에, 투전판에 속만 썩여놓고는……!”

“그러게 너무…… 후회만 되는구나.”

“내가 봉희 꼭 찾을 것이니 너는 봉희가 다시 돌아오면 지금까지 못 해줬던 거 곱절로 잘해주어야 할 것이야. 알았니?”

“알았어……. 고마워, 정말 고맙다. 소진아.”

소진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점검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숙자와 함께 몰래 방을 나섰다.

호위무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집 뒤편으로 향했다.

“담 넘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루 이틀이야?”

“쇤네 꼭 잡으셔요, 아씨.”

소진은 숙자의 어깨를 짚으며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무사히 땅바닥 위에 착지하고는 숙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심하셔요, 아씨……!”

숙자의 걱정을 뒤로한 채 소진은 씩씩하게 저잣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헌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복면이 휘날리도록 정자나무 언덕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하아……, 하아…….”

이윽고 단숨에 정자나무 언덕까지 달려온 소진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헌은 아직인 듯싶었다.

소진은 분주히 숨을 내뱉으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다 비녀가 꽂힌 머리가 약간 헐거워진 느낌이 들어 손으로 뒷머리를 더듬거렸는데.

“어……!”

너무 급하게 달려오느라 쪽진 머리가 풀어진 것이었다.

반쯤 걸려있던 비녀가 툭, 떨어지고 동시에 그녀의 길고 풍성한 머리칼이 쏟아지듯 풀렸다.

“어, 어……?!”

소진이 풀어지는 머리를 황급히 손으로 감싸며 떨어진 비녀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았는데.

“……!”

헌이 소진의 떨어진 비녀를 주워 허리를 펴다, 그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놀란 소진이 손으로 감싸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고 손을 내렸는데.

그녀의 영롱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가슴 위로 부서지듯 흘러내렸다.

“어라? 오시었습니까, 저하?”

“아…….”

“비녀가 헐거웠던 모양이에요, 하하.”

헌의 눈동자에 머리를 곱게 풀어헤치고 생긋 웃는 소진의 모습이 담뿍 담겼다.

순간, 그의 심장이 발아래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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