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재간택 명단이 발표되다. (20/125)

20. 재간택 명단이 발표되다.

2020.12.07.

곧 그는 뒷짐을 진 채 소진을 한 번, 바쁜 활인서 안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활인서 안을 고갯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활인서요?”

소진의 시선이 그의 턱짓을 따라 움직였다.

“일손이 모자라던 참이었는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소진이 되묻자 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목을 지그시 잡았다.

“낭자께서 나를 도와 활인서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용모화 그리는 법을 가르쳐줄지, 말지 정하도록 하지요.”

“예?! 소인은 반드시 배워야 하는데…….”

“낭자께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나의 재능을 배우는 것이니 그에 따른 값을 지불하여야 한다고.”

“…….”

“하니 나 역시, 그것을 낭자에게 가르쳐줄지, 말지는 내 마음 아니겠습니까?”

딱딱한 헌의 말에 소진은 할 말을 잃은 듯 볼에 바람을 가득 채워 부풀렸다.

그러곤 난감하다는 듯이 다시금 활인서 안을 살펴보았다.

저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정식 의원도 아니니 함부로 환자들을 돌볼 수는 없을 것이고…….

허드렛일이라도 도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헌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아.”

소진은 얼결에 헌을 따라 활인서 안으로 들어섰다.

숙자 역시 소진의 뒤를 서둘러 따랐다.

헌은 그녀에게 가리개 치마와 복면을 건네주며 자신을 따라오라 눈짓을 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복면을 쓰고서 소진은 헌의 뒤를 따랐다.

활인서 안에는 환자와 의원들로 가득했고,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헌은 환관들에게 무언가 지시하며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소진은 멀뚱히 헌의 뒤에 서서 활인서 안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소문대로 환자들과 난민들이 넘쳐났다.

몇 해 전 돌았던 전염병과 기근 때문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많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 때문에 활인서에는 환자가 끊이질 않는다며 아버지께서 대신들과 나누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야기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활인서에 와 환자를 돌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 같았다.

“의원 나리! 제 여식 좀 살려주셔요. 며칠째 죽 한 모금도 못 먹었습니다.”

그때, 웬 허름한 차림의 남자 한 명이 헌의 옷자락을 휙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놀란 환관들과 의원들이 서둘러 그를 제지했다.

아무래도 활인서 안의 환자들은 헌이 세자인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왕이 약재와 함께 보낸 젊은 의원인 줄 아는 듯했다.

하지만 헌은 괜찮다는 듯 주위를 물리며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곤 그 사내와 눈을 맞추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막 쌀이 당도하였으니 쌀죽을 끓여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더러운 손을 뿌리치며 옷자락을 털어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소진은 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무엇부터 하면 될까요?”

용모화 그리는 법을 배우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성들의 어려운 모습을 보니 소진의 가슴이 뜨겁게 끓는 것 같았다.

헌은 그런 소진을 돌아보며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그녀는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헌이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쌀죽을 끓일까요? 어머니께서 쑤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머뭇거렸던 모습을 지워낸 채 소진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숙자가 슬그머니 소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볼멘소리를 했다.

“진짜 어깨너머로 보기만 하시었잖아요……. 죽 다 태워 먹을 일 있으셔요, 아씨? 어쩌자고 죽을 쑤시겠다고……. 차라리 저랑 비질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소진은 숙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헌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난감해하는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낮은 웃음이 소진의 양 뺨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하면 낭자께서 죽을 좀 끓여주시겠습니까?”

“예! 할 수 있습니다.”

“조금 태우는 것은 괜찮으나 홀라당 태워 먹으면 아니 됩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주 귀한 쌀죽이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열의를 보이며 두리번거리는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잡았다.

곁에 있던 환관과 호위무사들은 왕세자가 스스럼없이 대하는 이 여인이 누군가 싶어, 유심히 소진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라, 소진이 영의정의 여식인 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헌은 소진을 데리고 활인서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른 아낙네들이 솥 앞에 붙어 서서는 죽을 쑤고 있었다.

“이곳에서 끓이시면 됩니다. 쌀과 물은 여기에 있고요.”

헌이 소진에게 이것저것을 알려주며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양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헌이 손목을 놓아주면 솥으로 달려가 죽을 끓일 기세였다.

어쩐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헌은 자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면…… 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소인만 믿으십시오.”

딱히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려는 그 모습이 예뻐 보이기는 하였다.

