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애 태우는 거, 맞는데.
2020.11.20.
“어푸……! 어푸!”
물에 빠진 아이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소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속에서 허둥대던 아이는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낭자! 낭자!”
헌은 보이지 않는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헌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갓과 겉옷을 풀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그러곤 아이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헤엄을 치기 시작하던 그때.
“……?!”
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진이 마치 민화(民話)에서나 나올 법한 인어처럼 물 밖으로 솟아올랐다.
물방울을 사방으로 훌뿌리며 그녀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아이가 있는 곳을 서둘러 확인하고는 다시 잽싸게 잠수하기 시작하는데.
“……낭자?”
대체 헌은 소진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인지.
그는 멍한 얼굴로 잠깐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위태로운 아이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푸하!”
다시 물 밖으로 솟아오른 소진은 단숨에 물속으로 가라앉던 아이를 품에 안아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뭐야. 헤엄을 칠 줄 알아……?”
별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녀는 한 손으로 아이를 보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물살을 가르며 못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끙차……! 봐, 괜찮은 것이야?!”
금세 밖으로 나온 소진은 잔뜩 겁에 질린 아이를 바닥에 반듯하게 눕히고는 뺨을 감싸 쥐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무사했다.
“예…… 예, 아씨.”
아이가 얼떨떨한 얼굴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소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따라 일어났다.
그러고는 화난 얼굴로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너희! 다시는 이 못가 근처에서 장난을 치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아씨.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소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서둘러 흩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차림이…… 요상하다?
분명 풍성하고 어여쁜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얇은 속치마만 덩그러니 입고 있었다.
물에 빠지면서 벗겨진 것일까. 헌은 물속에서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쭉쭉 짜던 소진이 빙그르르 돌아 헌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쿵’ 부딪혔다.
그러자 소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하……. 거기서 무엇 하십니까?”
차마 소진과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고 그는 그저 물 위에 둥둥 떠, 물살만 가르고 있었다.
“헤엄을…… 잘 치십니다?”
“어릴 때 동네 벗들하고 개울가에서 많이 놀았거든요.”
“아…….”
반가의 규수가 어린 시절부터 개울가에서 헤엄을 치면서 놀았다니.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를 여인이다.
헌은 핏, 헛웃음이 터지는 것 같았다.
“속히 나오십시오. 고뿔에 걸리시겠습니다.”
이미 자신의 몸도 다 젖었으면서, 그건 개의치 않다는 듯 오히려 소진은 헌을 걱정하고 있었다.
멋쩍어진 그는 다시 못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방향을 틀었는데, 돌아서던 소진이 다시금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 저하. 물속에 들어가신 김에 저기…….”
“……?”
“제 치마 좀 건져주시겠습니까?”
소진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고 헌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소진의 치마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헌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다시금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체 치마는 왜 저렇게 된 겁니까?”
그렇게 말하며 헌이 그녀의 치마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소진은 대수롭지 않게 핏, 웃으며 위의 흠뻑 젖은 옷을 비틀어 물기를 짜냈다.
“벗었습니다.”
벗었다는 말에 치마를 들고 물 밖으로 나오던 헌은 놀라, 흠칫했다.
“벗겨졌단 말입니까?”
잘못 들었나 싶어 그가 재차 물었는데 소진은 헌을 똑바로 직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소인이 직접 벗었습니다.”
“왜요?”
“헤엄을 치기에는 치마가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해서 아까 물에 빠지자마자 벗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또 얼마나 순진하고 차분해 보이는지.
그래서 아까 물에 빠지자마자 그녀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헌이 애타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을 때, 소진은 이미 물속에서 헤엄치기 위해 치마를 벗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 대단한 여인이야.”
어찌 저리 예쁜 얼굴의 규수가 하는 행동은 웬만한 사내보다 더 대담한지 헌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곧, 그도 물 밖으로 빠져나오고 두 사람은 예상치도 못하게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고야 말았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래도 외간 남자 앞에서 속치마는…….”
그는 어색한 듯 헛기침을 뱉어내며 소진에게 젖은 치맛자락을 슬쩍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치마를 받아든 소진은 탈탈 털어대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헌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좀처럼 소진을 놓을 줄 몰랐다.
힘껏 치마를 털어낸 소진이 그제야 조심스럽게 등을 돌려 가슴 위에 치마끈을 꽁꽁 동여매었다.
“어찌 안 부끄럽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생존을 위한 탈의인 것을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웃으며 헌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아까 가마에서 내리던 때의 고운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헌은 그녀가 예뻐 보였다.
고작 젖어서 볼품없는 모습이 된 여인이 예쁘게 느껴질 줄이야.
그 곱다고 입소문 난 애월루 명기(名妓)들의 유혹에도 무감각하던 그였는데.
단지 꽃이 예쁘다, 나비가 곱다. 이런 것들과 같은 느낌일까.
그는 한참이나 젖어서 반짝이는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곧, 소진의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저하께서도 헤엄을 칠 줄 아십니까?”
