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한 규수의 정인이오. (28/125)

28. 한 규수의 정인이오.

2021.01.04.

“세자!”

중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서안을 내려쳤다.

그러자 밖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김 상궁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저하……! 지금 마마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어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상궁 따위가 끼어드느냐! 물러나지 못할까!”

헌은 중전을 가로막는 김 상궁을 향해 호통쳤다.

그러자 그녀는 파르르 떨며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내가 어디 네 윗전을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아.”

“감히 주제도 모르고 어딜 덤벼!”

그렇게 말하는 헌의 시선은 김 상궁의 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전에게 향해 있었다.

“송, 송구하옵니다…… 저하.”

“송구한 줄 알면 물러나라.”

그제야 김 상궁은 입술을 꾹 깨물며 빨개진 얼굴로 물러났다.

다시 헌과 중전, 둘만이 마주 보게 되었다.

수술을 쥐고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중전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헌은 그런 중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입술을 뗐다.

“이건 반칙이지 않습니까?”

딱딱한 얼굴과는 달리 한껏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그제야 중전이 고개를 들어 헌을 바라보았다.

“분명 제가 먼저 마마께 일렀을 텐데요?”

“무엇을.”

“한 규수에게 관심이 있다고.”

중전이 일전에 영의정 앞에서 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흥미를 한번 가져볼까 하는 여인이 하나 있기는 한데.

피식,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때를 떠올리는 듯한 중전의 얼굴에 헌은 이어 말했다.

“그때는 아무 말씀 않으셔 놓고 이리 뒤에서 낭자께 구애 행동을 펼치시는 건.”

“…….”

“반칙이지요.”

“구애 행동이라.”

“나를 좀 봐달라, 나도 너를 무척이나 원하고 있다…….”

“……!”

“어젯밤, 마마께서 한 규수에게 보인 행동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던데.”

중전은 기분 나쁘다는 듯 수술을 탁 내려놓으며 주먹을 쥐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만.”

“모르쇠로 밀어붙이시기로 하시었나 본데. 좋습니다. 그럼 듣기만 하시지요.”

“세자!”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

“영의정의 여식이 마마의 명줄을 쥐고 있다는 것, 이 궐에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하.”

“해서 한 규수가 덜컥, 세자빈이라도 될까 봐 겁이 나 그녀의 몸에 상처라도 내려 한 모양인데. 이번 일은 마마께서 경거망동하셨습니다.”

“대체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겝니까! 누가 누구의 몸에 상처를 내!”

“내가 먼저 알았으니 망정이지, 이 사실을 영의정이 알았더라면?”

“……!”

“지금 마마께서 무슨 고초를 겪고 계시었을까요?”

헌은 중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그녀는 속내를 보이며 파르르 떨었다.

“한시가 급해 사리 분별이 잘 안 되었던 모양인데. 이해합니다.”

“……그 입 다무세요.”

“내 입만 다물게 한다면 이번 일이 없던 일이 될 성싶습니까?”

“그만!”

“아니지……. 그전에 내가 입을 다물 것, 같습니까?”

헌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무지근한 시선이 중전의 파리하게 질린 얼굴 위로 떨어졌다.

비스듬히 사선으로 고개를 꺾은 헌이 그녀를 향해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한데 중전마마, 지금 마마께서 망각하고 계신 것이 하나 있으신 것 같은데.”

“…….”

“마마만큼이나 나 역시, 그 규수를 무척이나 원하고 있다는 것.”

“……!”

“그 마음이 마마보다 더하였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것.”

“……하.”

“하면 나의 시선이 언제나 향해 있는 곳이 어디일지…… 잘 생각해 보시지요.”

“세자, 그 입 닥치지 못합니까.”

“앞으로 한 번만 더 그 여인을 건들면 어찌 될지도요.”

헌은 그 말을 남기고서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중전이 싸늘하게 말문을 열었다.

“난 세자가 영의정의 권세가 두려워 그 규수를 곁에 두려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

“진심으로 은애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

“하……, 이를 어쩐담. 세자의 짠한 연모를 보니 이 어미의 마음이 아파지네요.”

헌의 고개가 천천히 중전을 향해 돌아갔다.

“부디 여기서 더, 깊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

“그 쓸데없는 연모의 감정. 결국, 독이 되어 세자를 찌를 것이니.”

중전은 헌에게 나가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며 자리에 누웠다.

헌은 반듯하게 서서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쥐고 중궁전에서 내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분기를 꾹꾹 참아내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곤 거칠게 말을 뱉어냈다.

