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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난봉꾼의 청혼?! (22/125)

22. 난봉꾼의 청혼?!

2020.12.14.

-아씨가 의원님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내로 만들어 달래요……!

아이의 작고 은밀한 목소리가 소진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약초를 평상 위에 곱게 펼치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행복한 사내로 만들어 달라고……? 그 말은 뭐야. 색시가 되어 달란 말……이야?”

소진은 홀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만지작만지작했다.

아이의 말을 곱씹어보는 그녀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난봉꾼이 여인을 홀리려면 무슨 말이야 못하겠느냐만은 정인도 아닌 색시가 되어 달란 말을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라 그녀는 자꾸만 아이의 말을 곱씹어보게 됐다.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며 소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숙자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자꾸 중얼거리세요?”

“청혼……인 것일까?”

“예?”

“난봉꾼들이 원래 색시가 되어 달란 말을 입에 달고 사니?”

소진이 얼얼한 얼굴로 숙자를 돌아보았다.

숙자는 그 말에 한 건 잡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눈을 반짝였다.

“저하께서 청혼을 하신 겝니까? 일 났네, 일 났어……!”

“그저 농 삼아, 하신 말씀이야. 일 날 거 없어.”

“누가 그런 농을 합니까? 내 정인이 되어 달라는 건 헛소리로 지껄이는 걸 봤어도 청혼은……. 게다가 이 나라 왕세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런 농담을요?”

“…….”

“아무리 난봉꾼이니 뭐니 소문이 좋지 않아도 설마 그런 것으로 장난을 치시겠습니까?”

숙자가 흥분할수록 소진의 가슴도 널을 뛰는 듯 울렁거렸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서부터 번져갔다.

소진은 심각한 얼굴로 땅바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아니, 진짜 그럼 나를 은애하시는 것인가.”

“아이고. 우리 안방마님, 대감마님 아시면 거품 물고 졸도하시겠네.”

“설마, 그때부터?”

이내 그녀는 자신의 양 뺨을 감싸며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기생 복장을 하고 온천장에 빠졌던 그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모습을 보고 반한 것일까?

아니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안아 들었을 때?

홀로 깊은 생각에 빠진 소진은 헌과 마주쳤던 지난날의 장면들을 헤집어 보았다.

“아……! 그때구나!”

소진은 손뼉을 치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선 헤엄쳐 호수를 빠져나왔을 때.

자신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헌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때 반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수줍게 눈을 내리뜨며 못 살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숙자는 소진이 왜 이러나,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긴, 이 미모에…… 활까지 잘 쏘고 말타기도 잘하는데 검술도 잘해. 게다가 헤엄까지 잘 치니,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니? 반하지 않고 버틸 사내가 있을까?”

“아씨, 그건 좀 위험한 발언 같은데요?”

“뭐……?”

“제가 보기에는 저하께서 매우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숙자의 말에 소진이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내가 뭐, 어디가 어때서.”

“얼굴은 그 정도면 한양에서 내로라하긴 한다지만, 멋있음은…… 썩.”

“…….”

“보통 여인네들에게서는 멋있음을 찾을 수 없잖아요? 예를 들어, 수를 잘 놓는다던가, 옷을 잘 짓는다던가…… 꽃꽂이를 잘한다던가.”

“…….”

“하다못해 차를 다소곳하게 잘 달이신다던가요. 보통 그런 어여쁜 모습에 반해 추파를 던지지만……. 사내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멋있는 모습에 반할 사내가 어디 흔한가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건지.

소진은 숙자의 옆구리를 쿡, 쿡, 찌르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사람 속 뒤집지 말고 너는 얼른 가서 말릴 약초나 더 받아와.”

“아씨는 꼭 쇤네가 맞는 말만 하면 이러시더라?”

숙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총총총 사라졌다.

“누굴 닮아 저리 똑 부러지는지. 하긴 뭐…… 늘 곁에서 보고 듣는 사람이 나니까. 날 닮아 똑똑해질 수밖에?”

소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금 약재를 평상 위에 곱게 펼쳤다.

햇볕이 따뜻하니 반나절만 놔둬도 금방 마를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약초의 달콤쌉싸름한 향이 그녀의 코끝에 머물렀다.

