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영의정을 장인으로 두어라. (25/125)

25. 영의정을 장인으로 두어라.

2020.12.25.

헌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소진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더뎌졌다.

숙자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소진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궐에서 뭘 언제 어떻게 만나자는 말씀이실까요?”

그녀의 말에 소진은 헌이 돌아서기 전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궐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 용모화를 완성해 보는 것으로 하지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상세한 이야기는 빼놓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서는 돌아섰던 헌.

하지만 소진은 그것보다 그 사내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헌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모두 지난 일이라 용서하고 묻기로 한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난날, 자신을 기방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제 멱살을 쥐고 흔들던 헌의 눈빛은 너무도 매섭고 거칠었다.

꼭, 그날의 범인을 찾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데 왜 좀 전에 그 사내를 보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분명 처음 본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자신과 무관한 사람을 응시하던 표정이었다.

고도의 심리전일까?

왕세자인 자신을 해치려 한 사람이니 쉬쉬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얘, 숙자야.”

홀로 고심에 빠졌던 소진이 고개를 들어 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름에 숙자가 얼굴을 들었다.

“너는 널 곤경에 처하게 하고 목숨까지 앗으려 했던 사람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 막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보듯이 모르는 척을 한다거나.”

“아니요?! 그걸 가만히 둬요? 냅다 달려가 멱살을 쥐고 흔들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렇지? 아니면 이미 네게 용서를 구하고 너도 마음에 남은 감정이 없다면?”

“에이, 그래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이라면…… 용서도 안 될 뿐더러, 용서를 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숙자의 말에 소진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소진은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눈앞에 떠오르는 어둠 속의 두 얼굴은 선명하기만 했다.

아무리 일 년 전의 일이고 황급히 달아나는 이를 본 것이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었기에 뇌리에 명확하게 박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 텐데…….”

양반집 자제인 듯한 젊은 도령과 앳된 얼굴의 아녀자.

어쩌면 두 남녀는 그때 막 혼례를 올린 신혼부부일 수도 있었다.

소진은 이상하게 가슴이 뻐근해져 오는 것 같아, 미간을 구겼다.

“한데 그건 왜요?”

숙자가 굳어지는 그녀의 안색에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소진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차라리 그 얼굴은 모르는 이를 응시하던 사람의 것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동요도 없던 표정.

설마…….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야?”

집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소진은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았다.

그녀의 황망한 시선이 닿은 곳은 지금쯤 헌이 들었을, 궐이었다.

***

“전하, 세자 저하 납시셨나이다.”

“들라.”

환궁하자마자 헌은 대전으로 향했다.

굳게 닫혔던 대전 문이 열리고 마른기침을 하는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의 곁에는 군주의 모습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커다란 경대가 놓여 있었다.

“아바마마.”

헌은 성큼성큼 왕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건조한 얼굴로 경대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던 왕이 스르륵 고개를 돌려 헌을 바라보았다.

헌에게 닿은 왕의 시선이 처연하기만 했다.

“활인서를 다녀오는 길이냐.”

“예, 아바마마. 옥체는 좀 어떠십니까.”

“괜찮다.”

곧 헌은 왕에게 활인서에서 비리를 저지른 의원들의 명단이 적힌 종이를 올렸다.

그것을 받아든 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펼쳤다.

하얀 종이에 빼곡히 적힌 검은 색의 이름들.

“이리…… 활개를 치고 있었단 말이지.”

왕의 얼굴에 씁쓸함이 느리게 번져갔다.

헌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용안을 올려다보았다.

수척해진 왕의 얼굴에서 더는 위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나라의 왕이기 전에 제 아비이기도 한 그가 하루가 다르게 나약해져 가는 모습에 헌은 마음이 아파 왔다.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몸이 아픈 나를 대신해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니옵니다. 응당 소자가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왕은 그리 말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헌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혼몽하던 때, 또다시 자신이 세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고 했다.

세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경멸하던 중전 신 씨의 태중 아이를 원자라 칭했다고도 하였다.

상선을 통해 헌에게 또 몹쓸 말을 했다는 것을 안 왕은 좌절하고 말았다.

왕은 이제 자신에게 원망조차 하지 않는 헌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헌에게 향했던 시선을 접으며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경대를 돌아보았다.

그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왕의 시선은 생경하기만 했다.

