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렇게는 안 됩니다.
2020.11.27.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보은군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러고는 조금 놀란 듯한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것이…… 무슨.”
이상하게 형님의 부인이 되지 말라는 말이 소진의 귓바퀴를 움켜쥐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흐르고.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보은군은 피식, 웃음을 뱉어냈다.
“하면 이리 편안하게 마주 보고 앉아…… 담소도 나누지 못할 거 아닙니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온 마음을 다해 소진을 바라볼 수 없을 테니 가슴에 슬픔이 사무칠 것 같았다.
소진은 그 마음도 모른 채, 그저 편안히 웃어 보였다.
“예. 절대 그리 될 일 없을 것이어요.”
***
“이곳입니까?”
두 사람은 봉희 남편에게 돈을 빌려준 자들의 거처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꽤 오래 자리를 비운 듯,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보은군은 슬쩍 벌어진 문틈 사이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채고 자취를 감춘 것 같은데…….”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실종된 여인들의 행방을 물으니 거처지를 옮긴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소진의 말에 보은군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얼굴은 심각했다.
소진에게 전해 들었던 것보다 사태는 더욱 심각한 것 같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두 귀로 듣고도 믿지 못할 말들이었다.
마을에 사라진 여인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실종된 여인들에게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숨기는 사람처럼 쉬쉬거리기에 바빴고 그 누구도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보은군은 심각한 얼굴로 굳게 잠긴 문만 바라보았다.
그때, 하염없이 문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등 뒤로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래서! 아직도 우릴 찾으러 다니고 있다는 말이야?!”
성이 난 듯한 웬 사내의 높은 언성에 순간, 보은군과 소진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둘러 몸을 숨겼다.
“옮긴 거처지는 모르겠지?”
“네.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는 듯합니다.”
어디선가 나타나 남자 둘이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하며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구석에 숨어 두 남자를 바라보던 소진과 보은군은 그들이 돈을 빌려준 자들임을 직감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소진은 두 남자를 뒤따를 기세로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그때, 다시 문을 걸어 잠그던 두 남자가 황급히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두릅시다, 대감.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듯, 달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몰래 궐을 빠져나온 것이라 보은군은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 상태였다.
둘이서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은밀히 뒤만 따를 것이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하면 속히 따릅시다.”
보은군은 서둘러 소진의 곁을 따랐다.
“새로운 거처지로 가는 모양이에요.”
소진이 심각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보은군 역시, 어딘가로 급하게 사라지는 사내 둘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
“뭐라……? 보은군이?”
활을 다듬던 헌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순식간에 무감각하던 그의 눈빛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윤현이 고개를 조아리며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사건을 둘이서 해결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
“사라진 벗의 집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소인이 지금 보고 오는 길입니다.”
“궐 내에서 조용히 있으라 하니…… 이젠 밖으로 나가 한 규수를 만난다?”
세차게 활을 움켜쥐는 그의 손등에 힘줄이 선연하게 불거졌다.
이상하게 그 속은 점점 뜨거워졌다.
소진이 아직 자신의 빈으로 간택이 된 것도 아니었지만 꼭, 자신의 사람을 빼앗긴 것만 같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말없이 숲속을 훑던 헌은 묵직하게 입술을 뗐다.
“해서 어디로 가더냐.”
“돈을 빌려준 자들의 새 거처지를 찾겠다고, 뒤를 따랐습니다.”
“재간택일은 결정이 됐다던가.”
재간택일을 묻는 헌의 얼굴은 복잡 미묘하게 굳어갔다.
“아직 날이 정해지지 않은 것 같사옵니다.”
어젯밤, 동궁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으니 더는 잠행도 어려울 것이었다.
재간택에서 그녀를 보지 못한다면 이대로 소진을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을 테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헌의 가슴이 들끓었다.
“재간택일이 정해지는 대로 나에게 고하거라.”
그때, 헌을 찾는 대신들의 목소리에 그는 심각하게 구겼던 얼굴을 풀고 등을 돌렸다.
