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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형님의 부인이 되지 마세요 (16/125)

16. 형님의 부인이 되지 마세요

2020.11.23.

“부인! 어디 갔다, 이제 오셨소……!”

왕은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중전을 품에 안았다.

곁에 있던 상선이 고개를 조아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참으로 해괴하고 망측한 광경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태연히 눈길을 거둘 뿐이었다.

동시에 헌의 반듯한 이마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전하, 우리 아드님께서 아직 젊으셔서 이리 방황하는 것입니다. 하니, 용서하여 주셔요.”

중전은 헌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조소했다.

그 순간에도 왕은 중전이 마치 제 어머니의 품인 양, 고개를 묻으며 칭얼거렸다.

“누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입니까, 부인? 우리 원자(元子)는 여기 이 배 속에 있는 것을요?”

꼭 다른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왕은 한껏 흐트러진 모습으로 중전의 배를 연신 어루만졌다.

허탈한 얼굴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헌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서운해하지 마세요, 세자. 전하께서 옥체 미령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중전은 왕을 품에 보듬어 토닥였다.

그러자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헌은 왕을 향해 소리쳤다.

“아바마마!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강건하시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리 나약한 아바마마의 모습만 남은 것입니까, 왜!”

그것은 울분이었다.

피를 토하듯 끓는 속을 뱉어낸 헌의 눈시울은 뜨겁게 젖어갔다.

그러자 왕은 처음 보는 사람을 바라보듯 생경한 눈으로 헌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군데 내게 아바마마라 하는 것이야! 썩 물러가지 못할까! 부인, 뭐 하는 것이오! 당장 이놈을 끌어내세요!”

호통치는 왕을 끌어안는 중전.

그녀의 입매가 묘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하……, 누구냐니요. 우리 세자이지 않습니까. 참, 이를 어쩌면 좋아.”

중전의 음성이 교태스럽게 휘어졌다.

하지만 왕은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언성을 높일 뿐이었다.

“세자는 누가 세자야! 우리 세자는 여기 이 부인 배 속에 있는데!”

올해 오십을 넘긴 왕은 노망(老妄)에 걸렸다.

일여 년 전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니 이젠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고 떼를 쓰며,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패악을 부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리고 그 정신이 탁해지는 간격도 짧아지고 있었다.

어의의 말에 의하면 왕이 큰 충격을 받아서라고 했다.

그 해, 세자 헌의 생모였던 숙원 조 씨가 의문사로 왕의 곁을 떠났다.

숙원 조 씨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으로 순렬왕후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해 궐 안이 걱정으로 늘어갈 때, 단비처럼 원자(元子)를 출산했다.

그 아이가 바로, 헌.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던 왕은 단번에 조 씨를 숙원에 봉하였고 아들 헌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숙원 조 씨와 헌을 살뜰히 아꼈던 착한 왕비가 죽고 새로운 국모로 대제학의 여식이 입궐하였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원 조 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해 왕과 헌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왕은 그 충격으로 속되게 말해 노망에 걸려 헛소리를 해댔다.

더군다나 그렇게 싫어하던 어린 중전 신 씨를 조 숙원이라 부르며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원자라고 생각하며 세자 헌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은 것이었다.

치유 방법도 또한, 병세를 늦출 방법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가는 왕의 숨통이 끊길 때까지 지켜보아야만 할 뿐이었다.

헌은 파르르 떨며 정신이 반쯤 나간 왕을 처연한 눈으로 응시했다.

“소자는 아바마마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을 부축해 동궁을 나서려던 중전은 코웃음을 치며 헌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그만 들리게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며 붉은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전하께선 나를 조 숙원이라 알고 계시지. 내가 네 어미인 줄 알아.”

“내 어머니를 그 입에 담지 마십시오.”

“너를 폐하고 배 속에 있는 네 아우에게…… 세자의 자리를 줄 것이라고 한단다.”

“…….”