“한 규수가 꽤 매력적인 여인이긴 하지요.”

그 말에 중전은 두 눈을 꾹 감았다.

속이 울렁거려 더는 헌을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얼굴도 예쁜데 그 성정 또한 곱고 아름답지요. 학식은 웬만한 사내 뺨칠 만큼 깊고 영민하니. 탐이 날 수밖에.”

“…….”

“한데 그런 여인을 진심이 아닌 장난으로 은애한다라……? 어허, 그리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치면.”

“……!”

“천벌 받습니다.”

그는 조소를 남기고서는 중궁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중전은 헌이 두고 간 푸른 수술을 냅다 던지며 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그깟 허드렛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 나에게 이런 모욕감을 줘?! 으아악! 김 상궁! 당장 조 대장을 불러오거라! ”

***

소진은 고심에 빠진 얼굴로 서찰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궐에서 보냈다던데……? 보은군 대감마님이 보내신 건 아닌 것 같았어요. 누구예요?”

숙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진을 응시했다.

“저하께서.”

간단한 그 말에 숙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리곤 서둘러 별채 창을 닫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저하께서 뭐래요?”

“…….”

“좀 보재요? 이젠 막 연서(戀書)까지 주고받는 사이십니까?”

그러자 소진은 다시금 서찰을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급한 것입니다. 정자나무 언덕에서 곧 뵙도록 하지요. -난봉꾼->

끝에 적힌 ‘난봉꾼’이라는 단어에 소진의 입가엔 피식, 미소가 터졌다.

아무래도 행여 누가 볼까, 자신을 난봉꾼으로 표현한 듯했다.

“왜 말없이 웃기만 하셔요……?”

“숙자야.”

“예?”

“오늘은 아무래도 호위무사와 함께 외출을 하여야겠지?”

“저하를…… 만나러 가실 것 아닙니까?”

“응,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소진은 생긋 웃으며 숙자에게 가까이 와보라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숙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에게 허릴 숙였다.

“지금 내가 이걸 써 줄 테니 네가 나 대신 정자나무 언덕으로 가 저하를 뵙고 와.”

“……쇤네가요?”

“응. 서찰만 전해주고 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돼.”

그러면서 소진은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숙자는 곁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쓰시는 거예요?”

“오늘은 호위무사와 함께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아버지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제 그런 일도 있었으니 행동도 더 조심하여야 하고.”

“……아. 그래서요?”

“내가 움직일 수 없으니 저하를 움직이게 해야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소진은 글씨를 빼곡하게 써 내려갔다.

***

“하면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꼭 이런 날…….”

“그러게요. 급히 봉희가 보자고 하여서. 바로 앞인 것을요. 염려 마세요.”

영의정은 소진의 말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못마땅한 얼굴로 뒷짐을 지며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봉희라는 그 아이. 양반도 아니라면서 어찌 그리 친하게 지내느냐?”

“어릴 때부터 친자매처럼 지내온 아이라서 그렇지요. 꼭 양반이어야만 친하게 지냅니까?”

소진이 슬그머니 영의정을 흘겨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자 영의정은 소진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호위무사를 슬쩍 돌아보며 헛기침했다.

그때, 최씨 부인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진에게 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건넸다.

“냅두세요. 그래도 참 심성이 곱고 착한 아이잖아요. 이거 봉희 갖다 주거라. 봉희가 좋아하는 걸로 챙겼어.”

“아…… 고맙습니다, 어머니.”

바구니 안을 내려다보니 정말 봉희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괜스레 그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데 어째 요새 통, 봉희가 보이지 않는구나?”

“집안일이 많은…… 모양이에요. 하면 속히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영의정은 최씨 부인과 달리 아무리 제 여식이지만 이럴 때마다 자신과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아,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잊지 말아라. 아직 어젯밤, 그 자객이 누군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잘 알고 있으니 호위무사까지 데리고 외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가자, 숙자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숙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진은 서둘러 호위무사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걸으며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호위무사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걸어오고 있었다.

“저하께 잘 전해주었지?”

소진이 소곤거리며 묻자, 숙자도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대답했다.

“예. 그저 시키는 대로 전해드리고만 왔습니다.”

소진은 헌에게 봉희의 집에 먼저 가 있으라 하였다.

지금쯤 헌이 그곳에 있을 것이었다.

호위무사의 눈을 피해 편히 이야기할 만한 곳으로 봉희의 집만 한 곳이 없을 것 같았기에.

