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세자 저하, 죽여 주시옵소서! (11/125)

11. 세자 저하, 죽여 주시옵소서!

2020.11.06.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소진도 보은군도 모두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았다.

하지만 강렬한 햇살 때문에 그녀는 뒤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다.

키가 훤칠하고 푸른색의 옷을 입은 것 같은데, 얼굴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햇볕만 세차게 내리쬐어 그녀는 눈살만 잔뜩 찌푸렸다.

“누구…….”

그러자 그 사내가 걸음을 옮겨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해를 자신의 몸으로 가려주었다.

그제야 그늘이 생기며 그녀가 제대로 눈을 뜰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소진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난봉꾼 선비였다!

“……아?”

하지만 그 차림새가…… 매우 해괴하다?

소진은 놀란 얼굴로 입을 조금 벌린 채, 헌의 차림새를 살폈다.

푸른색 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서는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뚫어지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세자…… 세자 저하?”

그의 복색을 한참 살피며 그를 위아래로 빤히 훑던 소진은 순간, 미간을 홱 구겼다.

소진의 곁에 서 있던 보은군은 이미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미처 보은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종친 선비님?”

“초간택이 한창인 것으로 아는데…… 예서 무엇 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그 괴상한 궁녀 복장은 또 무엇이고.”

헌은 무지근하게 입을 열며 궁녀 차림을 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그 차림새만큼이나 근엄하고 위엄 있었다.

이제 자신이 세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소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살려 달라, 그간의 무례를 용서하여 달라, 빌 것이었다.

헌의 한쪽 눈썹이 흥미롭게 솟았다.

그때, 그의 예상대로 소진이 경악하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 지금 그쪽이 내 차림을 지적할 때입니까?!”

“……?”

“세상에, 이게 다 무엇입니까? 이거는 세자 저하의 곤룡포가 아닙니까?!”

“아니, 낭자.”

“아휴,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 어머, 이 생생한 용 무늬 좀 봐. 진짜 곤룡포 같네?”

그 때문에 당황한 것은 소진이 아니라, 헌이었다.

헌은 상상도 못 한 그녀의 반응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소진이었다.

곧 그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홱,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세자 놀이가 덜 끝난 것입니까? 아니, 선비님께서는 무슨 장난을 이리 위험하게 하시어요? 예가 어딘 줄 알고 이런 차림으로…… 아니, 이러다가 진짜 세자 저하라도 마주치면 어쩌시려고.”

“……뭐라?”

“하여튼…… 나보다 더합니다. 나는 그래도 궁녀 차림이지만 그쪽은 이 나라의 국본(國本)이신 저하 행색을 했으니, 아무리 종친이라지만 참변을 면하기 힘드실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보은군 대감?”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의 동의를 구하려 소진이 옆에 서 있는 보은군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한껏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순간, 소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헌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서는 소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사가에서도 헌이 세자라는 거짓말을 한 번 했던 터라, 소진은 당연히 이번에도 헌이 장난을 치는 건 줄 알았다.

“아니, 보은군 대감. 어찌…….”

보은군은 자신을 보며 당황해하는 소진의 옷깃을 슬쩍 잡아끌었다.

그러곤 나지막이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저하……십니다, 낭자.”

“예?!”

그렇게 말하던 보은군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소진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헌을 향해 입술을 뗐다.

“저하를 뵈옵니다.”

동시에 소진의 눈동자가 커지고 말았다.

세자…… 저하라고?!

이 호색한 난봉꾼이 이 나라의 왕세자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는 경악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황급히 두 손을 모으고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구부렸다.

“저하……! 죽여 주시옵소서!”

“…….”

“소, 소녀는…… 저하인 줄 꿈에도 모르고……! 그때, 사가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던지라! 죽여 주시옵소서, 저하!”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진은 헌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덩달아 보은군도 난감하다는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헌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던 헌이 소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고개 숙인 소진은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가슴을 떨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그리고 자신의 바로 코앞에 멈춰선 헌의 신발.