“멀쩡히 국본이 살아 계시니 폐위를 건의하는 것은 반역죄요, 그렇다고 해서 멀쩡하지 못한 전하께서 내리는 결정이라고 하여 어지(御旨)가 아닌 것도 아니니. 어쩌겠느냐.”

“…….”

“세자께서 잘 지켜내셔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중전이 왕과 함께 동궁을 나서려는 순간, 헌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 하하하!”

그러곤 저벅저벅 중전에게 다가가 싸늘한 얼굴로 둥근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래도 잘, 지켜내려 합니다. 한데 배 속에 있는 내 아우.”

“……?!”

“무사히 소자와 만날 수 있을까요.”

무서운 그 말에 중전은 크게 호통을 쳤다.

“그것이 지금 무슨 망발입니까, 세자!”

“아니, 왜 화를 내십니까, 중전마마. 소자,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헌은 능청스럽게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황당무계한 말은 삼가세요.”

“이게 어찌 황당무계한 말이라 하십니까.”

“뭐요?”

“그저 중전마마께서 순산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드리는 걱정인 것을요.”

“세자!”

그러곤 위협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서며 헌은 거칠게 자신의 품속에서 사조룡(四爪龍) 패를 꺼냈다.

중전의 눈앞에 그것을 흔들어 보이며 헌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혹, 이것이 갖고 싶으십니까?”

“세자……!”

“그럼 가지고 가시지요.”

그러면서 헌은 그 사조룡 패를 중전의 발아래에 툭, 집어 던졌다.

무례한 그의 행동에 중전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세자, 지금 이 어미에게 무슨 불효를……!”

“나의 어미가 될 것인지, 이 아이의 어미가 될 것인지 잘 판단하셔야 할 겁니다.”

“뭐…… 뭐라?”

“이 아이의 어미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니.”

그러곤 예의는 조금도 차리지 않은 채 삐딱하게 서서 직접 동궁 문을 열어주는 헌이었다.

“하면 살펴 가십시오.”

중전은 모욕감을 삼키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아씨, 아씨……!”

날이 밝자마자 숙자가 부리나케 별채로 달려왔다.

봉희의 남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소진이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숙자는 손에 무언가를 쥐고는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이야?”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숙자가 소진에게 서찰 하나를 급히 전하며 문을 꼭 닫았다.

그 모습이 어딘가 쫓기는 사람인 것 같아 소진은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속히 읽어 보시어요. 보은군 대감마님께서 보내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소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서찰을 펼치는 소진의 손도 빨라졌다.

<오늘, 오시(午時) 저잣거리 낭자와 내가 자주 가던 다방(茶房)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아무래도 봉희와 관련된 일 때문에 보자는 것 같았다.

소진은 서둘러 서찰을 찢어 버리고는 옷고름을 단단히 여미었다.

그러자 숙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보은군 대감마님께서 뭐래요?”

“오늘 보자시는구나. 아무래도 봉희와 관련된 일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아.”

“봉희댁을 찾았대요?”

“그건 아닌데……. 숙자야, 어머니는?”

소진은 창을 활짝 열고서는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하인들이 분주히 오갈 뿐, 영의정과 최씨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숙자가 슬그머니 창을 닫으며 소진에게 은밀히 말했다.

“지금 안채에서 다른 마님들과 담소 나누고 계셔요.”

“……아버지는?”

“출타하신 지 꽤 되시었죠. 오늘 뭐라더라……? 왕실 사람들하고 사냥을 나가신다고 하시었습니다.”

“사냥이라면…… 시간이 조금 걸리시겠구나.”

소진의 의중을 파악한 숙자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는 별채의 문을 열었다.

“가셔요, 아씨……!”

“어?”

큰 결심을 한 듯, 숙자가 소진을 떠밀었다.

그러곤 두 주먹을 굳게 움켜쥐며 입술을 앙다무는 숙자.

