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왕세자의 명입니다. (13/125)

13. 왕세자의 명입니다.

2020.11.13.

“……예에?!”

그 말에 소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낯 뜨거운 말을 뱉고도 그의 얼굴은 오히려 무심했다.

“생판 얼굴 모르는 규수가 나의 빈이 되는 것보다, 그대가 나의 반려가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

“반가의 규수들도 얼굴 모르는 이와 혼인 하기가 꺼려져, 부러 정인을 만들기 위해 연을 쌓는다 들었습니다.”

“한데요?”

“우리는 부러 쌓을 필요도 없고 이미 닿은 연이니 이제 쌓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헌의 말에 소진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면 소인의 의사는요?!”

“……?”

“저의 뜻은 안중에도 없사옵니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헌이 다시금 허리를 숙여 소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낭자는 내가 싫습니까?”

그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소진은 헛기침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슬쩍 말꼬리를 돌리며 빙빙, 먼 산을 바라보았다.

“시각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나 보겠나이다.”

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그녀가 등을 돌렸는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빙그르르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아……?!”

놀란 소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왜 대답을 못 하는 것입니까?”

그의 물음이 닿자 그녀의 몸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내 뜨거워진 몸으로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왜지?”

“이 나라의 왕세자이신 저하께 싫다고 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요?”

그녀의 말에 헌이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빤히 훑어보았다.

“역시 어렵습니다.”

“무엇이요?”

“낭자의 마음을 얻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헌은 쥐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슬쩍 돌려 손바닥이 보이게 했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소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헌은 그녀의 손바닥에 작은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만져보니 안에 딱딱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소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바닥에 놓인 것을 한 번 헌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여전히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낭자의 그 어려운 마음을 얻기 위한 나의 최선?”

“……예?”

그의 대답에 소진이 멍한 얼굴로 비단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헌은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주머니를 꼭 쥐게 했다.

“자운고입니다. 손등에 흉이 지지 않도록 잘 바르십시오.”

“아.”

“이걸 전해주려 낭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저하.”

병 주고 약 주고 인가 싶어,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소진이 물러났는데 그가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나흘 후, 오시(五時) 정자나무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말에 소진의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간택 때라 잠행이 어렵지만, 그날은 정기적으로 혜민서를 들르는 날이라 외출이 가능한 날이거든요.”

“…….”

“이번에는 꼭, 나오실 거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이젠 세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마냥 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겠다는 대답은 선뜻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헌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솟았다.

“이번에도 대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까?”

“…….”

“내 말이 너무 어려웠나.”

어쩐지 그의 뺨이 딱딱하게 굳는 것도 같았다.

소진은 용기 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러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참으로 저를 세자빈으로 간택하고자 이러시는 것입니까?”

“간택은 간택이고. 이건 별개였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은 차가운 것도 같았다.

“내가 세자라니, 나오기가 꺼려지는 겁니까?”

그렇게 묻다, 헌은 피식 냉소를 흘렸다.

“아…… 하긴, 내가 세자가 아니었을 때도 낭자께서는 발걸음하지 않으셨지.”

“그건.”

“다신 안 보겠다, 볼 일 없을 거라 하셨습니까?”

“…….”

“한데 어쩝니까. 우리가 이리 또 마주하고 있는데.”

그 말이 꼭 아무리 소진이 발버둥을 쳐도 헌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소진은 묵묵히 그를 올려다보다,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저하를 봐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

“괜한 구설에 오르기도, 또한 괜한 연을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선을 긋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헌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괜한 연이라……. 무엇이 겁이 나 이러는 건지.”

“저하.”

“나는 단지 잠행을 나간 김에 낭자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뵙자고 하는 것입니다만.”

“…….”

“하긴 이 이유가 그대를 그곳까지 이끌기에는 영, 부족하지요?”

소진은 굳은 얼굴로 그의 입술만 뚫어지라 응시했다.

저 붉고 탐스러운 잇새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올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됐다.

그때, 그의 입술이 여유 있게 벌어졌다.

“그렇다면 왕세자의 명.”

“……!”

“이것이라면 이유가 되겠습니까?”

헌은 소진이 그어 놓은 선을 가볍게 넘나들고 있었다.

“그건 이유가 아니라 협박이지 않습니까?!”

불공평하다는 듯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자운고를 소맷자락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씩씩대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헌은 그런 그녀가 귀여워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부러 더 근엄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그가 헛기침하며 말문을 열었다.

