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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그 여인, 안 건드렸으면 좋겠는데. (27/125)

27. 그 여인, 안 건드렸으면 좋겠는데.

2021.01.01.

“소진 낭자가 많이 놀랐을 텐데…….”

처소로 돌아온 보은군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곁에 앉아 있던 환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보은군이 환관의 목소리에 지그시 눈을 떴다.

까마득한 천장만 말없이 올려다보던 보은군이 몸을 일으켰다.

“마마, 불을 켤까요?” 

“아니. 괜찮다.”

보은군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점점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궐을 떠나실 생각을 하니 많이 심란하신 것이지요?”

“응……?”

“오늘 유독 한숨을 많이 내쉬는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보은군은 피식, 웃으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보은군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서렸다.

“섭섭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하구나.”

“…….”

“언제나 떠나고 싶었던 궐이었으니. 하지만 어머니를 이 궐에 홀로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마마께서는 잘 지내실 것이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지금처럼…….”

보은군은 환관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비가 왜 갑작스럽게 자신의 출궁을 결정했는지, 그 속마음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과 세자에게 있어 중립의 태도를 보이던 대비였다.

대비는 세자와 보은군이 어렸을 때부터 둘을 똑같이 아끼고 위했다.

그녀에게 있어 두 손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쪽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런 둘이 권력 다툼에 휘말리는 것을 가장 경계했고 두려워했다.

그랬기에 대비는 왕이 헌을 세자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는 일찌감치 그를 왕세자에 책봉했다.

그리고 보은군을 서열 2위의 계승자로서 세자인 헌을 충실히 보필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대비는 더욱 냉정하게 헌과 보은군의 위치를 명확하게 해 조금의 분란도 생기지 않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왕자가 둘이나 있었어도 그들을 앞세운 치열한 권력 다툼은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세자 헌을 몰아내려는 세력이 스멀스멀 나타났다.

그것은 왕의 심기를 거스르기에도 충분했고, 세자인 헌을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이제 헌과 보은군 모두 머리가 굵어졌으니, 자신에게 붙는 그 세력들을 권력 다툼에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대비는 그것을 막고자 보은군을 일찌감치 출궁시키려는 듯했다.

거기에 영의정까지 대놓고 야욕을 비추고 있으니 대비 입장에서는 속이 더 탈 수밖에.

이러다 영의정이 덜컥 보은군의 손을 잡고 제 여식을 보은군과 혼례라도 치르게 한다면 평화롭던 궐 안에 피바람이 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보은군은 자신과 헌을 아끼는 대비의 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잘 견뎌내실 수 있겠지?”

“소용 마마께서는 강하신 분입니다. 하니, 걱정 마십시오.”

“김 내관은 궐을 떠나 나와 함께 사가에서 지내는 것이 싫지 않은가?”

“싫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신은 마마를 보필하고 곁을 지키는 것이 평생의 일인 것을요.”

그렇게 말하며 환관이 피식 웃었다.

보은군도 그를 따라 느리게 호선을 그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김 내관.”

“예, 마마.”

“……나는 이 궐을 떠날 때면.”

“…….”

“당연히 소진 낭자와 혼례를 치른 후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

“한데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변수가 내게 생긴 것 같아…… 어쩌면 더 마음이 착잡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조금은 마음이 아픈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소진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간절히 원해도 때로는 이루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

“…….”

“욕심은 나지만…… 차마 내 욕심으로 그 사람을 다치게 할까, 이 마음을 먹는 것조차 두렵구나.”

소진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보은군은 곧 눈을 감은 채 자리에 누웠다.

그러곤 제게 가까이에 닿았던 그녀의 곱고도 아리따운 얼굴을 떠올리며 아픈 마음을 달랬다.

“김 내관.”

“예, 마마.”

“오늘 내가 부탁한 것, 빠른 시일 내에 알아봐 줄 수 있겠는가.”

“여부가 있겠나이까.”

푸른 수술이 달린 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는 검집이었다.

감히 소진을 노린 자가 누구인지, 보은군은 속히 알아내야만 했다.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윤현은 어두운 얼굴로 동궁에 들어섰다.