이 나라의 왕세자가 물에 빠져 본 적도 없을 텐데.
고작 물이라고 해봤자 허리춤까지 밖에 오지 않는 온천수에 몸을 담가 본 것이 다였을 것인데, 그는 꽤 헤엄을 잘 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그의 생모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으로,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왕세자이지만 언제 어느 때, 위협을 받을 줄 모른다고.”
“……아.”
“해서 어린 시절 행궁을 가서 어머니께 몰래몰래 헤엄치는 법을 배웠지요. 덕분에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이 나라의 왕세자가 생존을 위해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진은 조금 굳은 얼굴로 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곧, 헌이 그녀와 자신의 젖은 옷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술을 뗐다.
“한데 인제 어쩌지요? 이리 다 젖었으니.”
소진도 그의 곁에 성큼 다가가 젖은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게나 말이어요. 저하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틀려먹은 것 같네요.”
“우선 옷부터 말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예? 환궁하시지 않고요?”
“그러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아…… 그렇네.”
다과 모임을 간다고 했는데 홀딱 젖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 영의정이 경을 칠 테였다.
난감해진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일단 따라오시지요.”
혼자 곰곰이 생각하던 헌은 무언가 좋은 수가 생각이라도 난 듯, 그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온몸이 젖은 채로 산길을 가로질러 걸었다.
***
“여기는……?”
조금 더 걷다 보니, 황실 사냥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소진은 조금 의아하다는 얼굴로 사냥터를 둘러보다가 헌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느리게 웃으며 텅 빈 사냥터를 돌아보았다.
“실은 오늘 낭자와 이곳에서 활쏘기할 참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활이라니……! 설마 나를 위해서?’
헌과 마주하고 처음으로 그녀의 심장이 ‘설렘’이라는 확실한 감정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낯빛이 확연히 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헌도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리 좋아하실 줄 알고. 나름 준비한 것인데.”
“……아.”
“우리가 이렇게 젖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말에 소진이 겸연쩍게 뺨을 쓸며, 웅장한 정자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사냥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정면에는 활 연습을 하기 좋게 과녁판도 놓여 있었다.
소진에게는 이곳이 바로 새로운 세상이자, 늘 바라던 낙원과도 같았다.
정식으로 활을 쏘는 법을 배워본 적은 없었다.
늘 영의정이 활을 쏘는 모습을 뒤에서 몰래 숨어 보고, 또 서책을 통해 익힌 것이었다.
“부러…… 저를 위해 이곳으로 오시려 한 것입니까?”
소진은 곁에 갖춰져 있는 활과 살을 만지작거리며 헌을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차분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소진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그 역시, 성큼 그녀의 곁에 다가와 서며 뒷짐을 지었다.
“그때 활을 쥐는 모습을 보고 조금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물론 지금도 훌륭한 명사수(名射手)의 자태이긴 했습니다만.”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던 그가 별안간 소진을 내려다보며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가 그녀에게 닿자 어쩐지 소진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같았다.
“명사수는 아니어요.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 것을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아쉬운 듯, 활 끝만 만지작만지작했다.
활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아쉬움이 그득했다.
“이리 젖은 채 활을 만지면 활도 눅눅히 젖어 제대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
“다음을 기약할까요?”
헌의 물음에 소진은 멈칫하고 말았다.
그와의 다음이라…….
언제나 그녀를 머뭇거리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활쏘기는 영, 아쉬웠다.
“본의 아니게 이번에는 협박이 아니라, 회유로 낭자와의 다음을 얻어내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 말에 소진은 그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들으면 저하의 애를 태우는 모진 여인이라 손가락질하겠습니다.”
그녀는 젖은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의자 옆으로 커다란 발이 드리워져, 쏟아지는 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저 발을 걷으면 햇살이 밀려와 젖은 옷을 잘 말려줄 것만 같은데.
소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한창 올려다보고 있는데, 헌이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허리를 구부려 그녀의 옆에 우뚝 솟아있는 팔걸이를 짚으며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앗……!”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를 피하려고 그녀가 슬금 비켜났지만, 이번에는 헌이 다른 손이 다른 쪽 팔걸이를 짚었다.
그의 품 아래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소진.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어찌 이러시는지…….”
그러자 곧, 헌의 젖은 입술이 반듯하게 벌어졌다.
“애태우는 거, 맞는데.”
“예?”
“낭자가 내 애를 태우고 있는 거, 맞습니다만.”
“……아, 저하.”
“만남을 위해 협박을 하는 것도, 회유를 해보는 것도 모두 낭자가 처음이니까.”
그 말을 하는 헌을 저도 모르게 올려다보는 소진.
두 사람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것만 같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다, 스르륵 눈길을 그녀의 입술 위로 떨어뜨렸다.
그러곤 소진의 붉은 입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떼는 쓰지 않겠습니다.”
“…….”
“낭자 마음 가는 대로 하시지요. 조르는 건, 멋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헌을 낮게 미소를 흘렸다.