소진은 그런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숙자는 결의에 찬 얼굴로 소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씨가 어디로 갔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숙자를 소진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거리며 바라보았다.

“멍석말이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절대 입을 열지……!”

“그냥 봉희를 만나러 갔다고 해.”

“……예?”

“멍석말이까지 당하면서 함구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소진은 마치 전장의 장군처럼 비장하게 이야기하는 숙자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러자 숙자가 입술을 굳게 말아 물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씨, 간택 기간이기도 하고…….”

“다 생각이 있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숙자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이어요?”

“밤새 필사한 것이다.”

“……필사요?”

“혹시나 재간택을 보게 된다면 받게 될 예상 질문.”

“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하였지. 적을 알아야 승률을 높이는 법. 예상 질문 모두를 필사해 머릿속에 입력했다. 또한, 그에 따른 적절한 오답을 거기에 함께 적어 놓았으니.”

“……!”

“혹 어머니나 출타하신 아버지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이것을 보여드리거라.”

“아……. 예, 아씨.”

“응당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봉희를 만나러 갔다고 하면 이해해주실 것이야.”

언제 이런 것을 또 준비해놓았는지.

꽤 많은 종이에 빽빽이 쓰인 글자들.

이 모든 것을 밤새 준비했을 소진의 치밀함에 숙자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셔요, 아씨.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것입니까?”

“아니. 조금 눈 붙였어. 그럼, 얼른 다녀올게.”

“조심하셔요, 아씨!”

그러곤 대문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소진은 봉희와 관련된 기쁜 소식을 보은군이 가지고 왔기를 간절히 바랐다.

***

“아……. 그러셨군요.”

보은군과 만난 소진은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낯빛이 그 어느 때보다 밝지 못했다.

괜스레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보은군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소진을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속상하기만 했다.

“해서 궐에서는 제가 더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고. 대신 낭자와 밖에서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함께 조사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보은군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소진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대감. 이미 충분히 애쓰셨습니다.”

“낭자의 벗을 찾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꼭 찾을 수 있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보은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헌이 했던 말이 순간 떠올랐다.

보은군까지 나서서 일을 크게 벌였다가는 모든 것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소진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냉철하게 본다면 차라리 세자인 헌이 봉희를 찾는데 제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세자의 무엇을 믿고?

그러다 중궁전에 가, 영의정의 여식이 이러한 일로 교태전을 노리고 있다고 모두 다 발설하면 큰일일 터였다.

보은군과 자신은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고 어린 시절부터 워낙 비밀 없이 지내온 관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가 가는 쪽은 보은군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은군에게 무작정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진의 머릿속에서 두 생각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낭자?”

그때, 자신을 작게 부르는 보은군의 목소리에 그제야 소진이 얼굴을 들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한데 대감, 이제 더는 제 벗을 찾는 것에 도움을 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보은군은 잠시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소진을 응시하는 눈빛이 굳어가는 듯도 했다.

잠시 후, 보은군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혹…… 저하 때문에 그러십니까?”

소진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보은군은 그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예?”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빛났고 보은군은 말없이 피식,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저하께서…… 내 도움을 받지 말라, 그리하셨습니까?”

“아…….”

“이해합니다. 혹여 그러다가 중전마마와 좋지 않은 사이, 더 척을 질까 걱정돼 하신 말씀이겠지요.”

보은군의 말에 소진이 슬쩍 찻잔을 쥐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긋한 차의 향이 그녀의 입안을 부드럽게 감돌았다.

“교태전은 담이 꽤 높은 곳이라 들었습니다.”

소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보은군의 시선을 회피했다.

“굳이 그리 위험한 곳에 대감의 등을 떠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어 말하는 그녀의 반듯한 입술이 차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보은군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

“낭자께서 등을 떠밀어, 그 담을 넘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감.”

“내가 하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

“지금까지 늘, 그래왔습니다.”

어느새 보은군의 시선은 소진의 맑고 영롱한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도 이번에는 보은군을 똑바로 직시했다.