소진은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왜 자꾸 나에게 죽여 달라 하십니까, 낭자?”

“……예, 예?”

“나는 내 기분이 언짢다 하여, 누구를 죽이는 그런 무자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상과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그득했다.

성을 내며 벌을 내릴 것이다, 분노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소진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대를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보면 내가 낭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인데, 서운하지는 않으신지요?”

그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그러자 낯선 그의 모습에 보은군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헌을 돌아보았다.

어째서, 왜.

소진에게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지 보은군의 가슴이 착잡해졌다.

“서운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데……. 간택장에 있어야 할 낭자께서 어찌 이런 차림으로 교태전 앞에 있는지요.”

“그, 그것이…….”

“그것도 보은군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면서 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보은군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헌과 눈이 마주친 보은군은 서둘러 눈길을 거두며 말문을 열었다.

“사정이 있어, 잠깐 그리한 것입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저하.”

“괘념치 말아라……?”

되묻는 헌의 목소리가 꽤 날카로웠다.

“말씀드렸다시피 소진 낭자와 저는 오랜 벗 사이입니다. 그럴 만한 일이…….”

무어라 대답하는 보은군의 말허리를 헌이 잘라냈다.

그러곤 언성을 높였는데 그의 반듯하던 입매가 핏, 비틀렸다.

“어찌 괘념치 않을 수가 있는가!”

그의 호통에 소진은 얼어붙고 말았다.

“……저하.”

“이제 이 규수는 너의 벗이 아니라…… 나의 사람이다.”

“아.”

“사주단자를 올려 간택에 참여한 여인을 왕족인 네가 벗이라는 이유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 너답지 않게 경거망동을 하는구나.”

싸늘한 헌의 말에 잠자코 고개만 조아리고 있던 소진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속히 보은군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헌의 세찬 시선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자 헌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소진에게 닿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보은군의 옷깃을 잡은 그녀의 손 위로.

“아니옵니다, 저하! 실은…… 소인이 보은군 대감께 청을 드린 것입니다!”

“…….”

“그때도 저하께 말씀드렸지만, 이곳에 제 벗이 있기에…… 저의 힘만으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은군 대감께 부탁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오니 보은군 대감을 나무라지 마세요.”

어쩐지 보은군을 감싸는 소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헌은 색깔 없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해서 사주단자를 올린 것이고, 해서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떨어질 것이고?”

“……아, 저하. 그것은…….”

“한데 나 역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낭자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웃음기를 지워내고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헌에게서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이 풍기고 있었다.

가히 이 조선의 왕세자다운 위엄이었다.

처음 보는 난봉꾼 선비의 차가운 모습에 소진은 몸을 파르르 떨었지만, 보은군은 그것이 헌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더니 헌은 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보은군의 옷자락을 쥔 그녀의 손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쪽이 아니라 나를 잡아야지.”

“……!”

“보은군을 위한다면. 아니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소진은 슬쩍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마디는 소진은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실히 선을 긋는 것이었다.

그때, 헌을 쫓던 궁인 무리가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저하! 한참을 찾지 않았습니까. 왜 소신에게 말도 없이…….”

그의 뒤로 우르르 몰려드는 많은 궁인을 보고서야 소진은 실감이 났다.

정말 난봉꾼 선비가…… 왕세자였구나.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낭떠러지 앞에 간신히 서 있는 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감히 세자 앞에서 초간택만 임하고 떨어질 것이라는 망언을 하고 말았으니.

이 사실이 영의정 귀에 들어가면 아마 노발대발할 것이었다.

소진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교태전이 아닌, 간택장으로 향할 것이다.”

그 말을 하는 헌의 시선은 소진을 집요하게 훑었다.

순간 보은군도, 그리고 소진도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헌의 뒤에 서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궁인들도 갑작스러운 그의 결정에 수군거리고 있었다.