헌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러자 예상대로 소진은 쪼르르 솥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귀한 반가의 규수라 죽은커녕 물 한 방울도 손에 묻힌 적 없을 테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지금 백성들을 위한 죽을 끓여보겠다고 손수 옷까지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었다.

영의정의 여식이라 곱게 자라기만 하였으니 이런 궂은일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자신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는 소진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곳에 쌀이 있다고…….”

그때, 끈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듯 그녀의 앞치마는 곧 흘러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허리에 걸쳐져 있었다.

“아, 잠시.”

헌은 손을 뻗어 소진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곤 흠칫 놀라며 멈춰선 소진의 허리춤에 걸쳐진 앞치마를 잡았다.

“……!”

순식간에 훅, 들어온 그의 손에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느슨하게 풀렸던 앞치마가 조여졌다.

이내 헌은 능숙하게 그녀의 앞치마 끈을 매듭지었다.

언뜻언뜻 허리춤에 그의 손끝이 닿자 소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옷 버리니 앞치마를 꼭 하셔야 합니다.”

“아…… 예.”

소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상찮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숙자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는 둘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또한, 죽을 쑤던 다른 아낙네들도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진을 젊은 의원 나리의 정인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진은 숨까지 죽이고서는 자신의 등 뒤에서 끈을 묶는 그에게 집중했다.

“한데…… 이런 것도 하실 줄 아십니까?”

조선에서 그 누구보다 고귀하게 자랐을 왕세자인데.

헤엄도 칠 줄 알고 앞치마 끈도 묶을 줄 아는 것이 참 의외다 싶었다.

그때, 매듭을 모두 묶은 헌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소진은 헌의 손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 안 사람에게 사랑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누가요?”

헌이 어릴 때, 자신의 아버지인 왕은 헌의 생모인 숙원 조 씨를 살뜰히 아끼고 은애하였다.

해서 매번 그녀의 옷고름을 손수 묶어주기도 하고 토끼풀을 뜯어 매듭을 지어 꽃 가락지를 만들어 끼워주기도 했다.

그런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헌은 이런 매듭짓는 것쯤이야, 거뜬한 일이었다.

소진의 물음에 헌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소진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여인의 마음을 잘 아는 분이 해주신 말씀 같습니다.”

“…….”

“하지만 선비님의 안 사람이 되실 분은 이런 앞치마를 맬 일이 없을 테니. 선비님의 이런 자상한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제가 다 아쉽습니다.”

소진은 그렇게 말하며 헌에게서 물러났다.

그러곤 죽을 끓이기 위해, 걸음을 막 뗐는데.

“아쉬울 것 없습니다.”

“……?”

“안 사람에게 보이고 싶던 자상한 모습, 방금 보여준 것 같으니.”

그 말을 남긴 채 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소진이 멍한 얼굴로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안 사람에게 보이고 싶던 자상한 모습을…… 방금 보였다고?”

휘적휘적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던 소진의 곁으로 숙자가 쪼르르 달려왔다.

“대체 두 분, 제가 모르는 사이에 뭔 일이라도 있으셨대요?”

“……뭐?”

“세자 저하, 아니, 이 선비님의 눈에서 아주 꿀이 떨어집니다요?”

소진은 또 숙자가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 생각하며 눈만 흘겼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조용히 하고 나를 얼른 돕기나 해. 쌀이 어디에 있다고 했더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소진이 걸음을 옮기자, 숙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헌과 소진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 게 아닌 게…… 아닌데?”

***

“한 방향으로 저어야 한다니까요? 무슨 솥 바닥 긁습니까, 아씨? 아휴, 비켜보세요. 쇤네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선비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이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어. 환자들에게 먹일 죽이니 온 정성을 다하여야 해. 이렇게 저으란 말이지? 그치?”

소진은 숙자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주걱을 놓지 못했다.

코에 숯검댕이까지 묻혀가며 그녀는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연기가 자욱하게 이는 솥 안을 눈까지 반짝여가며 들여다보는 소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숙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아씨, 신나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느냐?”

그녀의 말에 소진이 빙그레 웃으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뿌듯하다는 얼굴로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아니 그래도 내가 의원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구나.”

“…….”

“내가 끓인 죽을 먹고 백성들의 병이 씻은 듯 나았으면 좋겠어.”

숙자는 소진의 이마와 콧잔등에 묻은 숯검댕이를 손수건을 닦아주며 말했다.

“배탈이라도 안 나면 다행이게요? 어째 끓인 지 반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 생쌀 그대롭니다?”