“저하, 소신이옵니다.”

막 환복을 하고 강습을 위해 걸음을 떼려던 헌은 주위를 물렸다.

“들라.”

그러자 헌의 수발을 들던 궁인들이 물러가고 윤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헌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한 규수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 규수’라는 말에 헌의 손이 멈칫했다.

이제 그에게 소진은 예민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말하여라.”

윤현을 돌아보는 헌의 눈빛이 형형했다.

“간밤에 웬 자객이 영의정의 사가에 잠입했습니다.”

“……뭐라? 자객?”

“다행히 한 규수께서 다친 곳은 없어 보였습니다.”

순간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다행……? 다치지 않았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 송구하옵니다, 저하.”

“감히 간택에 참가하는 여인의 사가에 자객이 잠입한 것이다. 나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이지.”

헌은 무언가 심상찮은 낌새가 느껴져 눈살을 찌푸렸다.

한양 최고 실세인 영의정의 여식을 누가 노린 것일까.

그녀를 건드릴 만한 세력을 얼추 생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벗의 실종과 관련 있다는 인물들이었다.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안 그들이 소진에게 더는 나서지 말아라, 경고를 주기 위해 벌인 일일까.

하지만 그들이 고작 경고를 주기 위해 넘기에는 영의정의 담벼락은 너무도 높고 위험했다.

그런데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담을 넘었다니,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헌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딱히 여러 명은 아니었던 것 같고 한 명이 안으로 들어 한 규수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합니다.”

“그래서.”

“때마침 보은군이 그 앞을 지나다 자객이 들어서는 걸 발견하고는 한 규수를 구하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보은군이?”

짜증스럽다는 듯 헌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소진과 보은군 사이에 끊어지지 않는 연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필 그 시각, 보은군이 영의정 사가 앞을 지나다 그것을 발견할 건 또 무엇일까.

“보은군이 그 늦은 시간에 어찌 궐이 아닌 밖에 있었지?”

“보은군께서 출궁 명을 받으셨사옵니다. 거처지가 정해져 둘러보고 오던 길에 벌어진 일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잠시 내가 궐에 소홀하던 사이…… 많은 일이 있었군. 대비마마의 명이신가? 아니면 아바마마?”

“대비전에서 명이 떨어진 것으로 아옵니다.”

아무래도 헌을 위협할 만한 인물을 애초에 치워버리려는 심산인 듯싶었다.

헌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다, 눈빛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해서 그 자객들의 정체는.”

“…….”

“당연히 밝혔겠지?”

윤현을 돌아보며 묻는 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이…….”

“밝히지 못했다면 이 길로 돌아가 당장 그 자객의 정체를 알아낸 뒤 다시 고하라.”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자객이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니.”

그는 화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휙 등을 돌렸다.

재간택을 앞둔 여인의 집에 잠입한 무사.

게다가 지난 몇 해 동안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영의정의 사가를 침입했다.

이것은 누군가를 향한 경고였을까.

아니면 정말 누군가를 해치려 한 살수였을까.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헌의 뒤로 윤현이 다시금 다가왔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헌은 반색하며 뒤를 돌았다.

그런데 윤현의 낯빛이 어두웠다.

“누구인데……?”

***

“아무래도 재간택이라 시험 내용이 초간택과 달리 많이 어렵군요.”

한편 영의정의 사가에서는 간택 수업을 지도하는 상궁과 마주 앉은 소진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었다.

“이건 실수를 할 수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애매한…… 내용들이네요?”

예상 시험 내용을 받아들고서 소진은 한참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초간택은 주로 관찰 위주의 시험이었다면 재간택부터는 거기서 한층 더 심화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예…….”

“규수들의 성정과 인품, 그리고 자라온 환경 모두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해서 요리…… 바느질 솜씨, 질의응답, 그리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주어지는 무작위 과제까지.”

소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 없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볼에 잔뜩 바람을 넣은 채, 상궁이 가져온 예상 시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무조건 서툴게, 또 무조건 실수를 남발하기에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부러 그러는 것이 다 보일 텐데요.”