그러다 한껏 굳어버린 소진의 의자 바로 뒤편에 있는 끈을 풀어 발을 걷었다.
‘아…… 발을 걷으려고……?’
자신을 홀리려고 갑자기 성큼 다가온 줄 알았는데 발을 걷기 위함인 듯했다.
멋쩍어진 소진은 흠, 흠 소리 나게 헛기침을 뱉어내며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그는 언제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냐는 듯, 발을 걷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가 볕이 잘 듭니다. 해서 활을 쏠 때는 발을 걷고는 하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걷어야 할 것 같아서.”
“예에…….”
“좀 앉아 있다 보면 옷이 금방 마를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이 그녀의 옆에 앉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서책 몇 권을 집었다.
그러곤 어쩐지 말수가 부쩍 없어진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여기서 종종 서책을 읽기도 하거든요. 이미 낭자가 읽은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적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독서만 한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서는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소진은 그런 그를 한번, 가지런히 정돈된 활과 살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와 마찬가지로 서책을 펼쳤다.
그러곤 무심하게 입술을 벌렸다.
“하면 다음번에는 활쏘기를 가르쳐 주실 것이지요?”
돌아보니 소진은 서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서책을 응시했다.
“기꺼이 그러지요.”
“하면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환한 얼굴을 한 채, 서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해서 다음을 또 기약하신 것입니까?”
윤현의 물음에 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영의정 대감이나…… 전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어쩔 것이냐? 남녀 사이에 정을 나누어 보겠다는데, 그것을 어찌 막으려고.”
“하오나.”
“아직은 내가 이 조선의 왕세자다. 영의정이라도 함부로 날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사나운 목소리가 동궁에 막 발을 디딘 헌의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다.
“또 혜민서를 핑계로 기방에 가 술을 퍼마시고 온 것이냐?!”
헌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헌의 아비이자 조선의 왕, 이성(李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동궁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서책들을 주웠다.
그러곤 동궁 안으로 들어서는 헌을 향해 냅다 던졌다.
서책이 헌의 벌어진 어깨를 툭, 치고 바닥 위로 처박혔다.
그러자 윤현이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은 저하께서 혜민서에 들렀다가 곧바로 입궐하시는 길이옵니다, 전하!”
“듣기 싫다! 너를 두고 떠도는 소문들이 무성한데, 겨우 오늘 하루 곧바로 입궐 한 것으로 그간의 소문을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
“대체 언제까지 이리 정신을 못 차리고 흥청망청 살 것이냐! 대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냐!”
“…….”
“너는 이 나라의 왕세자다! 나를 대신해 이 나라의 보위를 이을 왕세자란 말이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분노가 왕의 가슴에 차올랐다.
하지만 헌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입만 다문 채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잇지 않는 그를 응시하던 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망나니처럼 사는 것인지 억장이 무너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헌은 무겁게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붉어진 용안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수척해진 왕의 눈에서는 생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하지만 그 얼굴에는 그 자리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호색한에, 주정뱅이에.”
“…….”
“이제는 하다못해 기방까지 드나드는 왕세자라.”
“…….”
“그것이 어찌 세자라는 것을 알고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왕의 호통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동궁 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휙 날아들었다.
“전하, 중전마마 납시었사옵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헌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중전이라는 말이 귓가에 닿자마자 헌을 근엄하게 혼내던 왕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모시어라.”
굳게 닫혔던 동궁의 문이 열리고 배가 제법 부른 중전 신 씨가 뒤뚱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괜찮습니까. 세자?”
“…….”
“오늘도 기방을 다녀온 것입니까. 여인과 술이 생각이 나거든 이 어미에게 말하라 하지 않았어요, 세자. 하면 한양 최고의 여인들과 술을 이 동궁에 은밀히 대령하겠다고요.”
“…….”
“젊은 패기에 끓는 열정은 알겠다만 왕실의 체통은 지켜주셔야지요, 아드님. 전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시겠습니까.”
간드러진 목소리로 헌을 다독이는 중전 신 씨.
그녀는 세자, 헌과 기껏해야 네 살 정도 차이 나는 어린 여인이었다.
정비(正妃) 순렬왕후가 죽고 그 자리를 대신해 들어온 대제학 신 씨의 여식.
헌은 자신을 살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중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당의 위로 봉긋 솟은 배를 바라보며 자신의 팔을 다독이는 중전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치우십시오.”
헌의 계모이자 작금의 교태전 안주인이 된, 그녀의 뱃속에는 왕의 또 다른 핏줄이 자라고 있었다.
자신에게 쌀쌀맞게 구는 헌의 시선이 자신의 배에 닿아 있는 것을 안 중전은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곤 보란 듯이 그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곧 아우도 태어날 텐데, 아우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셔야지요, 세자.”
그 말에 헌은 붉은 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그때, 중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의 총명하던 눈빛이 죽고 말았다.
곧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중전 신 씨를 향해 어린아이처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