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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뜻대로 해줄 생각 없습니다만? (10/125)

10. 뜻대로 해줄 생각 없습니다만?

2020.11.02.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헌은 언제나처럼 고운 미소를 생긋 지었다.

아니라는 말에 소진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란 말씀입니까?”

어쩐지 허탈함도 밀려오는 것 같았다.

헌은 다정한 눈빛으로 소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친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그저 세자 저하의 잠행을 동행한 것일 뿐입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세자가 망나니라 소문이 났지만 이런 호색한에 난봉꾼일 리는 없었다.

소진은 정색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자신의 이마 위를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쳐냈다.

“어찌 세자 저하이신 척한 겁니까? 놀라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말에 헌이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재밌으니까.”

헌의 대답에 소진은 억지 눈웃음을 지으며 그가 했던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선비님께서는 무슨 재미를 목숨 걸고 보십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보고 왕족 사칭 어쩌고저쩌고하시더니……. 왕세자 사칭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 아시지요?”

“하면 지금 밖으로 나가 세자 저하께 고하기라도 할 참입니까? 종친 나부랭이가 감히 왕세자 저하를 사칭한다고.”

“글쎄요. 못할 것도 없지요?”

“사람이 이리 정이 없을 수가.”

“……?”

“불과 어제인 줄로 아는데, 내가 낭자를 도운 것이.”

그는 피식 웃으며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다행히 빗방울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어디 가서 그런 장난 하지 마십시오. 나니까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한데 깜빡 속은 것 같은데.”

“하면 안 속습니까? 대놓고 내가 왕세자다, 하는데?”

“그럼 성공입니다.”

소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어이없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어쩐지 비는 그쳤건만 헌의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가는 듯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을 게 있는데, 진심을 담아 대답해줄 것입니까?”

그의 말에 소진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정말 왕세자라면.”

“…….”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이 난봉꾼이 아직도 세자 놀이를 안 끝냈네?

소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비구름이 걷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라질 게 무엇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되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달라질 관계라는 것은 애초에 무슨 사이라도 될 때 가능한 이야기였다.

소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헌은 이미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무슨 사이라면 달라질 게 있단 말이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경악이든 경탄(驚歎)이든.”

소진은 생긋,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하면 저하와 함께 살펴 가십시오, 종친 선비님.”

그러자 헌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 저하께 말씀이라도 드릴까요?”

“뭘 말입니까?”

“낭자를 세자빈으로 간택해달라고.”

그 말에 소진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막았다.

“……!”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헌의 미간이 순간, 홱 구겨졌다.

“이 사람이 지금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행여 세자가 들었을까, 소진은 황급히 까치발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치우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종친 선비님. 이만 관심 끄시고 나가주시지요.”

똑 부러지게 선을 긋고서는 소진이 발걸음을 옮겼는데 헌이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러곤 소진을 앞질러 가, 등을 보인 채 멈춰 섰다.

“또 압니까? 우리가 식구가 될지?”

의미심장한 그 말에 소진의 동공이 다시금 커졌다.

“식구는 무슨 식구입니까! 경거망동 마시고 속히 사라져주시라니까요?”

그러자 헌이 빙그르르 돌아 소진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다시 너울을 늘어뜨리며 뒷짐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

소진을 뚫어지라 응시하던 헌의 입매가 곱게 휘었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니, 친하게 지내잔 말입니다.”

“선비님과 제가 친해질 이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또한, 다시 볼일도 없을 거고요. 하니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을 사람이 필요하신 거면 다른 이 알아보시지요.”

소진은 다시 한번 더 확고하게 이야기하며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헌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마를 쓸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렇게 말하는 헌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초간택이 열리기 하루 전날.

소진은 초조한 얼굴로 정자나무 언덕에 서서 보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자가 내내 궐 앞을 지키고 있다, 겨우 만난 보은군에게 소진의 서찰을 건넨 것이었다.

그녀는 언덕 아래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아……!”

그런데 저 멀리서, 보은군의 모습이 보였다.

소진은 반색하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대감, 여기입니다……!”