“아바마마…….”

“어느 것이 진짜 내 모습일까.”

“…….”

“지금 내가 보는 이 얼굴이 진짜 나의 것일까. 아니면 이 속에 또 다른 누가 들어 있는 것일까.”

“……”

“아니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내가 아닌 것일까. 하면 내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낯선 이를 바라보며 묻듯 왕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경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짙게 묻어났다.

순간 왕을 올려다보는 헌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바마마, 마음 굳건히 잡수시옵소서. 어의가 아바마마께서 곧 병세를 털고 쾌차하실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나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

“이 속에 악귀가 들어 있는 것이야. 악귀가…….”

그러곤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악한 귀신이 육신에 빌붙어 온전한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나날이 정신이 쇠약해져 가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국무당을 불러 굿이라도 해 이 몸에 기생충처럼 붙어 있는 악귀를 쫓아내고만 싶었다.

하지만 군주라는 이유로.

체통을 지켜야만 한다는 까닭으로 의서(醫書)에 쓰여 있지도 않은 이 해괴한 병을 탕약으로만 다스리려니 증세가 나아지기는커녕 나날이 악해지기만 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고 있으니,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이 궐 안의 모든 이들이 예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헌아.”

왕은 넋이 나간 얼굴로 경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헌이 다섯 살 때 이후로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제 이름이었다.

헌은 조금 놀란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고 건강하고 맑은 안색으로 불러주던 그 이름.

헌의 가슴이 일순, 뜨거워졌다.

“내 이 몸에서 악귀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증세가 더 악화되기 전에 너에게 선위(禪位)를 해줄까 한다.”

“아바마마……! 아직은 너무 이르옵니다! 선위라니요!”

선위라는 말에 상선 역시 안타까운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아닌 이 속에 든 또 다른 내가 세자인 너를…….”

“…….”

“너를…….”

말을 잇기 괴로운 듯 왕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떨었다.

“힘드시면 더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사옵니다. 소자 물러갈 터이니 편히 쉬…….”

“내 손으로 폐위시킬까…… 그것이 무척 두렵구나.”

헌이 서둘러 말하며 물러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왕이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그 음성 끝은 두려움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바마마…….”

“정신이 나갔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상선에게 묻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

“혹 내가 너를 폐위시켰느냐는 물음이다.”

“……아.”

“왕의 말은 번복할 수도 또한, 실언이라며 덮을 수도 없어 거스를 수 없는 물과 같다고 하였다.”

“예, 아바마마”

“하니 또 언제 어느 때 이 몸에, 악귀가 나를 삼키고 나타나 나의 얼굴을 하고…… 내 목소리를 내며 너를 폐위하라 명할지도 모르니.”

“…….”

“차라리 정신이 온전할 때 너에게 선위를 할까, 한다.”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왕, 이국은 총명하고 영민하였으며 그 기상이 범과도 같이 매섭고 강인하던 왕이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 조선을 아끼고 백성을 위하던 성군이었기에 그가 이토록 이른 선위를 입에 담는 것은 충신들과 세자를 안타깝게 하기에 충분했다.

헌은 이대로 왕을, 제 아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 그 병마를 모두 씻어내고 다시 온전한 모습을 되찾으시어.”

“…….”

“조선을 호령하고 다시금 백성을 보듬으실 수 있도록 소자가 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하니, 선위라는 말은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고개를 조아리며 차가운 대전 바닥을 짚는 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익선관의 무게마저 그에게서 벗겨진다면 그는 완전히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조선의 왕이기에.

해서 백성과 세자, 그리고 제 사람들을 지켜야 했기에.

어쩌면 왕은 조금만 더, 하루만 더. 

그렇게 애쓰고 용을 쓰며 그가 말하는 악귀와 맞서 싸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헌의 생모인 숙원 조 씨의 죽음부터 이미 엉켜버린 실타래였을까.

고개를 조아린 헌의 얼굴이 비통함으로 일그러졌다.

“혼신의 힘이라…….”

헌의 대답을 곱씹던 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영의정의 여식이…… 사주단자를 올렸다지.”

“예?”

“영의정을 장인으로 두어라.”

“……!”

“하면 내게, 그리고 네게도 큰 힘이 될 것이야.”

“아바마마.”

“그것보다 더한 힘은…… 없을 것이니.”