소진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햇살이 강렬해서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때, 커다란 구름이라도 나타나 해님을 살며시 가린 듯 짙은 그늘이 생겼다.

그녀는 구겼던 얼굴을 반듯하게 펴, 고개를 더욱 하늘 위로 젖혔다.

“음……. 좋다. 약초 냄새.”

바람도 그리고 햇살도 모든 것이 기분 좋을 만큼 적당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소진의 얼굴 위로 보드라운 햇살만큼이나 포근한 미소가 번졌다.

“햇볕도 좋고…… 바람도 참 좋구나.”

그러다 이리 좋은 날, 봉희가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볕이 이리 따스할 때면 같이 들꽃도 뜯고 그네도 타곤 했는데……. 대체 봉희, 넌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중얼거리는 그녀의 음성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런데, 눈앞에는 의외의 얼굴이 서 있었다.

***

“낭자가…… 재간택에 올랐다고?”

소진의 재간택 소식을 환관에게 전해 들은 보은군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야금을 손에서 놓았다.

소진이 제일 좋아하는 가야금 곡조를 연습하고 있던 그의 손끝이 떨렸다.

가야금 위로 툭, 떨어지는 보은군의 시선이 처연하기만 했다.

“예. 재간택 날짜가 곧 정해질 것이라 합니다.”

분명 초간택에서 떨어지겠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왜, 소진이 재간택에 올랐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소진에게 뛰쳐 가 일의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다.

아니, 영의정에게 달려가 그녀의 간택을 막아달라 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궐, 제일 구석에 갇혀 가야금이나 뜯고 있어야 하는 신세라니.

왕위 계승 서열 2위라서 겪어야만 하는 서러움과 서글픔은 언제나 이렇게 느닷없이 보은군을 덮쳤다.

그러나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괴로움이었다.

세자의 아우라서.

계승 서열 2위의 서자라서 그간 견뎌야 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왕위에 대한 욕심도 또한, 형인 세자를 넘어서겠다는 욕망도 없었기에 그는 때때로 자신을 덮치는 서글픈 현실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그에게 양보하고 내어준다고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슴에 금이 간 듯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소진 낭자가 왜. 재간택에…….”

“자세한 이야기는 소신도 모르옵니다. 다만, 처소 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어머니께서는……?”

소진이 세자빈의 유력 후보로 다가갈수록 보은군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입지 또한 흔들릴 것이었다.

하지만 보은군은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제 곁에 두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그런 것에 소진을 이용하기에는 제 마음이 그녀에게 너무도 진심이었으니까.

“별다른 연통이 없으십니다. 워낙…… 강건하신 분이니.”

보은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빼곡히 늘어선 나무들을 내려다보았다.

망연자실해 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관은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재간택이니…… 너무 상심해 마옵소서, 마마.”

“겨우 재간택이 아니지 않느냐.”

“…….”

“그러다 삼간택까지 오른다면.”

“…….”

“그러다 결국…… 낭자가 세자빈이 되신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것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듯, 그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졌다.

“홀로 마음에 품는 것도 그때는 죄가 되지 않겠느냐.”

“……마마.”

“늘 낭자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

그의 말에 환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보은군이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의 곁을 지켜온 환관이었다.

그랬기에 넓은 궐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 하나 없던 보은군에게 그는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말동무였다.

환관은 소진을 향한 보은군의 진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잘 알았다.

“언제나 이 마음은 낭자와 같지 않았다.”

그래서 소진이 재간택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만큼이나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그 마음이 같지 않다고 하여, 나는 한 번도 내 마음을, 그리고 낭자의 마음을 탓한 적 없었다.”

“…….”

“그런데 그런 낭자께서 저하의 사람이 되신다면……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보은군의 뺨이 옅게 떨렸다.

“그때는 내 마음을, 또한 낭자의 마음을…… 탓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아무리 가라앉는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자꾸만 한숨이 터져 나왔고 자꾸만 현실이 야속했다.

그는 괴로움에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아…….”

헌이 뒷짐을 진 채, 그녀의 앞에 서서는 소진을 향해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주고 있었다.

“벗이 많이 그리우신가 봅니다.”

“아무래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요.”

헌은 그녀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그녀가 가지고 온 화구통을 꺼내 보였다.