그러자 그 역시, 반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소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급한 일이 있다 하여, 바로 달려오는 길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여기까지 달려온 듯,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소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달싹였다.

“제 벗이…… 사라졌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보은군의 눈이 커졌다.

울먹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가슴이 덩달아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소상히 말씀해 보시지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가 소진의 어깨를 다정히 짚었다.

그러곤 허리를 굽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의 따뜻한 눈길이 닿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뒤죽박죽이던 그녀의 머릿속이 조금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벗이 사라졌거든요. 근데 며칠 전에 사라진 제 벗을…… 궐 안에서 보았습니다.”

“궐 안에서요?”

“……그것도 교태전에서 말입니다.”

교태전이라는 말에 보은군의 얼굴도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실은 제 벗처럼 궐 안으로 사라진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둘이 아니라니요. 그럼 강제로 궁인이 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빚을 지고 갚지 못한 집의 여인들이…… 간밤에 실종이 된다고 합니다.”

“……!”

“그렇게 사라진 여인들은…… 죄다, 하룻밤 만에 그 많은 빚을…… 갚았다고 해요. 제 벗도 그렇게 사라진 것이고요.”

말을 하면서도 소진은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아 말문이 턱턱 막혔다.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보은군은 그녀의 어깨를 연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데, 그 벗이 교태전에서 궁녀로 있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소진은 고개를 들어 보은군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 닿는 보은군의 눈길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확실히 교태전 궁녀로 있었습니까?”

나지막한 그의 물음에 곧 소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핏 보기는 했지만…… 제 벗이 확실했습니다……!”

소진은 보은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울지 않으려 입매에 힘을 주어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벗을 찾기 위해 애쓰겠지만…… 대감께서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눈을 직시하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이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보은군은 피식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다시금 고쳐 잡았다.

“왜 안 되겠습니까, 낭자.”

“대감……!”

“당연히 돕겠습니다. 낭자의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의 대답에 소진은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밀려와,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보은군이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이 무슨 어려운 청이라고 그리 어렵사리 말을 꺼냅니까?”

“……대감.”

“우리가 겨우 그런 사이였습니까? 어려운 일도 마땅히 나서서 도와야지요.”

보은군의 품은 생각보다 넓고 따뜻했다.

얼결에 그에게 안기긴 했지만, 그 덕에 소진의 널을 뛰던 마음은 점점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대감께서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소진은 그렇게 말하며 좀 전에 울먹였던 것이 창피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보은군이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소진이 무어라 말을 더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

보은군은 살갑게 소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

“낭자가 내 곁에 없으면 나는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종종 생각하곤 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그도 소진을 따라 미소 지었다.

“아……! 맞다.”

그러다 소진은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 난봉꾼…… 아, 아니. 여기서 함께 마주쳤던 그 선비님과는 친합니까?”

보은군이 형님이라 부르던 사람.

아무래도 종친이니 보은군과는 안면이 있을 것 같았다.

소진의 물음에 보은군은 순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다물었다.

“그때 종친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보은군이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낭자께서 형님을 어찌 압니까? 그날 보니 꽤 친해 보이기도 하던데요.”

씁쓸함을 애써 지워낸 그의 얼굴에는 멋쩍은 미소만 남았다.

“아……. 그냥 뭐, 오다가다 알게 된 사이예요.”

그렇게 대답하며 소진 역시, 겸연쩍게 웃었다.

- 오다가다 알게 된 여인이다.

보은군은 헌과 똑같은 대답을 하는 그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한데…… 좋은 사람입니까?”

헌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듯, 소진은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물었다.

어쩐지 그녀의 물음에 보은군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기 싫었다.

“좋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렇게 대답하며 보은군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대답에 소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라…….

보은군의 대답을 곱씹으며 소진은 그날, 손바닥으로 비를 가려주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호색한에다 난봉꾼 같기는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소진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가만히 땅을 바라보고 있자, 보은군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려 해도, 이상하게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에 감정이 스미는 것 같았다.

“낭자.”

어쩌면 남녀 사이에 벗이 있을 수 있느냐는 헌의 물음처럼.

