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 서방, 내가 하겠소.
2021.01.18.
뜻밖의 말에 두 사내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보은군과 헌은 동시에 소진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낭자, 제가…….”
보은군이 대답하던 찰나, 헌이 그 말허리를 잘랐다.
“내가 하면 되겠네.”
“아?”
“그 서방, 내가 하겠소.”
헌은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을 홱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두 사내가 동시에 외쳤다.
헌은 보은군을 향해 거센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감히 어딜 나서냐고 말하는 듯했다.
숙자가 의아하다는 소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방님은 왜요, 아씨?”
그 물음에 두 사내도 왜 그것이 필요한지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소진을 바라보았다.
일단 서방이 필요하다니, 나서기는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제안을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편, 소진은 난감해졌다.
헌과 보은군, 둘 중 누구와 함께 이 일을 해야 할지.
그녀는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신중히 그 입술을 열었다.
“부부 행색을 하고 이 투전판에 잠입하려 하거든.”
부부라는 말에 헌과 보은군 두사람 다,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자 숙자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부부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여기 종이에 투전판이 열리는 장소가 그려져 있어.”
“지도가 그려져 있나요……?”
“응. 산속 깊은 곳에서 열리는 투전판이네. 하면 왜 멀쩡한 저잣거리를 두고 굳이 산속 깊은 곳에서 투전판을 벌이겠어?”
“……아.”
“또한, 투전판에서 돈을 잃은 자들만 골라서 이것을 주었다며.”
“예. 그랬습니다. 돈을 잃고 낙심한 자들에게만 은밀히 건네는 것을 쇤네가 똑똑히 보았어요.”
“투전판을 운영하는 자들이 어째서 돈을 잃은 자들을 불러 모으겠어?”
소진의 말에 숙자와 보은군, 그리고 헌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추리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돈을 잃고 투전판에서 패배한 자들만 이리 깊은 산속에서 모여…… 다시 투전을 한다라.”
“아…… 대충 감이 옵니다, 아씨!”
“처음에 소수의 돈으로 시작하겠지. 그러다 곡식, 세간살이…… 결국 마지막엔 무엇을 투전판에 걸겠느냐?”
“식솔들……이요?”
헌과 보은군의 미간이 순간, 홱 구겨졌다.
“그래. 너, 빚 때문에 제 여식들, 마누라까지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인간들 본 적 있지?”
“예…….”
“결국, 그들이 이런 종이를 나눠준 이유가 무엇이겠니?”
“사람도 돈 대신 받는다는……?”
“그래, 그거지. 게다가 마을에 사라진 여인들 대부분이 아녀자들이었어.”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눈빛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그리고 헌과 보은군도 숨죽인 채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돈이 없어 제 마누라를 데리고 투전판에 발걸음한 사내라면.”
“…….”
“그들에게 제1의 목표감이 되지 않겠느냐? 이왕 호랑이 굴에 들어간 거 호랑이라도 만나고 나와야지.”
소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보은군과 헌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두 사내를 훑는 그녀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해서…… 저와 함께 호랑이 굴에 들어갈 서방님을 누가 하시겠다고요?”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쳐들어갈 기세로 소진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헌이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보은군이 헌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오늘 네가 무지 거슬리는구나.’
헌은 짜증스럽게 혀를 쯧, 찼다.
“당연히?”
그러고는 보은군의 말꼬리를 잡으며 팔짱을 꼈다.
잠자코 소진을 바라보던 보은군이 헌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소인이 해야지요, 저하.”
“이유는.”
“그리 위험한 일에 어찌 저하께서 나서신단 말씀입니까.”
“…….”
“이건 백번을 물어도 백번 다, 소인이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보은군의 말에 소진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헌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조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싸늘한 웃음이 보은군의 얼굴이 굳었다.
“백번을 물어도 백번 다…… 네가 나선다?”
“예, 그리 대답하였습니다.”
“위험한 일이라서?”
“예.”
헌의 물음에 보은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내, 헌은 그 웃음기마저 지워내고서는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하니 내가 가야지.”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소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헌은 오로지 보은군만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점 싸늘해지는 헌의 눈빛을 소진이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에 어찌 나도 없이, 한 규수를 보낸단 말인가.”
“……저하.”
“한 규수는 지금 재간택에 오른 여인이다.”
“……!”
“행여 이번 일로 인해 한 규수가 위험해져 간택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뜻밖의 대답에 보은군은 말을 잃은 듯,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내 사람이니 내가 직접 지켜야지.”
“하오나 저하께서도…….”
“나의 안위는 내 호위대가 지켜줄 것이다.”
“…….”
“설마 내가 그곳에 맨몸으로 갈 것이라 생각하였느냐. 나 혼자도 아닌 한 규수와 함께인데.”
“예에…….”
“너는 출궁 준비로 정신이 없을 테니 이번 일은 내게 넘기거라.”
‘내 사람이니.’
‘한 규수와 함께인데.’
헌이 뱉은 말들이 소진의 귓가를 연신 맴돌았다.
진심이겠지, 소진은 말없이 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은군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가던 헌이 고개를 돌려 소진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모처럼 포개지는 순간이다.
헌이 소진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돈이 없어 마누라까지 팔아넘길 정도라면 양반은 아닐 테고.”
“…….”
“하면 낭자와 내가 평민 부부의 차림으로 그곳에 가야 할 것이니. 나는 뭐 지금 이 차림 그대로 가도 되지 싶은데.”
