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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설마 투기십니까. (19/125)

19. 설마 투기십니까.

2020.12.04.

“저하, 앉으시지요.”

처소 안으로 들어선 보은군은 앞에 서 있는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헌은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무지근하게 입술을 뗐다.

“앉을 것은 없고.”

그렇게 말하며 헌이 굳은 얼굴로 보은군을 세차게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담소라도 나누려 들렀다는 그의 말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순간 당황한 보은군은 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야기 들었다. 오늘 낮에 한 규수와 있었던 일.”

“아…….”

“나의 말이 우스웠던 것이냐.”

헌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모습이었다.

보은군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우스웠다니요, 저하.”

되묻는 보은군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개를 조아린 탓에 자신의 뒤통수에 떨어지는 헌의 눈빛이 따갑기만 했다.

“나의 사람이라고 분명히 일렀거늘.”

“하오나…… 저하, 그때도 분명 말씀드렸지만, 소진 낭자는 저의 오랜…….”

“벗이라는 말을 하려거든 집어치우거라.”

싸늘한 헌의 목소리가 처소를 갈랐다.

보은군은 하려던 말을 멈추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공기가 냉랭하기만 하다.

“나 역시 그때도 분명 말하였을 텐데.”

“……!”

“한 규수는 내 사람이라고.”

그러곤 그에게 한걸음 무겁게 다가가며 반듯한 미간을 홱 구겼다.

“한 규수가 세자빈이 된 후에도 그딴 벗이라는 소리를 지껄이며 나의 빈(嬪)을 사사로이 만날 것인가.”

높낮이 없는 헌의 목소리가 보은군의 귓바퀴를 거세게 할퀴는 듯했다.

보은군을 훑는 헌의 눈빛도 딱딱하기만 했다.

보은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 눈빛을 받아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겠다.”

경고처럼 그 말을 남기고서는 헌이 돌아섰다.

하지만 보은군은 이대로 그를 보내기 싫었다.

무례인 줄 알면서 그는 감히 헌의 앞을 막아섰다.

“무엇하는 짓이지.”

예상대로 헌은 차갑게 보은군을 맞섰다.

하지만 보은군은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소진 낭자의 벗이 실종되었습니다.”

“…….”

“낭자 홀로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도움을 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낭자와 함께 실종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사건이 복잡하게 연루된 것 같아서.”

“…….”

“앞으로도 낭자에게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울 것입니다. 하니…… 부디 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저와 소진 낭자의 우정을…….”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 보은군의 말허리를 헌이 싹둑, 잘랐다.

“내가 하겠다.”

그러자 보은군의 고개가 정면을 향해 들렸다.

“예?”

“한 규수의 벗을 찾는 것도.”

“…….”

“마을에 실종된 여인들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도 모두 다, 내가 할 것이니.”

“……!”

“너는.”

헌은 한 걸음 더, 보은군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좀전보다 더 거센 경고였다.

그 말을 뱉어내며 헌이 뒤돌아섰는데, 보은군은 싸늘하게 목소리를 굳히며 입술을 뗐다.

“하나, 저하.”

“…….”

“아직 소진 낭자가…… 세자빈에 간택이 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도발하듯 보은군이 헌에게 말했다.

그 말이 헌의 가슴 깊숙이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헌은 냉랭한 얼굴로 보은군의 한쪽 어깨를 턱, 내리눌렀다.

묵직한 통증이 어깨 위로 번져갔다.

“아니.”

“……!”

“한 규수는 세자빈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헌은 피식 웃으며 쥐고 있던 보은군의 어깨를 거세게 놓았다.

곧, 그는 휘적휘적 공기를 가로지르며 처소를 나섰다.

홀로 남겨진 보은군의 곁으로 그를 모시는 환관이 서둘러 들어왔다.

“보은군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헌이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은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자신의 이마를 몇 번이고 쓸며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투기십니까.”

저를 바라보던 눈빛.

제게 쏘아붙이던 목소리와 말투.

그것은 명백한 투기였다.

은애하는 여인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사내의 뜨거운 투기.

보은군은 마주했던 헌의 모습을 다시금 눈앞에 떠올렸다.