“다 된 죽에 초 치지 말아라, 어?! 나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쒀보는 죽이라 무지 신났거든?”

“아씨가 신나면 어쩝니까? 이 죽을 먹고 백성들이 맛있다 해서 신이 나야지…….”

“너 지금 내 솜씨 못 믿어서 그렇지, 어? 나 한 소진이야.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한 소진. 두고 봐. 네가 끓인 죽보다 훨씬 더 맛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헌은 낮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소진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헌은 피식, 미소를 터뜨리며 소진에게 다가갔다.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소진은 죽을 열심히 젓고 있다,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선비님. 한번 보시겠습니까?”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죽을 내려다보며 헌이 미소를 지었다.

“제법 죽 같습니다?”

“죽 같은 것이 아니라 죽입니다.”

헌의 말에 소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금 주걱질했다.

그때, 그녀의 왼쪽 뺨에 묻은 검댕이를 발견한 헌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곤 자연스레 뺨에 묻은 것을 닦아주며 헌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맛을 본 뒤에도 이리 자신만만해야 할 텐데요.”

숙자는 그 모습에 다시금 뜨악한 얼굴로 소진을 돌아보았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소진은 그런 거 아니라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게 아닌 것이 아닌 것 같아, 숙자는 자꾸만 요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헌과 소진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기다리고 있지요? 속히 끓여 병자들에게 주어야겠습니다.”

소진은 그의 온기가 묻어 있는 듯한 뺨을 쓸며 주걱으로 열심히 죽을 저었다.

“백성을 생각하는 모습이 갸륵합니다.”

“늘 활인서에서 이리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저하도 계신 것을요.”

“언젠간 낭자께서 그리 말했지요?”

“……?”

“국사나 큰일을 도모하려면 마음이 먼저 통해야 한다고.”

“아.”

“나는 낭자와 내가 백성들을 향한 마음은 같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이 허리를 굽혀 조금 당황한 듯한 소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서 낭자가 참.”

“……?!”

“좋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헌은 돌아섰다.

헌이 등을 돌리자마자 숙자는 쪼르르 달려와 조금은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소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거봐요. 저하께서 아씨가 좋다잖습니까!”

숙자는 속닥대며 호들갑을 떨었고 소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숙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뭐랬니?”

“……뭘요?”

“난봉꾼 세자라 그랬잖아.”

“에이! 저게 무슨 난봉꾼입니까? 아씨 한정, 다정한 사내 같은걸요?”

“한정……?”

“아씨한테만 저리 다정하게 대하신다고요. 제가 아까부터 저하를 쭉 지켜봤는데. 젊은 여인들이 곁에서 계속 저하께 추파를 던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시던데요?”

숙자의 말에 소진은 심각한 얼굴로 멀어지는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편 웃음을 지워내지 못한 채, 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서고 있는데 윤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헌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째…… 작고 귀여운 강아지 같지 않으냐?”

“예?”

“한 규수 말이다. 왜 작고 어여쁜 하룻강아지도 범 무서운 줄 모른다지 않더냐.”

“…….”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모습이 꼭…… 하룻강아지 같단 말이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이마를 만지작거리는 헌을 향해 윤현이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영의정 대감의 여식이라 하여 곱게만 자란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 많이 보이기는 합니다.”

“참, 궐에서 보낸 약재들의 개수와 병자들에게 하루 나눠주는 약재의 개수가 같은가.”

“예, 저하.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역시 상소문에 적힌 대로 비리가 있는 듯합니다. 궐에서 받아 가는 약재 수는 나날이 많아졌는데 병자들에게 쓰는 개수는 하루하루,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윤현의 대답에 헌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백성들을 구제하라, 전하께서 하사하신 약재들로 감히 장난을 치다니. 이곳 의원들의 명단을 모조리 적어 내게 가지고 오거라. 환궁하는 대로 전하께 고하여야겠다.”

헌은 노기를 꾹꾹 삼키며 돌아섰다.

그런데 윤현이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듯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한데, 저하.”

어쩐지 그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 같아, 헌은 윤현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궐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궐에서?”

‘궐’이라는 말에 헌의 미간이 세차게 구겨졌다.

“재간택에 통과한 여인들의 명단이 나왔다 합니다.”

순간, 헌의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그 명단에…… 한 규수의 이름이 있는가.”

그렇게 묻는 헌의 음성 끝에는 진득한 떨림이 묻어났다.

곧 윤현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들며 입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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