슬픔으로 가라앉았던 그녀의 눈빛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이것은.”

“벗을 찾아야지요.”

“아.”

“용모화 그리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애써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궐에서 보았다는 것만 확실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궐 안의 궁녀를 함부로 내치거나 어딘가로 보낼 수 없으니 오히려 다른 곳도 아니고 궐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영영 찾지 못할 벗이라 생각하였는데 헌이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희망의 빛이 스미는 듯했다.

소진은 다시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와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화구 통에서 종이와 먹을 꺼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헌도 자신의 앞에 종이를 반듯하게 펼쳐 먹을 갈았다.

“우선은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는 것으로 합시다.”

“서로의 얼굴이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데도 여러 가지 기술이 있고 갖가지 방법이 있으니까요.”

“……아.”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지면 머릿속에만 떠다니는 얼굴도 쉽게 종이에 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헌의 말에 소진은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희의 얼굴을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보며 소진은 속으로 다짐했다.

‘네 얼굴을 이 종이에 꼭 담아내어 볼게.’

붓을 바짝 쥔 소진의 눈동자가 불같이 타올랐다.

“사람의 얼굴은 그 형태부터 제각기입니다.”

“예.”

헌은 자연스럽게 벗을 쥐고는 소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코입을 훑는 그의 시선이 눅진하기만 했다.

괜스레 그의 적나라한 시선이 부끄러워 소진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낭자의 얼굴은 꼭 달걀처럼 동그랗고 갸름합니다.”

“아…….”

그렇게 말하며 헌은 하얀 종이 위에 달걀 같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소진이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핏, 웃음을 터뜨렸다.

“제 얼굴이 그리 동그랍니까?”

그녀의 웃음에 헌도 희미하게 미소를 그리며 종이 위의 달걀같이 그려 놓은 소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보름달처럼 동그랗지는 않습니다. 낭자의 얼굴형은 갸름하니 예쁘거든요.”

“아.”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은 황급히 붓을 움직였다.

“저하의 얼굴은 이렇습니다.”

그러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그려보겠다며 열심히 그의 얼굴을 살피며 손을 움직였다.

한데 새하얀 종이 위에 실수 없이 한 번 만에 선을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글씨를 써 내려갈 때와는 다른 긴장감에 그녀는 선뜻 붓을 종이 위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소진의 모습을 바라보던 헌이 나지막이 미소를 띤 얼굴로 손을 뻗었다.

순간, 헌의 커다란 손이 예고 없이 불쑥 다가섰다.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헌은 손이 그녀의 작은 손등을 폭, 감쌌다.

허공에서 파르르 떨기만 하던 그녀의 손이 헌의 손아래에 감기자 안정을 찾은 듯, 떨림이 멎었다.

“힘을 빼고 그리고 싶은 대로 손을 움직여보시지요.”

“……아.”

“어차피 이미 종이 위에 붓이 내려앉은 상태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미 그녀의 붓은 종이 위에 떨어진 채였다.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듯 소진은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며 손을 움직였다.

힘을 뺀 채, 손을 움직이자 헌이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주었다.

대신 그 붓이 흔들리지 않게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쥔 채로.

“아……?”

완벽하게 선과 선 끝을 이었다 생각하였는데 손을 떼고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헌의 얼굴이라고 그린 선은 삐죽삐죽 날카롭기만 했다.

“이것이…… 제 얼굴입니까?”

헌은 실소를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하, 하하하. 이리 형편없지 않은데……. 송구하옵니다.”

자신이 그려 놓고도 웃긴지 소진은 풉 웃음을 터뜨리다,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렇지요? 나름 내 턱선이…… 날카롭기는 하지만 이리…… 찌그러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헌은 자신의 턱을 멋쩍게 쓸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 막 그렇게 찌그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소진은 피식거리며 다시금 새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제가 혼자 해보겠습니다. 선과 선을 잇는 것조차 이리 어려울 줄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새 종이를 꺼냈다.

그러곤 반듯하게 펼치며 종이를 고정하기 위해 문진(文鎭)을 꺼내던 그 순간…….

“어어……?!”

종이가 바람에 휙, 날아가 버렸다.

소진은 자신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는 종이를 잡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앗!”

마침 헌도 종이를 잡기 위해 소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소진의 뺨을 스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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