곧 헌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활을 만지작거리며 대신들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그대들의 화살이 나의 것보다 더 날카로운 모양입니다. 나는 아직 쥐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저 멀리서 영의정이 사냥한 사슴을 어깨에 둘러업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헌은 피식, 여유 있는 웃음을 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영의정 대감께서는 벌써 사슴 한 마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참 재수 없는 사슴이지 않습니까? 제 눈에 띄어 잡히었으니.”
영의정 역시 느긋한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헌을 직시했다.
가만히 영의정의 말을 듣던 헌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가 잡은 사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이 두 개나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죽은 사슴이었다.
그것을 훑는 헌의 눈길이 선연하게 번뜩였다.
“하하, 저는 보고도 잡지 못한 사슴이 두세 마리는 되는 것 같은데……. 어찌 대감께서는 단번에 보자마자 잡으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헌의 목소리에 묻은 웃음기가 조금 서늘했다.
영의정도 눈빛을 단단히 하며 대답했다.
“원래 한 번 본 것은 놓치지 않는 편입니다.”
의미심장한 그 말에 헌의 한쪽 입꼬리가 비식, 일그러졌다.
“그렇습니까? 한데 대감의 활 솜씨가 영 퇴보한 모양입니다.”
“예……?”
“사슴 한 마리 잡자고 화살을 두 발이나 쏘다니. 호랑이도 아닌 것을…….”
헌은 피식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영의정의 미간이 적나라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의 명성이 자자하던 대감께서도 이제 나이를 먹으셨나 봅니다.”
자존심을 긁는 헌의 말에 영의정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헌은 자신의 활을 들어 허공에다 쏘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 말에 잠자코 얼굴만 구기고 있던 영의정이 입을 열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 하니……. 활시위를 당기는 이 감각도 이제는 둔해진 것이겠지요.”
“해도 나보다는 대감께서 활 실력은 한 수 위인 듯합니다. 사슴은커녕 토끼 한 마리조차 잡지 못한 나인 것을요.”
“하하, 혈기왕성하신 저하와 견주오리까? 다만 감히 저하께 조언 하나 해드리자면.”
“…….”
“백발백중의 정확함도 중요하지만, 눈에 띈 것은 몇 발이고 쏘아서라도 반드시 손아귀에 넣고 마는 근성 또한, 사냥에 있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사냥감을 발견하고도 활시위조차 당기지 못하면 아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
“소신의 활 실력이 세월 앞에 쇠퇴하였다 하여도 이 근성만큼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으니 한 방에 숨통을 끊어 놓지는 못했어도…… 어찌하였든 이리 사슴을 잡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
“사냥감을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의지와 집념.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 못 잡을 것은 없지요.”
영의정의 말에 이번에는 헌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말이 한번 문 사냥감은 결단코 놓치지 않겠다는 말 같아서.
그리고 그 사냥감이 꼭 자신을 두고 하는 소리인 것 같아 헌의 기분은 언짢아졌다.
“의지와 집념이라.”
하지만 헌은 이내 표정을 풀고는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역시…… 대감을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과찬이시옵니다, 저하.”
“한데 말입니다.”
헌은 웃음기 어린 얼굴을 들어 영의정을 직시했다.
“의지와 집념도 좋지만 한 방에 끝내지 않으면…… 영특한 사냥감은 달아나고 말겠습니다.”
“……?”
“때로는 의지만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더이다.”
“…….”
“한 방. 그것만큼 강력하고 확실한 것도 없으니 저는 사냥을 할 때, 한 번의 화살로 사냥감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을 중요시 생각한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은 빙그르르 돌아섰다.
제아무리 영의정이 자신의 목덜미를 쥐고 흔든다 할지라도 그 손에 죽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한 방.
자신은 그 한 번의 휘두름으로 반드시 사냥감의 목을 노리겠다는 말이었으니.
돌아서는 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의정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
“왜 숲으로 오는 것일까요……?”
소진은 한껏 몸을 낮춘 채 숲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보은군 역시 굳은 얼굴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처지를 숲으로 옮긴 모양입니다.”
“돈으로 장난질을 하며 재물을 부풀리는 이들이…… 인적 드문 산속에 거처지를 둔다라……. 이상한 것을요?”
