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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것은 불륜이다. (31/125)

31. 이것은 불륜이다.

2021.01.15.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헌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곁에 선 보은군도 돌아보았다.

보은군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 역시 소진은 알지 못했다.

“저더러 어찌 도와달라 하십니까?”

괜스레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소진이 돌아섰다.

“이제 와 한눈파시려는 겁니까?”

헌의 목소리가 그녀를 다시금 돌려세웠다.

보은군도 지그시 헌을 응시했다.

“마음은 콩밭에 두고 몸만 오시겠다.”

웃음기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헌이 소진의 옆에 나란히 붙어 섰다.

“콩밭은 어디고 몸은 또 어딜 간단 말이야…….”

헌의 말에 소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보은군의 등을 떠밀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가요, 대감. 누가 세자 저하 알아볼까, 겁납니다.”

“예, 그러지요.”

그녀의 서두름에 보은군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결코, 웃을 수가 없었다.

‘선 연애, 후 혼인.’

자꾸만 보은군의 귓가에 헌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럴수록 보은군은 허탈해졌다.

소진을 바라보는 헌의 눈빛에 점점 진심이 담기고 있는 것 같았기에.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그의 감정을 자극한 것일까.

보은군은 슬쩍 헌을 돌아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제 곁에 서서 걷고 있는 소진의 안색도 살피게 됐다.

그렇다면 소진의 마음은 어떨지.

행여 헌의 뜨거운 직진이 초간택에서 떨어지겠다, 호언장담하던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건 아닐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보은군은 어지러운 마음으로 걷고 또 걸어야만 했다.

***

“여깁니다.”

“아, 이곳은.”

소진과 헌이 한 번 온 적 있는 곳, 왕실 사냥터였다.

소진이 이곳이 어디인지 아는 듯한 눈치에 보은군은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를…… 아십니까, 낭자?”

보은군의 물음에 소진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하께서 한번 데리고 와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화살을 만지작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헌이 그녀의 곁에 섰다.

“다음번에 올 때는 둘만 옵시다.”

“……예?”

“화살 쏘는 것을 가르쳐주기로 했으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소진은 희미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작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은군이 슬쩍 소진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곳에도 작은 연못가가 있는데, 혹 아십니까?”

보은군의 목소리에 헌이 휙, 고개를 돌렸다.

‘저놈이…… 또 수작을 부리려고.’

헌이 그를 거센 눈빛으로 응시했지만, 보은군은 오직 소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보은군은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우리 왜, 옛날에 이화산 가는 길목의 조그마한 연못 보면서 맨날 서로 어머니, 아버지께 혼났던 것들 푸념하곤 했었잖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진이 손뼉을 딱, 치며 환한 얼굴을 했다.

“아! 붕어가 있는 연못! 알다마다요. 울기도 많이 울고 거기서 주먹밥도 많이 먹었는데. 그렇지요?”

“그때 왜 낭자도 그랬고 나도 그랬잖습니까? 우리 훗날 커서 시집, 장가가면 꼭 집에 이런 연못 만들어 두고 살고 싶다고.”

“맞아. 혹, 그런 붕어가 살고 연꽃도 피어 있는 연못입니까?”

보은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쥐었다.

두 사람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헌은 어쩐지 두 사람의 추억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것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쉽사리 둘 사이를 끼어들지 못하고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예, 사냥을 나올 때마다 이 연못을 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낭자 생각을 했습니다.”

보은군의 다정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헌의 주먹에 힘이 들어섰다.

‘……그럴 때마다 한 규수를 떠올렸다고? 벗이라더니. 아주 정인을 대하는 듯하는구나?’

헌의 가슴은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보은군과 소진은 헌과는 다른 공간에 있는 듯,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쁠 것 같아요. 붕어도 있습니까?! 얼른 구경하고 싶어요.”

두 사람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어딘가로 향했다.

숙자는 헌의 눈치를 살피다, 황급히 소진의 뒤를 따랐다.

헌의 존재를 잊은 듯, 보은군과 소진은 서로 재잘거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헌은 어쩐지 서운한 얼굴을 하게 됐다.

그러다, 앞서 걷는 숙자를 낮게 불렀다.