“가, 갑자기 간택장은 어찌…….”

강 내관이 불안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헌은 소진을 빤히 내려다보며 뒷짐을 지었다.

“간택장에서 부정행위가 나돈다는 제보를 받았다.”

“아, 아니! 부정행위요……?!”

“신성한 간택장에서 감히 부정행위라니.”

그 말에 소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떨어지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도 부정행위라면 부정행위라고 할 수 있으니 그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한 대비마마를 대신해, 내가 직접 초간택을 참관할 것이니 앞장서거라.”

부정행위라는 말에 강 내관은 더 묻지 않고 속히 길을 잡았다.

보은군은 아뿔싸, 큰일 났다는 얼굴로 소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넋이 나간 채로 돌아서는 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자…… 어찌합니까?”

그러자 소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아무래도 세자 저하께 찍힌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때, 앞서가던 헌이 걸음을 멈추고는 휙 뒤를 돌아 소진을 응시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오금이 저렸다.

“뭐 하느냐. 속히 따라오지 않고.”

무미건조한 그의 음성에 소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궁인 복장을 한 소진을 이젠 대놓고 궁녀 취급하는 그였다.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꾹 쥐고는 후다닥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강 내관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저하…… 웬 궁녀입니까?”

“간택장에서 벌어지는 부정행위를 내게 제보한 궁인이다.”

“아…… 초간택 때문에 선발된 궁인들인가 봅니다. 어쩐지 낯선 얼굴이라 했습니다.”

“서둘러 가자.”

헌은 소진에게 속히 오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녀의 한숨으로 기라성 같은 궐 담벼락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저 난봉꾼 자식이 세자라니. 반드시 이 간택에서 떨어지고 말 거야. 절대 저 자식의 빈이 될 수는 없어.’

그렇게 다짐하는 소진의 눈빛이 불같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보은군의 눈길도 뜨겁게 탔다.

그의 가슴은 이미 다 타, 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

“아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측간 앞에서 소진을 기다리고 있던 숙자는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간택 복을 건넸다.

“만났어요? 어찌 되었습니까? 하도 늦어서 무슨 변이라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

“……숙자야, 그냥 나 확 도망쳐버릴까?”

어두운 낯빛의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숙자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 난봉꾼 선비가 글쎄…….”

무슨 말을 하려다 소진은 포기하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튼, 일이 어렵게 됐어. 초간택에서 꼭 떨어져야만 하는데.”

“지금까지 아씨 잘하셨어요. 아까 그 걸으실 때도 너무 자연스럽게 도자기도 잘 깨뜨리셨고요. 그걸 지켜보던 상궁 마마님들의 표정을 아씨께서도 보았어야 했는데……! 한 상궁 마마님은 쯧, 혀까지 차셨다니까요?”

“…….”

“이제 다과상 받는 것만 남았으니 잘 해내실 수 있을 것이어요. 그게 아가씨 주특기였잖아요. 알죠? 언제 흘렸는지도 모르게 부스러기 흘리기, 손은 눈보다 빠르다!”

소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 주먹을 쥐고 으쌰, 흔들어 보이는 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휴…….”

그녀는 그저 깊이 한숨만 내쉰 채 규수들이 속속히 모여들고 있는 간택장을 바라보았다.

곧 저곳에 세자가 들이닥쳐 간택 현장을 지켜볼 것이었다.

지금까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실수를 연발해 감점 요소를 많이 만들었지만 남은 과제가 문제였다.

의외로 실수한 여인들이 많아, 소진의 실수는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테였다.

마지막 다과상 먹기에서 통과 여부가 갈릴 것 같은데…….

헌의 눈에 띄지 않고 잘, 탈락할 수 있을까?

소진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지고 있었다.

“간택을 재개하겠습니다! 규수들은 속히 모여 주시옵소서!”

간택이 시작됨을 알리는 상궁의 목소리가 들리고 소진은 긴장한 얼굴로 간택장에 들어섰다.

