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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나도 사내입니다. (26/125)

26. 나도 사내입니다.

2020.12.28.

한편, 동궁에서는 헌이 침소의대를 갈아입고서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의 빗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아무래도 중궁전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말에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윤현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한 규수의 사라진 벗 때문에 그러십니까?”

“정말 중궁전의 궁인 중에 한 규수의 벗이 있는 거라면 결코, 쉬이 넘겨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헌이 굳은 얼굴로 윤현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정식으로 선발한 궁인이 아닌…… 일반 아녀자들을 납치해 궐에 데려다 놓는 것이니 더욱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을 하던 헌이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났다.

“어쩌면 말이다. 이것이 내게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겠구나.”

“기회라시면.”

“중궁전을 칠 기회.”

하염없이 땅을 적시고 있던 빗방울을 내려다보던 헌이 빙그르르 돌아섰다.

그러곤 창을 닫으라는 듯 윤현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중궁전 모르게 궐내의 모든 궁인의 출입을 감시하고, 하루아침에 궁인이 대거 바뀌는 처소가 있으면 곧바로 내게 고하여라.”

“예, 저하.”

헌의 목소리는 은밀했다.

“또한, 도성을 빠져나가는 이들을 지금보다 더욱 경계하고 면밀히 살펴야 할 것 같으니 도성문의 경비를 지금보다 더 강화하고 수상한 이는 무조건 의금부로 압송하도록 하여라.”

“…….”

“청국을 오가는 상인과 백성들을 더욱 감시하며. 당분간 청국행 배가 당도하는 시각과 그 배에 오르는 이들의 명단도 빠짐없이 적어 내게 고하고.”

“…….” 

“이 궐에서는 쥐새끼 한 마리도 내 눈을 피해 한양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그의 눈빛이 어둠을 갈랐다.

차갑고도 냉철한 그의 본모습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나, 저하. 그렇게 하면 아마 반발하는 이들도 나올 것입니다.”

“…….”

“지금껏 아무 문제 없이 도성을 오가던 이들과 아무런 제지 없이 청국을 오가던 상인들도 번거로운 절차에 불만을 토로할 것이 염려됩니다.”

윤현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헌의 입매가 비식, 비틀렸다.

마치 그것은 바라던 바라는 듯 그의 얼굴이 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럼 그자가 한 규수 벗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겠군.”

“……아.”

“덫을 놓으려는 것이다.”

“……!”

“물론 물샐 틈을 막으려는 것도 있고.”

헌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붉은빛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상태로 헌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재간택에 한 규수의 이름이 올랐으니 중궁전을 더욱이 감시하라.”

“중궁전을요…….”

“한 규수의 재간택을 영의정만큼이나 경계하고 질색하는 이는 중궁전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규수의 간택을 방해할 것이지. 중궁전이 일을 꾸미면 꾸미는 대로 내게 고하여라.”

이미 중전과 영의정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 헌은 여유 있게 웃었다.

어쩌면 소진이 재간택에 오르리라는 것 또한 예상하였을지도 모른다.

“한데 한 규수께서…… 정녕 세자빈이 되실 수 있을까요? 저하께서는 한 규수가 세자빈이 되길 바라고 계신 것이지요?”

윤현이 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젖혔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세자빈이 되길 바라지.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게 세자빈이 되도록 내버려 둘 가문이 아니다.”

“…….”

“하지만 손 놓고 운명을 받아들이기에는.”

헌의 굵은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그 여인이 너무도 탐이 나는구나. 절대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여전히 그는 여유가 있었다.

***

“앗……!”

소진은 자신의 입술을 틀어막고 있는 사내를 세차게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사내를 엎어치기라도 할 요량으로 그의 팔을 힘껏 잡아당겼는데.

“접니다, 낭자……!”

익숙한 목소리에 소진의 손이 멈추었다.

“대감……?”

보은군이 더욱이 그녀를 감싸 안은 채 조용히 하라 눈짓을 해 보였다.

그때, 문밖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소진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보은군의 손을 조심스럽게 치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나타난 보은군도.

그리고 문밖을 서성이는 정체 모를 저 검은 그림자도.

모두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소진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보은군이 이곳에서 제 입을 틀어막은 건…….

‘저 문밖의 그림자는 위험한 인물이야!’

소진은 떨어뜨렸던 은장도를 소리 나지 않게 주워 입술을 악물었다.

감히 영의정 사가의 담을 함부로 넘는다니,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영의정이 경호를 소홀히 한 틈을 타, 자객이 든 것 같았다.

가히 영의정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를 위협하려는 세력은 그간 없었다.

그런데 자객이라니.

그것도 영의정의 하나뿐인 여식을 해치려고 하다니.

“쉿.”

이번에는 소진이 보은군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보은군은 그녀의 손목을 꼭 움켜쥔 채 불안한 시선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점점 문 앞으로 다가왔고, 소진은 먼저 그를 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데 그 순간 별채 밖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숙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구머니나! 누가 아씨 신발을 이렇게 던져놨대?! 또 도둑고양이가 든 모양인가?!”