“그렇지요……?”
“이것도 한 번 입어본 내가 해야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소진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이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를 팍, 팍 드러내는 헌이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두 분 중, 한 분을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헌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을 뻗어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쥐었다.
“…….”
그를 올려다보는 소진의 눈빛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헌의 얼굴 위에 곱게 스며들었다.
그는 고운 미소를 머금은 채, 소진을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한데 선택할 자격, 없는데.”
“……예?”
“그리 위험한 곳에 나 없이 낭자만 못 보냅니다.”
“…….”
“아니면 오늘처럼 또 셋이서 우르르 몰려가던가.”
어쩐지 이미 부부가 된 듯한 두 사람의 잘 어울리는 모습에 보은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소진 낭자의 옆자리는 나의 것이었는데.’
소진을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헌을, 보은군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저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저런 눈빛으로 소진을 내려다보았었다.
그 자리를 헌에게 빼앗긴 것만 같아서 보은군의 마음이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았다.
“부부 연습 정도라 생각하지요.”
“……부부 연습이라니.”
헌의 말에 소진의 뺨이 발그레해지는 것 같았다.
이내 헌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 부부 연습이요.”
“아직…… 재간택에 오른 것뿐인데, 어찌…… 그리 경솔한…….”
소진은 쭈뼛쭈뼛 말을 이으며 슬쩍 헌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은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고개를 젖히고 있던 헌이 슬쩍 소진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어째 경솔하다 하십니까?”
미소가 번진 그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소진의 고개가 올라섰다.
“예?”
“부부 연습.”
“……?!”
“나도 언젠간 누군가와 부부가 될 거니까.”
‘누군가와’라는 말에 소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
당연히 자신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소진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뭐.”
“……?”
“그 누군가가 낭자였으면 더, 좋겠고.”
그 말을 뱉으며 헌이 보은군을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지.”
“아, 예. 저하.”
“더 지체했다가는 영의정 대감에게 낭자가 혼쭐이 날 수도 있으니.”
보은군은 소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녀를 차분하게 돌아보며 고갯짓을 해 보였다.
“서둘러 가시지요.”
“예, 대감.”
“하면…… 그곳은 저하와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은군은 씁쓸한 얼굴로 소진이 들고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예, 그리하여야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셔요. 저하께서 위험해지지 않도록 소녀가 곁에서 잘 보필할 테니.”
그녀의 말에 보은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누굴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예?!”
“다치지 마세요.”
보은군은 따뜻한 눈길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위험해지지도 마시고요.”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가만히 소진의 어깨를 감싸 쥐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조금도 위험해지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소진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그런 두 사람의 옆으로 헌이 나타났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쥐고 있던 보은군의 손을 툭, 툭 떼어내며 말했다.
“네가 없지만 내가 있다.”
“……아.”
“그러니 주제 넘는 걱정은, 넣어 두거라.”
싸늘한 말을 뱉어내는 헌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헌의 어깨를 툭, 툭 내려치며 가자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이내 뒤에서 따라오는 소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면 날짜와 장소를 정해 일러주시지요.”
“예, 저하.”
“이틀 뒤쯤 윤현을 보낼 터이니 시각과 장소가 적힌 밀서를 그자에게 건네주면 됩니다.”
“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
“어찌 나를 보자시는지.”
교태전에서는 중전과 영의정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중전은 굳은 얼굴로 영의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영의정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소진이가 재간택에 올랐다는 거.”
“…….”
“들으셨지요, 마마.”
중전이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일이 꼬였습니다. 세자가 나서 일을 그르쳤다 하던데.”
“……예. 생각지도 못한 전개라 소진이도, 그리고 안사람도 많이 당황해하고 있습니다.”
“한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한 규수가 간택에 오를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대감뿐만이 아니니.”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며 중전이 슬쩍 옆으로 돌아앉았다.
“나 역시 누구보다 한 규수의 탈락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마마.”
“해서 재간택 과제에 저 역시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영의정이 말없이 중전을 바라보았다.
자신만큼이나 소진의 재간택 소식에 가슴을 졸였을 그녀.
영의정은 이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대비가 홀로 과제를 만든다 하기에 나도 참여하겠다, 했습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삼간택까지는 절대.”
“…….”
“아니 됩니다.”
중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영의정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중전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은 중전마마만 믿고 있겠사옵니다.”
“과제가 결정되는 대로 김 상궁에게 일러 알려드릴 테니 기다리고 계시지요.”
얼마나 급했으면 대비전까지 찾아가 그런 승부를 보았을까.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의정의 눈길이 사나웠다.
말없이 허리를 굽히며 그가 교태전을 나섰다.
그러면서 교태전의 웅장한 자태를 돌아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자객의 실체는 아직인데……. 왜 하필 소진이었을까. 왜 하필 단 한 명만 잠입해…… 별채를 노린 것일까.’
교태전의 기와를 올려다보는 영의정의 시선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곤 깊이 한숨을 내쉬며 출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는데.
“……?”
교태전 깊숙이 돌아 들어가는 한 무리의 궁녀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누구지?”
자신의 눈에 익을 만한 궁녀는 없었다.
따로 눈여겨본 궁녀도 없을뿐더러, 상궁도 아닌 일개 궁녀를 그가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그의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봉희……댁?”
소진의 오랜 벗인 봉희의 얼굴이 그 순간 영의정의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서둘러 궁녀가 사라진 쪽을 돌아보았다.
결코, 이곳에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