“하면 오지 않으려는 그대의 이유를 들어봅시다.”

“말하기 싫습니다.”

“아, 이유를 말하기 곤란한 거라면…….”

그녀의 철벽에도 헌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혼인하셨습니까?”

허무맹랑한 그 질문을 하는 그의 얼굴은 무감각했다.

“예?! 그럴 리가요?”

“하면 혼인할 이가 따로 있습니까?”

“따로 있는데 제가 오늘 간택장에 왔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

“……?”

“정인이 있습니까?”

정인이라는 말에 순간 소진이 멈칫했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있다고 거짓말을 할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먼저 벌어졌다.

“당연히, 없겠고.”

“……왜 당연히 없습니까?”

“없는 얼굴인데?”

“제 얼굴이 뭐가 어때서요?!”

어이없다는 듯 소진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격이 선머슴 같아서 그렇지, 얼굴은 꽤 예쁜 축에 속했다.

황당하다는 그녀의 반응에 그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곤란하다는 듯이 이마를 쓸었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없다는 듯한 표정이라 그리 말한 것인데?”

“그러니까요. 내, 내가 언제 그런 없,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고요……? 참나.”

괜히 제 발 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진은 서둘러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헌의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지었는데? 없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황당한 얼굴?”

“아닙니다. 저하께서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하면 있습니까, 정인?”

그가 다시 묻자, 그녀는 난감하다는 듯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러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흠, 흠흠……!”

그러자 헌이 웃음을 꾹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되었습니다, 그럼.”

“……뭘 말씀입니까?”

“오지 못할 이유 없는 것 같으니 나오십시오.”

소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는 헌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굳건했다.

“비가 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하!”

“설마 왕세자를…… 바람맞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비까지 맞게 할 것은 아니겠지…….”

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으락푸르락해진 그녀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하지만 그 강직한 입술에서는 ‘예,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헌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아……! 아바마마?”

갑작스러운 그 말에 불만으로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놀라, 팽팽해지고 말았다.

“아바마마……요?!”

아바마마라 함은, 이 나라의 군주를 뜻하는 바.

소진은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려 잽싸게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헌은 그런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허, 아무리 전하께서 오고 계신다 하여도 대답을 하고 가셔야지요.”

“놓아주셔요! 들키면 큰일입니다……!”

“어차피 궁녀 옷도 입었겠다. 뭐, 하는 수 없지요.”

그는 더욱 그녀의 옷깃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바마마를 뵙거든, 대전 궁녀라 하시지요. 태연하게 잘하실 수 있지요?”

그녀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하니 제발 놓아 주세요……!”

그제야 헌은 피식, 굳혔던 얼굴을 풀며 흡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책도 즐겨 읽으시고 공자의 가르침도 새겨들으시는 분이니 남아일언(男兒一言)만 중천금(重千金)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의 말에 소진은 제 옷깃을 꾹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떼어냈다.

그러고는 울상을 지은 채 서둘러 대답했다.

“예! 알고 말고요. 여아일언도 중천금입니다! 제 말에 책임을 지겠……?!”

그렇게 외치며 그녀가 황급히 달음박질을 쳤는데, 가만. 뭔가가 이상하다.

소진은 치맛자락을 꼭 쥔 채 달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설마 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오직 헌만이 뒷짐을 진 채, 여유 있게 곤룡포를 쓸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가 어디에?”

임금은커녕 궁인 한 명조차 보이지 않았다.

휑한 흙길을 돌아보며 소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제는 거짓말까지?”

그러자 헌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일렀다.

“망나니에 호들갑까지 떠는 사내자식이 거짓말이라고 못할까.”

“저하!”

“그럼 그날 보지요. 여아일언중천금, 이 가슴에 새기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소진을 가볍게 스쳐 지났다.

피식하던 그의 낮은 웃음만이 남아 소진의 귓불을 뜨겁게 움켜쥐고 있었다.

***

오랜 발길이 끊겨 어두침침하기만 한 어느 한 전각.

대전에서 멀리 떨어진 처소에 멈춰선 보은군의 얼굴이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보은군 마마……! 어찌…….”

그를 발견한 상궁이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 들어 계시는가.”

“……예, 한데. 마마께서 연통을 넣지 않으셨는데 어찌 발걸음을.”

그때였다.

처소 안에서 낮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뫼시어라.”