말끝을 흐리는 소진의 안색이 어둑해졌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질끈 움켜쥐며 멀어지는 사내들을 시선에서 떼지 않았다.
보은군은 그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이 심상치 않은 곳임을 직감했다.
“오늘 이곳에서 대신들과 저하께서 사냥하러 나오신 것으로 압니다.”
보은군의 말에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속이 워낙 깊으니 설마 저들이 향하는 곳이 그곳이겠냐마는…….”
“왕실 사냥터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한데 어찌 이곳에서?”
소진은 그때 헌과 함께 갔었던 왕실 사냥터를 떠올렸다.
그곳은 이 숲과는 반대편 쪽에 있는 곳이었다.
“종종 여기서도 사냥을 즐기고는 하십니다.”
“아…… 오늘 아버지께서 사냥하러 가신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예.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까딱하다간 영의정 대감께 발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보은군의 말에 소진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숲속을 메웠다.
긴장감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소진은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밟히는 법.
직접 중궁전을 헤집을 수 없다면 저들의 꼬리를 밟아가는 것이 일의 순서일 터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사내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
갑자기 잘 걷던 사내 둘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서더니 소진과 보은군 쪽을 홱 돌아보는 것이었다.
순간 보은군은 소진을 등 뒤로 감추었다.
사내 둘은 저벅저벅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함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소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보은군과 소진 주위로 숲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보은군은 난처하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소진을 꽉 움켜쥐었다.
“뒤에 꼭 붙어 있으십시오, 낭자.”
“……어쩌지요? 이를 어째.”
“내가 어떻게든 저들과 맞서고 있을 테니 낭자는 속히 내려가 사람들을 불러오십시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사내들.
둘이서 감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진은 황급히 흙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막대기를 주워들었다.
그러곤 자신에게 달려들면 금방이라도 막대기를 휘두를 기세로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대감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족히 다섯은 넘어 보이는데 어찌 상대하시려고……. 이 산의 지리에 대해 잘 아십니까?”
“조금요……?”
“하면 저하와 대신들이 사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보은군은 그런 그녀를 자신의 뒤에 꼭 가둔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
“압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하면…… 이렇게 하지요.”
“…….”
“신호를 줄 테니, 반대로 갈라집시다. 저는 저잣거리를 향해 달리겠습니다. 대감께서는 대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해서 저희 집 앞에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요.”
막대기를 꽉 움켜쥔 소진의 작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섰다.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무술과 검술에 관심이 많았던 소진에게 직접 칼 쥐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보은군이었다.
소진은 매번 그가 궐에서 배운 검술을 가르쳐 달라 조르고는 했었다.
여인의 몸으로 쉽사리 무술 따위를 배울 수 없었으니 보은군이 그녀의 유일한 검술 스승이 되어 주었다.
해서 그녀의 검술 실력을 익히 알고 있어 소진이 사내 두 명쯤은 거뜬히 제압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두런두런 말을 이어가던 소진과 보은군의 곁으로 장정들이 에워쌌다.
“역시. 그때 그 아씨구려?”
“…….”
“아이고, 오늘은 그 막대기로 후려치시려고?! 한데 어쩌나. 내 오늘은 아씨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보내줄 마음이 없는데.”
저번에 헌과 맞닥뜨린 적 있는 사내였다.
그들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소진은 표정 하나 동요 없이 비아냥거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굳은 얼굴로 막대기를 고쳐 잡으며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도 내 벗의 행방을 모른다고 말할 참이냐.”
사내를 향해 쏘아붙이는 소진의 목소리에는 분기가 가득했다.
“모른다지 않았습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저희 뒤를 미행하시면 이것은 엄연히 영업 방해입니다, 아씨?”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소진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그러자 보은군은 더욱이 그녀를 막아서며 자신과 소진을 에워싼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조용히 길을 터주면 지금의 무례는 없던 일로 해줄 것이다. 썩 물러가거라.”
그 말에 사내들은 피식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누가 먼저 건드렸는데. 무례?!”
“…….”
“한데 보니, 저번과는 다른 호위무사네. 아씨는 호위무사를 얼굴만 보고 뽑는 모양입니다? 뭔 하나같이 칼 한번 안 잡아 본 기생오라비처럼 생겼소? 하하하!”