“이보게.”

숙자는 화들짝 놀라며 속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에…… 저, 저하.”

“네 아씨, 보은군과 꽤 친한 모양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헌의 눈동자에는 섭섭함이 가득했다.

숙자는 그런 그를 힐끗, 올려다보고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친……하지요?”

애매한 그녀의 대답에 헌이 매섭게 눈을 내리떴다.

“다그치는 것이 아니니 알고 있는 대로 이야기하라.”

“……아, 그것이.”

“대체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친해야…… 훗날에 살게 될 집에 연못을 두자,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것인지. 내가 남녀 사이의 벗이라는 걸 둬본 적이 없어, 몰라 묻는 것이다.”

혼담이 오고 갔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가문끼리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둘이 정인이었다고 해도 어색할 것이 하나 없어 보였다.

헌의 물음에 숙자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다, 입을 열었다.

“뭐…… 아주 어릴 때부터 친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쇤네는 아씨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모시게 됐으니…… 그 전의 일은 듣기만 했고요.”

“해서 물론 혼담도 오갔겠지?”

이건 너무 민감한 질문이다.

숙자는 뜨끔한 얼굴로 황급히 입술을 닫았다.

섣불리 혀를 놀렸다가는 밥줄이 끊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헌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비식,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러곤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정을 보니 역시구나.”

“쇤네도 자세한 것은 모르옵니다. 한데 설마…… 혼담이 오갔는데 간택에 참여하셨겠습니까요. 이 무식한 쇤네도 그 정도는 아는데…….”

“남녀 사이에 벗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 그걸 어찌 제게.”

“네가 제일 가까이에서 저 둘의 사이를 보았을 것이 아닌가.”

“쇤네가……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말을 하다말고 숙자가 휙, 소진과 보은군을 돌아보았다.

헌 역시 그녀를 따라 두 사람을 사나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남녀 사이에 벗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진이 그녀를 불렀다.

“얘, 숙자야! 이것 좀 봐……!”

“예, 아씨!”

굳어가는 헌을 놔둔 채, 숙자가 도망치듯 소진에게 달려갔다.

홀로 남겨진 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곤 타오르는 눈빛으로 다정히 연못을 구경하고 있는 소진과 보은군을 바라보았다.

“역시…… 위험한 사이군. 말이 좋아 벗이지, 이건 불륜(不倫)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헌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이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이런 예리한 감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래. 정녕 불륜인 것이야.”

***

“중전마마, 안에…… 영의정 대감 들어 계시온데.”

“하면 예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고하여만 주시게.”

중전은 굳은 얼굴로 대전 상궁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대전 상궁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중전은 그런 그녀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배가 무거워 오래 못 서 있어, 그러네.”

“아, 하지만 아무도 들지 말라는…… 전하의…….”

“예까지 걸음을 옮긴 것만으로도 무리라는 거. 모르겠는가?”

대전 상궁을 훑는 중전의 눈빛이 거셌다.

상궁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하,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중전은 허리를 움켜쥐며 굳게 닫힌 대전 문을 응시했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부디, 오늘은 이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선위(禪位) 하겠다는 약조를 받아낼 수 있기를.

하지만 어쩐지 안에서는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중전마마 드셨…….”

상궁이 다시금 안에 있는 왕에게 중전이 들었다고 고하려는데.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였거늘! 어찌!”

갑작스럽게 날아든 왕의 호통에 중전의 입술이 구겨지고 말았다.

상궁은 중전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면 예서 더 기다리시겠사옵니까, 마마.”

그러자 중궁전 상궁인 김 상궁이 황급히 중전을 부축했다.

“마마,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그때, 대전 문이 열리고 영의정이 굳은 얼굴로 대전을 나섰다.

중전과 영의정의 시선이 부딪혔다.

“중전마마, 납시셨나이까.”

영의정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녀 역시 영의정을 향해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드릴 말씀이…….”

“내게요?”

“예. 전하께서는 몸이 조금 안 좋으시다고 지금 눈을 붙인다고 하시었습니다.”

영의정의 말에 중전은 구겨진 얼굴로 닫힌 대전 문을 바라보았다.

“내게만 언제나…… 이리 열기 어려운 문이지요.”