“예, 이번 재간택에 선발된 인원은 총 일곱 명입니다. 거기서 보이지 않게 실수를 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요.”

“예.”

“그러니 이번 간택은 전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상궁도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도 이번 간택이 쉽지만은 않을 거란 빛이 감돌았다.

“한데 재간택 하루 만에 이 모든 과제를 다 치러야 합니까?”

“모두 따로 보지는 않고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과제를 대비마마께서 직접 고르실 것입니다.”

“요리와 바느질 실력 모두를요……?”

“예, 이번 간택은 예전과 달리 난이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요리라는 말에 소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쓸었다.

바느질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소진이었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실수를 연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비마마께서는 완벽한 실력을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

“물론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더욱 신경 쓰실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한데 저는 바느질이라면 그런대로 괜찮은데…….”

“…….”

“요리는 영 꽝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멋쩍은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상궁도 피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씨께서 재간택에 오른 다른 규수들보다 특출나게 요리 실력이 낮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미비한 차이일 것입니다.”

“……아.”

“다른 규수들 역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아랫것들이 차려주는 밥상만 받아 보았을 테니까요.”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럴 것 같았다.

소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햇살이 내리 쬐는 창밖을 응시했다.

“첩첩산중이네요…….”

“영의정 대감의 여식이시니…… 재간택까지는 당연히 오르실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비책이…… 있으신 게지요?”

“비책이라시면.”

“제가…… 최종 간택에서 떨어질 비책, 말입니다.”

“전적으로 아씨께 달려있겠지요? 하지만 소인이 곁에서 성심껏 도울 것입니다. 그리 해 달란 대감마님의 명도 계셨고요.”

“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소진이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때, 문밖에서 숙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씨…….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응?”

“서찰 하나가 급히 당도했습니다.”

서찰이라는 말에 소진의 눈이 번뜩였고, 상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내일 다시 뵙도록 하지요. 오늘은 우선 제가 가져온 예상 질문부터 파악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마마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상궁이 곧 별채를 나섰고 숙자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곤 서찰 하나를 건네주며 상궁이 별채를 나선 것을 확인하고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가 보낸 것인데.”

“……궐에서 왔습니다?”

“궐?”

‘궐’이라는 말에 소진은 서둘러 서찰을 펼쳐 들었다.

***

“중전마마, 세자 저하 드셨사옵니다.”

중궁전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세자’라는 말이 퍼졌다.

곧 닫힌 문 너머에서 중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뫼시거라.”

헌은 저벅저벅 중궁전 안으로 들어섰고, 중전이 부른 배를 움켜쥐고서는 새초롬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세자?”

“…….”

“내게 문안 인사를 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중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헌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순간에도 헌의 날카로운 시선은 중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입니다?”

“할 말만 있어 보입니까?”

헌은 여유 있게 중전의 말을 받아쳤다.

배를 살살 쓸던 그녀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표정 좀 푸시지요, 세자. 세자의 그 험악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교에 안 좋을 것 같습니다만.”

“태교를 그리 생각하시는 분이 그딴 비겁한 짓을 벌이셨습니까?”

“뭐라?”

“뱃속에 있는 내 아우가 화들짝 놀랐겠습니다, 제 어미의 추악한 성정을 보고는.”

“세자! 말을 좀 가려서…….”

“그러기 전에 중전마마께서 먼저.”

“……!”

“행동을 가려서 하셨어야지요.”

그는 중전의 말을 가로채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곤 당황해하는 그녀 앞에 그것을 내놓았다.

“이건…… 왜.”

어젯밤, 영의정 사가를 습격했던 자객의 검에 달렸다던 푸른색의 수술.

헌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조금 전보다 더 긴장한 얼굴을 하는 중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여인.”

“……!”

“더는 안 건드렸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헌의 얼굴에 짙은 조소가 깔렸다.

“간택이 끝나기 전까지 몸이 근질근질해 가만히 있기가 어려우시겠다면.”

“……?!”

“아바마마께 고해 어디 요양이라도 보내드릴까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깊은 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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