그러자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방, 한가운데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던 민 소용(昭容)이 책을 덮었다.

보은군 외에는 누구도 찾지 않는 전각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의 생모(生母) 민 소용이었다.

“연통을 넣기 전까지는 발걸음 하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저하의 국혼으로 궐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하니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심해야 한다 이르지 않았습니까?”

“압니다. 아는데…… 급히 여쭈어볼 것이 있어, 들른 것이옵니다.”

그 말에 민 소용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러곤 상궁에게 눈짓을 해 보이자 곧 처소 안의 모든 창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행여 보은군과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싶어, 철두철미하게 단속하는 것이었다.

“말해보세요.”

“소진 낭자의 청이 있었습니다.”

“……소진 규수?”

소진은 민 소용이 재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제 아들을 살릴 마지막 보루 같은 존재였다.

소진의 이름에 그녀는 굳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교태전……. 그 안에 강제로 궁인이 된 벗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 소용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 됩니다.”

더 들어보기도 전에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는 그녀.

보은군은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감은 그녀를 빤히 살폈다.

무엇을 알고 이러시는 걸까,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교태전은 아니 됩니다.”

“어머니.”

“절대 넘어서도, 또한 엿보아서도 아니 되는 곳입니다.”

“소진 낭자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소자가 중전마마께 안부 인사를 드리러 가며 궁인들을 조금 살펴볼까 하는데…….”

그 말에 민 소용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쩐지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 같았다.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까?”

“어째서…….”

“중전마마께서 아들이라도 덜컥 낳으시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저희에게는 영의정 대감이 있지 않습니까?”

민 소용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졌다는 듯이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중전마마께서 아들을 낳으시면 영의정은 우리의 손을 놓을 것입니다.”

“……예?”

“적통인 중전의 후사를 버리고 우리의 손을 잡는다……? 그건 입에 발린 소리였지요.”

“…….”

“행여 중전마마께서 아들을 낳지 못할까, 만일을 대비해 우리를 쥐고 있었던 것일 뿐. 그쪽이 아들을 낳게 되면 영의정은 그 아들을 세자로 세울 것입니다.”

“……!”

“그렇게 되면 굳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제 딸을 이 궐에 들이겠습니까? 언감생심, 군부인으로 만들려 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세자의 국혼에 사주단자까지 내, 초간택까지 임했습니다.”

“…….”

“까딱하면 세자의 빈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으로 영의정은 중전마마와 우리를 이 궐에서 몰아내겠지요.”

민 소용의 말에 보은군은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소진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녀가 입게 될 상처가 걱정되었다.

“살아서 나가려면 교태전을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편으로만 돌려세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해야지요. 그래야 가문과 우리는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

“하니, 교태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잠자코 있으세요. 나서도 소진 규수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해서 매번 그렇게 천대를 당하시면서도 잠자코 계셨던 것입니까, 어머니.”

“보은군.”

“이렇게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서…… 그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이곳에서……. 어머니보다 한참이나 어린 중전에게 천대까지 당하시면서…… 사셨던 것입니까?”

그 말을 하는 보은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두 주먹을 굳게 움켜쥐며 입술을 악물었다.

“이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

“연명(延命)하는 것이지요.”

싸늘한 그 말만을 남긴 채, 그는 민 소용의 처소를 나서고 말았다.

***

“알아보라는 것은.”

혜민서에 들렸다, 소진을 만나러 정자나무 언덕으로 향하는 길.

헌은 윤현을 돌아보며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근래 교태전에 궁인들이 여럿 들어오기는 했습니다만…….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사옵니다.”

“정식 절차를 밟고 뽑은 궁인들이라던가.”

“예, 강제는 있을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이번 궁인은 지원을 받아 꼼꼼하게 심사를 거친 후, 뽑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헌은 느리게 입술을 쓸었다.

대체 그런 교태전에 왜 소진의 벗이 있었다고 하는 것일까.

보은군까지 나서서 교태전을 살필 요량이니 자칫하다가는 중전이 이 일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설령 교태전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해도, 진실을 밝혀내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그는 짐짓 어두운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정자나무 언덕이 보이고 멀찌감치서 바라보니, 언덕 위가 휑했다.

순간 헌의 얼굴이 비식 구겨졌다.

“또……?”

소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가 걸음을 우뚝 멈췄는데 갑자기 그의 앞에 가마 하나가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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