***

밤이 깊어지자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소진은 창을 활짝 열고서 비에 젖은 화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재간택이라…….”

자신이 결국, 재간택에 오르고야 말았다.

어머니는 걱정에 몸져누우셨고 아버지인 영의정은 온종일 못마땅한 듯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별채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종이와 먹을 한가득 품에 안은 숙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씨.”

“어머니, 아버지는 주무시지?”

“예. 몰래 가지고 오느라 혼났네요.”

“우리도 서둘러 그리고 잠자리에 들자꾸나.”

“에고, 추워요. 아씨. 내일부터 다시 간택 수업을 열심히 들으셔야 하니 고뿔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셔야지요.”

숙자가 창을 닫으며 차가워진 소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해서 아까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나 봅니다.”

“…….”

“다짜고짜 궐에서 보자는……. 고새 활인서 안에서 소식을 전해 들으셨나 봐요.”

“이러다 나. 정말 세자빈이라도 되는 거 아니야?”

소진이 희미한 웃음기를 입가에 매단 채, 종이를 펼쳐 들었다.

“세자빈이…… 되고 싶어진 건 아니고요?”

“뭐?”

“난봉꾼에 호색한이라고 소문만 났지……. 겪어보니 아주 성실하고 멋있는 분이시던데.”

“그래도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저리 싫어하시니.”

“…….”

“나는 다시 내일부터 재간택에서 떨어지기 위해 열심히 수업을 들어야겠지?”

소진은 빙긋 웃으며 붓을 잡았다.

헌이 내어준 용모화 과제를 하기 위해 몰래 종이를 펼쳐 들었는데.

막상 그림을 그리려 헌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붓을 꼭 쥐었던 소진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붓이 툭 쓰러졌다.

“아씨?”

소진의 미간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설마 머리를 심하게 다쳐 안면 인식 장애라도 생긴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디 상한 곳 없이 멀쩡하다 못해 아주 건강한 신체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던 세자였다.

“하…… 진짜 뭐지. 그럼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소진은 찜찜하다는 얼굴로 다시금 창을 휙 열었다.

“아까부터 계속 혼잣말로 뭐라 하시는 거예요?”

“머릿속이 너무 뒤죽박죽이구나.”

“재간택…… 때문에요?”

“뭐. 그렇기도 하고.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차라도 내어 올까요? 아씨 걱정거리 있으면 잘 못 주무시잖아요.”

“……그래야 하나.”

“내일 아침 일찍 강습 있다 하였으니 일찍 주무셔야 해요. 가만있어 보세요. 제가 얼른 차 달여 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숙자가 후다닥 별채를 나섰다.

소진은 닫히는 별채 문을 바라보며 다시금 붓을 쥐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보다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봉희였다.

해이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소진은 붓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눈을 꼭 감고서는 낮에 보았던 헌의 얼굴을 떠올렸다.

“……잘 빚은 떡같이 이마는 봉긋했어. 그리고 그 아래에 짙은 눈썹은 꼭 붓으로 반듯하게 칠한 것 마냥 곧고 까맣고.”

차근차근 헌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눈, 코, 입.

잘난 그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다 소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내 실력으로 그리기에는 너무 잘난 얼굴이잖아.”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가 가르쳐준 대로 손에 힘을 주고 얼굴 형태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낮에 활인서에서 그렸을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힘 있는 선이 그어졌다.

“후우…….”

처음 활을 쥘 때처럼 소진은 신중, 또 신중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때, 빗소리만 분주히 들려오던 창밖에서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가 들렸다.

벌써 숙자가 온 것일까, 소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창을 응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문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자니?”

“…….”

“뛰어갔다 온 것이야?”

아무런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문밖에서 들려오는 심상찮은 소리에 소진은 그제야 붓을 내려놓았다.

소진의 부름에도 문밖은 조용했다.

아니, 일부러 기척을 내지 않고서 누군가 숨어든 듯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소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문 앞에 숨어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서둘러 발소리를 죽이며 품에 있던 은장도를 꺼냈다.

‘……분명 문밖에 누군가가 있어.’

숨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그녀는 몸을 낮추고서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먼저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해 소진이 빠르게 손을 뻗었는데.

“앗……!”

“쉿!”

예상치 못한 인물이 소진의 몸을 감싸 안고서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소진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은장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 위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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