숙자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당황한 듯 그림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

소진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박차고 나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객을 향해 은장도를 휘둘렀다.

“윽!”

“여기 있네, 도둑고양이……!”

그녀가 휘두른 칼에 팔을 스친 자객은 팔을 감싼 채,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악! 아씨!”

자객은 순식간에 숙자를 밀치고는 별채 밖으로 뛰어갔고 소진은 그 뒤를 놓치지 않고 따랐다.

보은군도 자객을 잡기 위해 돌진했다.

소진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집안사람 모두가 깰 수 있도록 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불!”

그러자 어두컴컴하던 집안에 불이 켜지고 놀란 하인들과 듬성듬성 집 안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보은군의 뒤를 따르고 있던 호위무사들도 순식간에 자객의 뒤를 쫓았다.

“대감마님! 마님!”

영의정과 최 씨 부인도 잠에서 깨, 헐레벌떡 안채에서 뛰어나왔다.

아수라장이 된 마당을 내려다보며 영의정은 소진부터 찾았다.

“소진이! 소진이를 보호하여라……!”

하지만 소진은 이미 담을 넘어 사라진 자객의 뒤를 보은군과 그의 무사들과 함께 부지런히 따르고 있었다.

“나 한소진을 뭐로 보고 고작 날 처리하러 한 명만 쳐들어온 것이야?!”

“낭자! 아무래도 저잣거리로 몸을 숨기려는 모양인데 제가 반대편으로 가겠습니다……! 너희는 낭자와 함께 저자를 쫓아라!”

모두가 잠든 저잣거리.

세 사람의 불같은 추격전이 시작되었고, 소진은 이를 악물고서는 자객의 뒤를 따랐다.

‘푸른빛의 수술이 달린 검을 쥔 인물이라……!’

달아나는 자객과의 거리가 꽤 멀어 그의 차림새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진은 부지런히 그 뒤를 쫓으며 자객의 차림새를 살폈다.

역시 보은군의 예상대로 저잣거리에 몸을 숨기려는 듯 자객은 빠른 속도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소진이 더 뒤를 따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소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더 쫓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보은군의 호위무사들이 그 뒤를 쫓고 있으니 운이 좋으면 자객을 잡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때, 반대편으로 사라졌던 보은군이 허탈한 얼굴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대감……!”

“낭자, 다친 곳은 없지요?”

“없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진은 보은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대체 저 자객은 무엇이고, 하필 그때 궐에 있어야 할 보은군이 어찌 알고 이곳까지 온 것인지.

보은군을 올려다보는 소진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보은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짚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영의정 대감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

***

“뭐라……? 자객이 담을 뛰어넘는 것을 보았다니요?!”

한밤중의 날벼락을 맞은 듯, 영의정의 사가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영의정과 최 씨 부인은 혼이 나간 얼굴로 보은군을 응시했다.

“예.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제 호위무사들과 함께 담을 넘었습니다. 속히 대문을 두드려 대감과 낭자를 깨워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였지만.”

“…….”

“그자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몰래 담을 넘었습니다. 그 자객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기에.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소진이가 이리 무사하지 않습니까?”

영의정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곁에 앉은 소진을 돌아보았다.

원래 혼인을 치르고 나서 출궁하기로 하였던 보은군은 돌연, 왕세자의 국혼이 치러지기 전 궐을 나가 살라는 대비의 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궐 밖에서 지낼 집도 둘러보고 벗들도 만나 한참 담소를 나눈 보은군이 느지막하게 환궁하던 길.

우연히 영의정의 사가 앞을 지나다 수상쩍은 사내 하나가 담벼락 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본 것이었다.

곧장 담을 넘은 자객이 향한 곳은 영의정이 있는 안채도, 곡식이 채워진 곳간도 아닌 소진이 머무르는 별채였다.

영의정 사가의 위치를 잘 아는 보은군은 그보다 빨리 소진의 별채로 향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안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한데 왜 소진이를 노린 것일까.”

영의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소진 역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자신을 해칠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무사들이 저잣거리를 헤집고 다니니, 생포하여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은군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자코 고개만 숙이고 있던 소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입술을 달싹였다.

“푸른색의 수술이 달린 검집이었습니다.”

“……뭐?”

“키는 보은군 대감과 비슷했고요, 덩치는 아버지와 비슷하였어요.”

“……!”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띠에도 청색의 문양이 언뜻언뜻 보였습니다. 제가 은장도를 휘둘러 오른팔에 상처를 냈고요. 혹, 이것으로 어디 소속 자객인지 알 수 있을까요?”

소진의 얼굴은 심각했다.

처음 보는 그녀의 진지하고도 심각한 얼굴에 영의정은 눈썹을 구겼다.

“너……. 그걸 어떻게 다 보았느냐?”

“예……?”

“오늘은 안개까지 껴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육안으로 파악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달리는 자객의 차림새를 어떻게 보았지?”

“아, 그것이.”

“게다가 네가 어떻게 그 자객의 팔에 상처를 냈고……?”