소진은 걸음을 서두르며 막 골목에서 벗어나던 그때.

“낭자……!”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의 음성에 소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그녀의 시선이 향했다.

“어……? 보은군 대감?”

보은군이 환하게 웃으며 소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금 뵈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외출을 하는 모양입니다.”

“예……. 저 급히 어디 갈 데가 있어서요…….”

“잘 되었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예?”

“어젯밤, 그 자객은 어찌 되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영의정 대감께서 뭐 좀 알아낸 게 있으신가 여쭤보아야 할 것도 같아 속히 이리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아.”

소진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뒤에 서 있는 호위무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보은군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에 닿았다.

“이제 무사와 함께 다니시는 모양입니다. 잘하셨습니다.”

“한데 제가 지금은 누구를 만나러 가야 해서…….”

“같이 가지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린다……고요?”

“예. 낭자를 만나러 나온 것이라 딱히 갈 곳도 없고. 아, 그리고 낭자께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요.”

보은군은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그 웃음에는 기분 좋은 기대감도 부풀어 있는 것 같았다.

그 환한 웃음을 소진은 애써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하께서 급히 할 말이 있다고 하였으니 잠깐이면 되겠지……?’

소진은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젠 얼굴 한 번 보기도 힘이 드네…….”

헌은 헛기침하며 못마땅하다는 듯, 소진이 일러준 봉희의 집 앞에 섰다.

“한데 사람이 살긴 사는 곳인가.”

인적이 끊긴 폐가 같은 집 안을 들여다보며 헌이 중얼거렸다.

“소신이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럴 것 없다. 한 규수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였으니…… 위험한 곳은 아닐 것이다.”

인기척이라도 들려야 ‘이리 오너라.’ 소리라도 해 볼 텐데.

집안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윤현은 그런 헌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물음을 던졌다.

“한데 저하……. 간밤의 자객이 중궁전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한 규수께 알릴 것입니까?”

그의 은밀한 음성에 헌의 입가에 낮은 미소가 번졌다.

“그 좋은 패를 쥐고서 왜 안 써먹어. 그러자고 급히 보자고 한 것인데.”

“……좋은 패요?”

“한 규수도 알아야지. 제 아비를 뒷배로 두고 움직이는 중궁전이 어쩌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한 규수에게만 넌지시 알릴 것이다.”

“…….”

“영민한 여인이니 중궁전의 실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인지 버려야 할 사람인지도 쉽게 분간할 것이고.”

헌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의정에게…… 말하지 않을까요?”

윤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은 한 규수의 몫이지. 알릴 것인가, 홀로 알고 있다가 나처럼 좋은 패로 써먹을 것인가는.”

이내 헌은 소진이 제게 보낸 서찰을 다시금 펼쳐 보았다.

<오늘부터 호위무사를 대동해 움직여야 할 것 같아,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서 제 벗의 집에서 뵐까 하는데. 아래 약도를 따라가면 조봉희의 집이 나올 것입니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하면 제가 서둘러 뒤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벗의 남편에게는 봉희를 찾기 위해 저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라 소개하시면 됩니다.>

그때, 봉희의 남편이 지친 낯빛으로 방을 나섰다.

헌은 더욱이 갓을 눌러쓰며 너울 뒤로 얼굴을 감추었다.

그러자 봉희의 남편과 헌의 시선이 부딪혔다.

“뉘신지요……?”

행여 봉희의 실종과 관련된 인물일까 싶어, 봉희 남편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여기가 조봉희 댁이 맞소.”

그의 말에 봉희 남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맞습니다! 제 안 사람인데! 어찌……!”

“한 규수…… 아, 그러니까. 한소진 규수의…….”

“소진이?”

그녀가 일러준 대로 그쪽 안사람을 찾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 소개를 하려던 찰나, 저 멀리서 소진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헌은 행여 그녀의 호위무사가 자신을 발견할까, 서둘러 마당으로 들어서며 입술을 뗐는데.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뜻밖의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

또다시, 보은군이었다.

‘왜 또 네가 한 규수의 옆에 있는 것이냐.’

순간 보은군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오는 소진의 모습에 그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소진이랑 아는 사입니까?”

안에서는 봉희 남편이 영문도 모른 채, 제 집 안으로 뛰어든 헌을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자 헌은 딱 달라붙어 나란히 걸어오는 소진과 보은군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나는 한 규수의…….”

“……?”

“정인이오.”

그것은 쓸데없는 이에게 뱉어버린 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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