“저하답지 않게…… 투기시라니요.”

“…….”

“한데 하필 왜, 소진 낭자입니까?”

허공을 헤집는 보은군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만이 그의 가슴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소진 낭자는…… 아니 됩니다.”

“…….”

“모든 것을 저하께 드리고 양보할 수 있어도 그 여인만은…… 결코, 안됩니다.”

***

다음날, 소진은 봉희를 만나러 간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씨, 같이 가요……!”

숙자는 서둘러 소진을 따라나서며 굳게 닫힌 대문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쩐 일로 안방마님께서 아씨의 외출을 허락해 주십니다? 어디 가냐, 한 가지만 딱 물으시고는?”

소진은 피식 웃으며 숙자의 팔을 툭, 쳤다.

“내가 먼저 호위무사 이야기를 꺼내었으니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안심을 하신 것이지.”

“아……?”

“설마 호위무사를 붙여 달라 청한 내가 뒤에서 애먼 짓을 꾸밀까, 싶으신 것이야.”

“역시, 우리 아씨…… 잔머리 하나는. 아니, 참으로 영, 영민하십니다. 하하하.”

숙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소진의 옆을 부지런히 따랐다.

그러다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숙자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데 어디 가십니까? 봉희 댁은 어제 다녀오지 않았어요?”

“활인서.”

“……활인서요?”

약값이 없는 빈민들을 치료해주는 곳인 활인서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 가는 것일까.

숙자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진이 씨익, 웃으며 어깨에 둘러멘 화구통(畵具筒)을 보여주었다.

“저하를 만나러 갈 것이다.”

“예?!”

“저하께서 오늘 활인서에 납신다고 하셨어.”

“그걸 어찌 압니까? 저하께서 활인서에는 늘 암암리에 당도하시어 일을 보시고 돌아가신다 하였는데…….”

“저하께서 내게 직접 이야기를 해주셨다. 오늘 활인서에 갈 것이니 볼일이 있으면 그리로 오라고.”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지난날, 헌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흘 뒤, 활인서에 잠행을 나갈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뵙기로 하지요. 물론 낭자께서 내게 활을 배우고 싶다면 말입니다. 신시(申時),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시가 되려면 멀었지만 소진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활이 아닌, 다른 것을 그에게 배우려 하니까.

“한데 그 화구통이랑 저하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게 있어. 넌 따라만 오면 돼.”

“아니, 이러다 두 분 정분이라도 나는 것 아니어요?”

“뭐?!”

정분이라는 단어가 소진의 귀에 콕, 박혔다.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숙자를 홱 돌아보았다.

“그렇잖습니까? 남녀 사이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밤과 술, 그리고 자주 부대끼는 것이랬습니다. 자꾸 그렇게 보다가 아씨도 모르는 사이에 정듭니다?”

“아서라. 그렇게 따지면 보은군 대감과 나는 뭐 벌써 정이 쌓이고 쌓여 혼례라도 치렀겠다?”

“하니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까? 아씨께서 이런 쪽으로는 영, 둔하셔서 그렇지. 보은군 대감마님께서는 이미 쌓여도 한-참 전에 쌓였을 수도 있…….”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어?!”

소진은 숙자의 말을 자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숙자는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말이 되니? 그 난봉꾼 세자랑 내가 정분이 나게?”

“또 모르죠? 정분나는데 그런 게 중요합니까?”

“씁. 날 뭘로 보고. 빨리 가기나 하자.”

숙자의 팔을 잡아끌며 소진이 걸음을 재촉했다.

곧 활인서에 도착한 두 사람.

활인서 안은 환자와 의원들로 북적거렸다.

소진과 숙자는 그 앞을 서성이며 안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저하가 보이십니까?”

“죄다 복면을 쓰고 있어……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눈만 드러내 놓은 채 분주히 오가는 의원들 틈에서 헌을 찾기는 무리였다.

까치발까지 들고서 소진이 열심히 안을 살피던 그때…….

“오늘 아침 동궁 앞마당에서 까치가 울어 반가운 얼굴이라도 보는가 했더니.”

“……?!”