차마 그 뒤를 바짝 쫓으며 살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영의정은 소진이 웬만한 사내보다 빨리 달린다는 사실도, 또한 검술에 능하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난감해진 소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옆에 앉아 있는 보은군을 돌아보았다.

“대, 대감께서 알려주셨어요. 그렇지요?”

“아? 예. 제가 그 뒤를 바짝…… 쫓았거든요.”

“그리고 은장도는…… 뭐, 어쩌다 보니까. 하하하. 제가 휘두른 칼에 베일 정도면 참으로 멍청한 무사인가 봐요.”

조금 싸해진 분위기를 환기시켜 보려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보은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의정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시각이 많이 지체되어 속히 환궁해 보아야겠습니다. 저 또한, 무사들을 시켜 그 자객이 소속된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라 할 테니 염려 마시고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데, 오늘 일은 함구하여 주심이…….”

영의정은 어렵사리 말문을 꺼내고 있었다.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보은군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영의정도 그리고 최 씨 부인도 그를 따라 허리를 굽혀 보였고 소진은 말없이 그의 곁에 붙어 섰다.

“보은군 대감 배웅은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홀로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소진의 말에 보은군이 사양했지만, 그녀는 할 말이 있는 듯 눈을 연신 깜빡여 보였다.

“대문 앞까지만요. 그래도 오늘 큰 은혜를 주셨는데 홀로 가시게 두는 것은 예가 아닌 듯싶사옵니다.”

영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의 말에 동의했다.

“하면 네가 마마 배웅해드리고 오거라.”

“예, 아버지.”

***

“낭자…….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얼른 들어가 주무시지요.”

대문을 나선 소진은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 그의 곁을 부지런히 따랐다.

“저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못된 놈을 잡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요.”

소진의 호위무사와 보은군의 무사들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뒤를 비호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뒤를 따르는 무사들을 돌아보고는 목소리를 은밀히 낮추었다.

“한데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봉희의 실종과 관련된 자들이 보낸 자객 같습니다.”

“아.”

소진의 말에 보은군은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팔을 속히 잡아끌었다.

순간, 소진과 팔이 닿은 보은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멈추지 말고 걸으시면서 들으셔요. 괜히 무사들이 보면 심각한 이야기 하는 줄 알 거 아니어요. 제 호위무사에게 들키면 안 됩니다.”

보은군의 심장은 널을 뛰듯 쿵쿵대고 있었지만, 소진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 사실이 괜스레 그의 심장을 시큰하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자들인 것 같아요.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보아도 그놈들밖에 없습니다. 아주 파렴치한 인간들.”

“그렇다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제가 일부러 집안을 더 뒤집어 놓지 않았습니까? 자기 때문에 영의정의 사가가 발칵 뒤집혔으니 호랑이 심장이 아니고서는 다신 얼씬도 않을 것입니다.”

소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쥐어 보였다.

그 순간에도 보은군은 소진과 닿은 팔이 신경 쓰여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무사들을 이끌고 가보아야겠어요.”

“위험합니다. 제가 동행할까요?”

“아니요. 아주 우락부락한 무사들과 함께 갈 것입니다.”

“꼭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러다 무사들이 눈치채고 영의정 대감께 말하면요?”

“경고 차원에서지요. 딱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소녀가 장정들과 그들 앞만 스쳐 지나가도.”

“…….”

“아! 영의정 여식이 눈치를 챘구나! 역시 똑똑한 여인이야. 더는 건드려서는 안 되겠어, 하지 않겠습니까?”

“풉.”

그 사내들을 따라 하는 모양인 듯,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사내처럼 굵은 목소리를 내는 소진의 모습에 보은군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소진이 보은군을 홱 돌아보았다.

“왜 웃으셔요?”

“그냥요.”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아니요. 아주 맞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도 보은군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자꾸만 입꼬리가 실실거리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어……? 왜 자꾸 웃지?”

“흠, 흠흠.”

소진은 슬금슬금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헤실거리는 보은군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러곤 그의 앞을 턱, 막아서서는 팔짱을 꼈다.

“이상한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말해보시지요? 예?”

그러면서 소진이 까치발을 들어 보은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순간, 아찔하게 가까워진 두 사람의 얼굴.

보은군은 훅 들어온 그녀의 숨결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

하지만 그녀는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그 위험한 거리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신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해보시래도요?!”

그때 보은군은 그녀의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따스하게 움켜쥐었다.

“……!”

그제야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감.”

어쩐지 그녀를 내려다보는 보은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갔다.

“나야말로 호랑이 심장이 아닙니다.”

“……예?”

“이리 낭자께서 갑자기 훅, 다가오면…….”

무어라 말을 하려던 보은군은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가오면요?”

소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던 보은군은 슬쩍 그녀를 품에서 놓으며 빙긋, 미소를 그렸다.

그러곤 뒷짐을 진 채 빙그르르 돌아, 그녀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나도 사내입니다.”

“예?”

“참지 못하는 것이 생기면 이제는 참지 않을 겁니다.”

보은군은 소진을 향해 휘휘, 손을 흔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좋은 꿈 꾸세요, 낭자.”

홀로 남겨진 소진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 보은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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