“하하하!”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는 사내들을 바라보던 소진은 보은군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지금이라는 듯, 소진이 눈을 한번 깜빡거리자 보은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얼굴 보고 뽑는다. 왜 그런 줄 아느냐?”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으로 달릴 준비를 하였다.
그러곤 깔깔거리는 사내들을 돌아보며 여유 있게 몸을 풀었다.
“나는 호위무사 따위가 필요 없거든.”
“……!”
“죽기 싫으면 다 비켜라, 이것들아!”
소진은 그렇게 소리 지르며 막대기를 휘둘렀다.
그 순간, 보은군도 놀라 흠칫하는 사내들에게 발길질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숲속.
소진은 열심히 막대기를 휘두르며 제게 달려드는 사내들을 열심히 처치해냈다.
사내들이 소진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고 그 칼을 막대기로 쳐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약속한 대로 서로 반대편으로 달렸다.
그러자 열심히 칼을 휘두르던 사내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잡아!”
“둘 다, 잡아 와. 빨리!”
사내들도 반으로 갈려 보은군과 소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사내들을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뛰다 말고, 흙바닥 위에 돌을 집어 그들을 향해 냅다 던졌다.
“악……!”
돌멩이에 정통으로 이마를 맞은 사내 하나가 그대로 넘어졌고, 그 틈을 타 소진은 잽싸게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러다 그만 치맛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는데.
“으악!”
무언가를 잡을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은 점점 더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사내도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소진의 모습에 당황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어디 갔어!”
애석하게도 사내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소진은 아래로 더 아래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 소진은 정신을 차리고 손에 걸리는 무언가를 잽싸게 움켜쥐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보니, 나무뿌리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어, 어떡해……!”
그런데 발이…… 바닥에 닿지를 않는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에 소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두 다리가 달달 떨려왔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실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발아래에는 커다란 호숫가가 펼쳐졌다.
“어, 엄마야! 사람 살려요! 여기 사, 사람 있어요!”
소진은 죽을힘을 다해 허공에 소리쳤다.
자신을 쫓던 그 사내들이라도 제발 나타나 구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폭포 소리만 잔인하게 들려올 뿐 그 누구도 소진의 애타는 부름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절벽의 바위를 딛고 올라서려 했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에 자꾸 헛발질했다.
나무뿌리를 간신히 움켜쥔 손도 점점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이러다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아 소진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보은군 대감! 대감……! 없습니까?! 여기 사람 있습니다! 누가 좀 도와주시어요……!”
엉엉 울며 절규하는 소진의 목소리 뒤로 갑자기 ‘악!’ 하는 기분 나쁜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 순간 비명이든 뭐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마냥 반갑기만 한 소진이었다.
“여기 사람 있어요! 제발 도와주시어요! 사람 살려요!”
귀신이든 사람이든 제발 누구라도 나타나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다.
소진의 애절한 울음만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점점 팔의 힘은 빠져만 가는데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어, 소진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머니, 아버지……! 불효녀 먼저 눈 감사옵니다……. 흐윽.”
소진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부디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눈 감는 소녀의 불효를…… 용서치 마시옵소서……! 숙자야! 좋은 주인 만나서…… 흐윽, 내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간신히 움켜쥔 나무뿌리도 두두둑, 불길한 소리를 내며 느슨해지고 있었으니.
소진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통곡했다.
“시집도 못 가보고오……! 으어어엉. 이대로 죽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혼담이 오가던 대사헌 댁 장자한테 시집가는 거였는데……. 으어엉.”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허망하게 죽는 것은 억울했다.
“혼인도 못 해보고…… 처녀 귀신이 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하염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미끄덩거리며 나무뿌리를 쥐고 있던 소진의 손에 힘이 풀리며 아래로 쑤욱, 내려갔다.
“으아아악!”
놀란 소진이 허둥대며 소리를 꽥 질렀는데.
“그렇게는 안 됩니다.”
“……?!”
갑자기 누군가가 소진의 팔을 황급히 움켜쥐며 위로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