“이리 어여쁜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러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헌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소진은 반가운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반갑습니다, 낭자?”

“저하!”

“쉿.”

저하라는 말에 헌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소진의 입술에 제 검지를 갖다 댔다.

흠칫 놀란 소진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숙자는 그때 궐 앞에서 보았던 종친 선비가 세자라는 것을 알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서는 그저 이 선비라 불러주시지요, 낭자. 오늘은 잠행 차, 방문한 것이라…….”

헌은 느리게 웃으며 이마를 쓸었다.

소진은 서둘러 대답하며 그에게서 한 걸음 슬쩍 물러났다.

“아…… 예.”

“한데 예까지는 어인 일입니까?”

헌은 소진이 들고 온 화구통을 살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것이…….”

“내가 보고 싶어 온 것은 아닐 테고.”

“…….”

“활을 배우고 싶어 오신 것입니까? 하면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리고 계시지 어찌 예까지 오시었습니까? 아니 그래도 볼일이 끝나는 대로 그곳에 들렀다, 환궁할 참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헌은 분주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절벽에 떨어질 뻔하였다던데, 정말 괜찮은 것인지 헌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소진은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오늘은 활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배우고 싶어서요.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행여 선비님께서 약속을 잊으시고 돌아가실 것 같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조금 급한 것이라…….”

“다른 것이라면?”

“용모화요.”

“……용모화?”

‘용모화’라는 말에 헌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소진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화구통으로 향했다.

그제야 그녀가 그것을 가지고 온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선비님께 용모화를 배워보고 싶어서요.”

“…….”

“제 벗의 얼굴을 그려볼까 합니다. 하면 벗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한데…… 그림을 그려본 적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난(蘭) 하나 제대로 치지 못하는 비루한 솜씨입니다.”

소진의 말에 헌이 나지막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흠…….’ 하고 고민하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섬섬옥수(纖纖玉手)로 활도 잘 쏘고 검도 잘 휘두르는 것은 반칙이겠지요?”

“예?”

“하면 기다리시지요. 볼일을 끝내고 속히 오겠습니다.”

소진은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데 내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을 것인데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헌을 바라보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모았다.

“용모화를 선비님께 맨입으로 배우지는 않겠습니다. 배움에 상응하는 값을 치를 것이니 이른 시간 안에 제가 용모화 그리는 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시어요.”

그 말에 헌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낮게 터뜨렸다.

그의 눈빛이 꽤 진지한 소진의 얼굴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값이라면, 내게 돈이라도 줄 참입니까?”

되묻는 헌을 향해 소진은 조금 당황해하며 올려다보았다.

정말 돈으로 값을 지불 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물으니 말문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뭐 잘못된 것일까, 소진은 속으로 분주히 생각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답을 쉬이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돈으로 지불하려 했나 봅니다.”

“그것이 제일 타당한 지불 방법이라 생각하였는데…….”

소진이 말끝을 흐리며 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연신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웃음에 이상하게 소진의 뺨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왕의 권세에 버금가는 영의정의 여식이라지만 이 나라의 왕세자인 내게 돈을 준다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헌의 목소리를 들은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사옵니다. 오해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

“돈자랑을 하려던 것은 결코, 아니었사옵니다.”

크게 당황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소진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감히 왕세자 앞에서 권세를 자랑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오해라며 다시금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흠……. 한데, 우리가 겨우 고작 그런 사이였던가.”

헌이 나지막이 말하며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소진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예……?”

그러자 헌의 깊고 곧은 눈길이 소진에게 향했다.

“서로 대가 없이 돕고 도움을 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생각했는데.”

“……!”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이것은 선……비님의 재능을 제가 배우는 것이니 응당, 그에 걸맞은 값을 지불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까?”

소진이 확고하게 제 생각을 헌에게 전달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헌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뗐다.

가히 그녀다운 발상인 것 같았다.

“하면 돈은 필요 없고.”

“…….”

“정 그의 대가를 치르고 싶다면. 지금 내가 꼭 필요한 것으로 해주시지요?”

헌의 대답에 소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이든 말씀하십시오.”

그녀의 씩씩한 대답에 헌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소진을 내려다보다 슬그머니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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