“…….”

“이 뱃속에 있는 아이가 벌써부터 불쌍해집니다, 대감.”

안에 있는 왕이 들으라는 듯 중전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대전 상궁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중전을 올려다보았다.

“마, 마마…….”

“중전이 되자마자 회임을 한 것이 복이라고 하더군요.”

“…….”

“그리 강녕하시던 전하께서 이리 옥체 미령해지실지 누가 알았겠느냐고.”

“마마. 우선 중궁전으로…….”

영의정이 다시금 중전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녀는 입술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이게 복입니까?!”

“……마마.”

“태어나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이.”

“……!”

“이것이 정녕 복이 맞는지…… 이젠 모르겠습니다.”

중전은 그렇게 말하며 세차게 돌아섰다.

영의정은 그런 중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중전은 어떻게 해서든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선위하겠다는 왕의 약조를 받아내려,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정신이 온전할 때는 얼굴도 쳐다보기 싫어하는 중전의 아이였으니,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 될 듯싶었다.

-우리 세자를 위해…… 그대의 여식을 왕실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시게.

영의정은 왕이 자신을 불러서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대전 문을 돌아보았다.

‘왕세자 자리는 하나, 하지만 거기에 오르려는 인물은 셋. 한데 내 여식을…… 쉬이 왕의 장자에게 줄 수는 없지.’

이렇게 혼란한 때, 한 명이라도 왕세자로서 자격을 박탈할 만한 흠이라도 보여준다면.

영의정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될 테였다.

그리고 그 흠을 웬만하면 지금의 세자인 헌이 보여주길 원했고.

영의정은 건조하게 헛기침을 뱉으며 중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래, 이제 쇠돌이에게 받아온 것을 내게 다오.”

연못가에 앉아 말없이 못을 내려다보던 소진이 무언가 생각난 듯, 숙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서로를 견제하며 그녀의 양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헌과 보은군이 소진을 응시했다.

“아,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아씨 말대로 알음알음, 듣기로는 여전히 그 작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합니다.”

숙자의 말에 헌의 미간이 구겨졌다.

“혹시 그…… 사채업자들?”

소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아 앞에 여전히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아예 자취를 감춘 건 아니다 싶어, 숙자에게 알아보라 시켰습니다.”

소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자 헌이 얼굴을 구기며 걱정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거처지를 옮겼다고 들었는데……. 나도 윤현에게 시켜 그들이 새로 옮긴 거처지를 찾아보라 시켰는데 감감무소식이긴 합니다만.”

“예. 거처지를 옮겨서 몰래 그 짓을 또 벌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숙자가 소진의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장을 고갯짓으로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쇠돌이가 어렵게 구한 것이래요.”

“그래?”

“아씨 말이 맞았어요. 노름판을 기웃거리면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 거랬잖아요? 해서 제가 쇠돌이랑 노름판이란 노름판은 죄다 돌아다녔거든요?”

“그런데?”

“근데 아씨가 예상한 대로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한테 웬 사내 하나가 이런 종이를 은밀히 나눠 주는 걸 보았거든요.”

“아……?”

“종이 좀 보자고 해도 죽어도 안 된다고 하길래……. 쇠돌이가 오늘 그 종이를 받은 사람한테 돈 주고 그거 샀대요. 아씨께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돈 아끼지 말고 죄다 갖고 오라고 하시어서.”

소진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그래, 잘하였다. 한데 이건…….”

헌과 보은군 역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쇤네는 글자를 모르니까……. 아무래도 돈을 빌려줄 테니 어디, 어디에서 돈을 빌리라는 말이 아닐까요?”

숙자의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서로를 응시하는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게 아니야.”

“……예? 하면.”

“노름하러 오라는 종이야.”

“어찌 돈도 없는 사람더러 노름판을 오라고…….”

“돈이 아닌 다른 것을 걸고.”

“예?!”

소진의 말에 숙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것들이 이제는 대놓고 인신매매를 하겠다?”

어쩌면 이것이 봉희를 찾는데 큰 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헌과 보은군도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소진은 두 남자를 단단한 눈길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분 중 한 분께서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

“하루만 저의 서방이 되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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