아까와 같이 상궁들이 쭉 앉아 규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세자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오기 전에 서둘러 간택이 진행되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준비해 두었던 다과상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간택에 임한 규수들 앞에 차례대로 놓이는 다과상.

모두 긴장한 얼굴로 잘 차려진 다과상을 내려다보았다.

소진 역시, 부자연스럽게 침을 삼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 드십시오.”

상궁의 목소리가 떨어지고 간택장 안의 규수들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진은 주위를 휘휘 살피며, 아직 헌이 도착하지 않은 걸 알고는 서둘러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경망스럽게 속히 경단을 집어 입에 넣으려던 찰나…….

“세자 저하 납시오……!”

간택 장을 뒤흔드는 강 내관의 목소리.

간택 장 안의 모든 규수와 상궁들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규수들이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세자 저하께서 왜?”

“무슨 일이야?”

간택장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소진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로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상궁들 역시 초간택 현장에 세자가 직접 행차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모두 놀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중 이번 간택의 책임을 맡은 최고 상궁이 헌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하…… 어인 발걸음이십니까.”

그러자 대비전에 들렀다, 간택장에 당도한 헌은 발 너머의 규수들을 둘러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 직접 초간택을 참관하려 하네.”

“하오나…… 저하께서 직접 간택에 가담하는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기도 하고…… 많은 규수와 그 가문들이 반발할 수도…….”

“대비마마의 명이 있었네.”

“……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 내관이 최고 상궁에게 다가가 은밀하게 말했다.

부정행위가 벌어지고 있어, 대비 전에서 세자를 보내 부정행위를 벌이는 자를 색출하고자 한다는 명을 전했다.

그러자 최고 상궁의 얼굴이 구겨졌다.

“부정행위라니……. 규수들을 더욱 꼼꼼히 살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우선 제일 걱정하시었던 대리 참석자는 없었사옵니다.”

“지금까지의 과제는 놔두고 마지막 과제라도 면밀히 살필 요량이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간택을 진행토록.”

그렇게 말하며 헌이 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초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소진은 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자신에게 대할 때와는 달리 냉정하고 근엄한 모습이었다.

능청스럽던 난봉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애월루에서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던 모습과 비슷했다.

뜨끔 놀라며 그녀는 서둘러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하지만 단번에 그녀를 알아본 헌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 이를 어쩌면 좋아.’

소진은 초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규수들 역시 모두 자리에 앉으며 발 뒤에 앉은 헌을 힐끔거렸다.

“……발로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로세.”

“그러니까. 얼굴 하나는 끝내주게 잘생겼다던데, 참이야.”

상궁은 숙덕거리는 규수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재개된 간택. 소진을 포함한 규수들은 찻잔을 쥐었다.

소진 역시, 손을 뻗어 뜨겁게 데워진 잔을 들었다.

‘날…… 보고 있겠지? 떨려 죽겠네.’

시선은 찻잔 위에 고정되어 있지만, 온 정신은 발 너머의 헌에게 쏠려 있었다.

소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연습한 대로 후루룩 소리를 내기 위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찻잔에 입술을 갖다 댔는데, 그만 입술을 데고 말았다.

“앗, 뜨거워……!”

그대로 잔을 놓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다과상 위에 차를 엎지르고 만 소진.

그녀의 치맛자락도 모두 차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당황한 소진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택장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흠…….”

그것을 지켜보던 숙자는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실수를 하는 건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상궁들은 오늘 유독 실수를 연발하는 소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의정 대감 댁 규수께서 오늘 실수가 잦으십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자빈 후보감 1순위라, 기대를 많이 하였더니.”

저들끼리 숙덕대던 상궁들은 소진에게 감점하기 위해 붓을 들었는데, 헌의 목소리가 별안간 날아들었다.

“다시.”

짧고 굵은 그 한마디에 간택장 안의 모든 사람이 손을 멈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