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알면 알수록 신기한 여인이구나. (18/125)

18. 알면 알수록 신기한 여인이구나.

2020.11.30.

놀란 소진이 위를 올려다보니, 보은군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대감……!”

보은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진은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죽다니요. 그렇게는 안 되지요.”

그러자 보은군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이제는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제가 왔습니다. 하니, 울음을 그치세요. 낭자.”

그 목소리가 너무도 따뜻해 소진은 더욱 울컥했다.

“흑…….”

“많이 무서우셨지요?”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습니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있던 소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기도 잠시, 그의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마냥 소진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울먹이며 자신의 손을 꼭 쥐는 소진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보은군은 그녀의 손을 더욱 바짝 잡아 올렸다.

보은군은 바닥에 엎드린 채, 그녀가 더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았다.

소진도 서둘러 놓쳤던 나무뿌리를 다시금 움켜쥐며 부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끝이라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만 이렇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자 없던 힘이 솟고 있었다.

그녀는 엉엉 울며 그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제 끌어 올리겠습니다.”

“예, 대감.”

“하나, 둘, 셋……!”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보은군은 소진을 위로 당겨 올렸다.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던 소진의 몸이 절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보은군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보듬었다.

그러자 소진은 무사히 땅 위에 무사히 몸을 디딜 수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소녀, 살아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감.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그녀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괜찮습니까, 낭자?”

“예……. 괜찮습니다. 흐윽…….”

소진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보은군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몇 번이고 소진의 등을 쓸어내리며 보은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그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데 어찌 된 것입니까? 산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보은군이 낮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였지요.”

“…….”

“한데 걱정이 되어서 되돌아왔습니다. 설마 했는데……. 아무튼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소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께도 송구하여요. 저의 무모함 때문에 이리 고생을 하게 하는 것 같아…….”

“무모함이라니요. 벗을 구하기 위한 갸륵하고 애달픈 마음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을 밟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그녀가 흐트러진 숨결을 고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낭자.”

소진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이 떨어져 죽을 뻔하였던 낭떠러지를 응시했다.

처음 봉희를 잃고 궐을 바라보던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이 신중하고 꼼꼼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

“벗의 일이라 순간, 마음이 앞서 판단이 흐려졌나 봅니다.”

그렇게 읊조리는 소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흙바닥 위를 구르느라 소진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보은군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상처 입은 곳은 없어 보였다.

소진의 머리카락과 옷가지에 묻은 낙엽을 그가 털어냈다.

“저라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대감…….”

“한데 매번 낭자께 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방금도 대감께서 없으셨으면 그대로 죽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 자신을 뒤따르던 그 사내 같았다.

소진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자 보은군이 멋쩍게 입을 열었다.

“낭자를 구하려다 어쩔 수 없이……. 잠시 기절한 것입니다. 서둘러 내려가지요.”

아무래도 아까 절벽에서 들었던 비명의 출처가 이들인 듯싶었다.

보은군은 여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소진의 어깨를 단단히 부축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산을 내려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윤현이 바라보고 있었다.

***

동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헌은 신경질적으로 앞섶을 풀어헤쳤다.

언뜻 보이는 그의 근육은 성이 난 듯 잘게 쪼개져 있었다.

거친 날숨을 따라 그의 상체도 거세게 들썩였다.

“……뭐? 절벽에 떨어질 뻔한 한 규수를 보은군이 구해내?”

짜증이 솟구쳤다.

헌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다친 곳은.”

울컥, 화도 치밀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진의 안위였다.

헌의 날카로운 눈빛이 윤현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습니다.”

“…….”

“나서서 도와드리려 하였으나 한 규수께서 먼저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고는 달아나는 바람에.”

“뭘 휘둘러?”

“검술에도 능한 것 같았습니다.”

“검술도 능한 여인이라……. 알면 알수록 신기한 여인이구나.”

그의 대답에 헌의 눈빛에 잠깐, 안도감이 돌았다.

굳게 맞물렸던 잇새로 짧은 한숨이 뱉어졌다.

“지금 보은군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곧, 그는 표정을 굳히며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처소로 돌아오셨을 것이옵니다.”

윤현의 대답에 헌은 깊이 숨을 내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헌의 미간은 짜증으로 이미 구겨진 상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몇 번 이마를 쓸던 그가 별안간 눈을 떴다.

그러고는 풀어헤쳤던 옷을 홱, 젖히며 곤룡포로 갈아입었다.

여전히 그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채였다.

“가자.”

“예……?”

“보은군에게 가보아야겠다.”

헌이 보은군의 처소에 직접 발걸음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또한, 보은군이 직접 헌을 찾으러 오는 일도 없었다.

“보은군 대감께…… 직접요?”

윤현의 동공이 어쩐지 불안하게 떨리는 듯했다.

헌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그래, 직접. 길을 잡거라.”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윤현은 헌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헌은 윤현을 세차게 돌아보며 왜 뜸을 들이냐는 듯 눈짓을 해 보였다.

윤현은 조심스럽게 헌에게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차라리 보은군 대감을 이쪽으로 부르는 것이…….”

“이제 조금 한 규수의 마음을 두드렸나 싶었는데.”

“……?”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헌의 강직한 입매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윤현을 무겁게 돌아보며 그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날 것 같은데.”

“…….”

“그 변수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우라고 하니, 내 마음이 어떨 것 같으냐.”

“송구하옵니다, 저하. 속히 길을 잡겠나이다.”

윤현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서둘러 헌에게 물러나며 보은군의 처소로 향하기 위해 길을 잡았다.

곧 윤현이 발걸음을 옮기고 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헌이 움직이자 궁녀들과 환관들이 뒤를 이었다.