“내가 그러고 싶어 낭자와 이어온 관계이고…… 내가 하고 싶어 늘, 낭자를 도운 것이었습니다.”

보은군은 언제나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저 역시 대감을 돕고 싶어 도운 것이고 머무르고 싶어 함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로 인해 대감께서 곤경에 처하는 것은 싫습니다.”

소진은 보은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매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보은군의 입술도 곧 찬찬히 떨어졌다.

“낭자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보은군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소진의 눈길이 저절로 그에게 향했다.

“내가 하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늘 그랬듯이 말입니다.”

보은군의 선한 눈동자에 소진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느리게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러니 곤란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니.”

“대감, 하지만…….”

“염려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위험하지 않게 제가 잘할 테니 낭자께서는 저를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 벗을 찾는 데만 주력하시지요.”

그 말을 하는 보은군의 얼굴에는 미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자신을 이용하라는 말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소진은 그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될는지요.”

“당연합니다. 우선 사라졌다는 벗의 남편을 만나러 가봅시다.”

“안 그래도 오늘 봉희의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면 잘 되었네요. 제가 동행해드리지요. 거기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추려, 그 돈을 빌려주었다는 자들에게도 가봅시다.”

“아…….”

“대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 밖에서는 낭자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동행해주겠다는 보은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소진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보은군의 마음이 덩달아 환해지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하나 짐을 나눠 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는 것은 여전합니다.”

소진은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구겨 보였다.

“괜찮습니다. 마음 쓰는 것이 오히려 저를 더 섭섭하게 하는 것이래도요.”

보은군이 은은하게 웃어 보였다.

그 말에 마음이 놓이는 듯 소진이 멋쩍은 듯 미소를 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낭자.”

말없이 차를 들이켜는 소진을 가만히 부르는 보은군.

소진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손등에 차를 쏟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괜찮은 것입니까?”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소진은 환하게 웃으며 제 손등을 그에게 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말짱합니다. 그 난봉꾼 세자…… 아, 아니, 저하께서 괜히 그러신 것입니다.”

“아, 다행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걱정했던지.”

그러면서 보은군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소진에게 내밀었다.

작은 비단 주머니를 건네는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도 같았다.

소진은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무엇인지요?”

“손등에 붉은 기를 가라앉히는 약을 챙겨왔습니다. 한데…… 생각보다 자국이 남아 있지 않아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의 말에 소진은 환한 얼굴로 주머니를 챙겨 들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자운고를 건넸던 헌의 모습이 순간 눈앞에 그려졌다.

소진이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보은군이 살며시 그녀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낭자?”

“아…… 감사합니다. 이리 챙겨주셔서.”

애써 눈앞에 그려졌던 헌의 얼굴을 지워내며 소진은 비단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초간택은 어찌 되셨습니까?”

보은군이 조심스럽게 소진을 향해 물었다.

“나름 떨어지기 위해 애를 쓰긴 하였는데……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하께서 직접 간택장에 납시지 않았습니까……?”

“예, 그리하였습니다. 해서 아무래도 초간택에서 떨어지겠다는 제 계획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구요.”

두 사람은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행여 누가 들을까, 주위도 부지런히 살폈다.

“변수가 생긴다면…….”

어쩐지 보은군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재간택에 철썩 붙을 수도 있지요.”

“하면 어쩝니까?”

소진보다 더 걱정하는 듯이 이맛살을 구기며 그가 소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저는 반드시 떨어질 것입니다.”

“……낭자.”

“절대, 그런 망나니 세자의 신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주먹까지 꼭 말아 쥔 채 찻잔을 뚫어지라 노려보는 소진의 모습에 보은군은 그만 핏, 마음을 놓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난 낭자가 간택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소진을 바라보는 보은군의 눈이 평소와 달랐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소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대감……?”

“형님의 부인이 되지 마세요, 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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