보은군에게 가고 있는 헌의 마음은 불같이 타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이 궐이 어떤 곳인지.

또한, 자신을 향한 눈과 귀가 이곳에 얼마나 많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헌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제 아우인 보은군의 안부를 묻기 위해, 오랜만에 발걸음을 하는 것처럼 여유 있게 뒷짐을 지고서 걷고 있었다.

곧 헌은 보은군의 처소에 당도했고, 환관은 굳은 얼굴로 세자의 방문을 알렸다.

“세자 저하 납시오……!”

닫혀 있던 처소의 문이 열리고 보은군이 조금은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저하께서 예까지는 어인 일로……!”

헌은 가볍게 웃으며 보은군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 오랜만에 너와 담소라도 나눌까 하여 이리 들렀네.”

“연통을 넣어 주셨으면 소인이 직접 저하를 뵈러 갔을 텐데요.”

“누가 오는 게 무에 중요한가. 안으로 들지.”

헌이 앞장서고 보은군이 그 뒤를 따랐다.

어쩐지 보은군을 감싸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

집으로 향하기 전, 소진은 다른 벗의 집에서 옷을 빌려 말끔하게 차림새를 정리했다.

흙바닥 위를 굴러 엉망이 된 옷을 본다면 분명 어머니와 아버지가 걱정할 것이 뻔하였기에.

소진이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숙자와 영의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를 다녀오는 것이냐?”

영의정은 의심쩍은 얼굴로 소진의 차림새부터 살폈다.

숙자는 대번에 그녀가 외출할 때와 옷차림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했다.

“봉희네 다녀오는 길입니다.”

“간택 기간이라 행동거지에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예, 아버지. 봉희를 못 본 지 오래되어……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후에 다녀온 것입니다.”

그 말에 숙자가 소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니 그래도 대감마님께서 아씨를 찾으시기에 밤새 아씨께서 쓰신 걸 보여 드렸습니다.”

영의정은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그래. 열심히 하였더구나. 혹, 재간택에 임하게 되더라도 실수 없이 떨어질 수 있도록 만전을 가하여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한데 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소진은 다부진 얼굴로 영의정을 바라보았다.

청이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이상하게 긴장이 되는 것도 같았다.

“그래? 무엇인데.”

“앞으로 제게…… 호위무사를 붙여 주세요.”

호위무사라는 말에 영의정과 숙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호위무사라면 진즉에 영의정이 소진에게 붙여 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한사코 거부하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마음을 돌린 이유가 무엇인지 영의정은 궁금해졌다.

“호위무사라니……? 갑자기 왜.”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소진은 진지한 얼굴로 영의정을 올려다보았다.

숙자는 봉희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영의정에게 할 참인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흉흉한 소문? 그게 무엇인데?”

“마을 여인들이 간밤에 사라진다는…… 흉문(凶聞)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건 무슨 이야기냐? 여인들이 왜 사라져?”

“소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혹 아버지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사옵니까?”

모르는 척하며 소문에 대해 물으며 소진은 영의정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렇……습니까?”

“어디서 그런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이야. 설마 그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겠다고 또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영의정이 설마 하며 소진을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소진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사주단자까지 올려놓고…… 그런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

“뜬소문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조심하면 좋은 것이니까요. 해서 호위무사를 붙여 달라 한 것입니다.”

“그래. 그것이 좋겠구나.”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영의정의 뺨이 다시금 굳어졌다.

소진은 태연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필요할 때만 동행하는 것으로요.”

“필요할…… 때만?”

“사실 봉희를 만나러 가거나 다른 벗을 만나러 갈 때는 딱히 필요가 없을 듯하여서요.”

“하지만.”

“오히려 늘 혼자 다니다, 갑자기 사주단자를 올리고 초간택에 임하고 나서야 호위무사를 대동한다면.”

“……?”

“다른 규수들이 유난이다, 이미 세자빈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잡음이 일 것입니다.”

소진의 말에 영의정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그녀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다.

분명, 늘 없었던 호위무사가 소진을 뒤따르게 되면 대신들 사이에서는 벌써 세자빈이 된 듯 군다며 비아냥거릴 것이 뻔했다.

영의정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뒷짐을 지었다.

“필요할 때만 동행하여 다니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세요.”

숙자는 무슨 꿍꿍이로 소진이 이러는 것인가 궁금하기만 했다.

잠시 고민하던 영의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내일 마땅한 호위무사를 너에게 붙여 주마.”

그리고 영의정은 돌아섰고 숙자는 서둘러 소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웬 호위무사요? 아씨, 감시당하는 것 같다고 한사코 거절했잖아요?”

안채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봉희를 찾으려면 어쩔 수 없어. 내가 아무리 무술에 뛰어나다 해도 여인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해서 어쩌시려고요?”

“그때 그 돈을 빌려준 도적놈들 염탐하러 갈 때는 호위무사랑 대동해야겠어. 보은군 대감이 언제까지 날 도와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아씨께서 봉희 댁 찾으러 다닌다는 걸 대감마님께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소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들키게 잘…… 이용하여야지.”

그러다 헌이 자신에게 그려준 용모화를 퍼뜩 떠올리며 황급히 별채로 향했다.

“아씨……!”

별채로 들어온 소진은 서둘러 서안을 뒤적였다.

제일 아끼는 서책 한가운데 고이 끼워둔 용모화를 꺼냈다.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다시 보아도 참으로 훌륭한 솜씨였다.

“이것은 갑자기 왜요?”

소진은 자신을 향해 의아스럽게 묻는 숙자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숙자야,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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