보은군은 오래도록 소진에게 연모의 마음을 품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녀의 잇새에서 흐른 다른 사내의 이야기에 이토록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보면.

“예, 대감?”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소진이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가까이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뜻밖의 말에 소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좋으신 분이긴 하지만…… 그 이상, 깊은 사이가 되지는 않았으면 해서요.”

그게 무슨 말일까,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의아하다는 듯이 소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보은군의 입가에 달갑지 않은 미소가 걸렸다.

“그냥.”

“……?”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의미심장한 그 말에 소진은 더 묻지 못했다.

***

초간택이 열리는 날.

다행히 내내 쏟아붓던 비가 그치고 모처럼 날이 개었다.

소진은 노란색 저고리와 다홍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으며 별채를 나섰다.

영의정과 최 씨 부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며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려하지 마셔요. 어머니 아버지.”

소진은 굳어버린 두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지난 시간 동안 초간택에서 떨어지기 위한 수업을 착실하게 받았으니 배운 대로 행한다면 반드시 초간택에서 떨어질 것이었다.

“떨어질 자신 있어요. 만약 붙으면 재간택에서 또 떨어지면 되지요!”

소진이 씩씩하게 말하자 영의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재간택까지 가서는 안 된다. 반드시 초간택에서 떨어져야만 해.”

“명심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내 소진은 대궐로 향하는 가마에 올랐다.

숙자가 그녀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감마님. 안방마님.”

“소진이를 잘 부탁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진은 가마가 집에서 멀어질 때까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눈앞에서 완전히 두 사람이 사라지자 소진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많이 떨리시지요, 아씨?”

숙자가 그렇게 물으며 소진을 돌아보았다.

소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떨어지는 것이 더 어려울 간택일 것이다.”

“그 첫 관문이 솥뚜껑 손잡이를 밟고 문턱을 넘는 것이지요? 쇤네가 슬쩍 아씨를 밀치겠습니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숙자가 코를 찡긋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믿어야 할지, 소진은 다시금 한숨만 푹 내쉬며 가마 창을 닫았다.

그러곤 미리 챙겨온 작은 보따리 속에 궁녀 옷을 펼쳐 보였다. 

초간택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다고 들었다.

그때, 잽싸게 궁녀 옷으로 갈아입고 교태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마 오늘은 초간택 때문에 사가에서 규수들이 입궐하니 동네에서 사라진 여인들을 쉬이 밖에 돌아다니지 않게 할 것이야.”

“알아보는 이들이 있을까 봐요?”

“그래. 그러니 서둘러 대궐에 가 초간택이 열리는 틈을 타, 살펴보아야겠다.”

교태전.

그곳으로 봉희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반드시 그 안을 확인해야만 했다.

궁녀 옷을 다시 곱게 접어 보따리로 감싸는 소진의 손끝이 자잘하게 떨렸다.

***

“그래, 영의정의 여식도 참여했다?”

대비는 모처럼 밝은 얼굴로 뜰로 나섰다.

갖가지 피어난 화초들을 바라보며 대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예. 지금 초간택을 한창 치르고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초간택에 통과시켜야 할 것이다.”

그때, 헌이 대비의 곁에 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할마마마, 소손 찾아 계시옵니까?”

헌의 음성에 대비는 좀 전보다 더 환한 얼굴로 헌의 손을 잡았다.

“세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늦게 끝나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지, 왜 밖에 나와 계시옵니까?”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비의 손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볕이 좋아, 바람이라도 좀 쐴까 하여 나와 있었지요. 참, 소식 들었지요? 세자께서 영의정에게 언급한 덕에 꼼짝없이 영의정의 여식이 초간택에 참여했다는 것을.”

대비는 그렇게 말하며 흡족한 듯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그녀의 웃음에 헌 역시, 입가에 미소를 매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마마마.”

“한데 우리 세자께서 영의정의 여식은 언제 보았습니까?”

“…….”

“언제 보았길래 눈도장을 콱, 찍어 둔 것입니까?”

대비의 물음에 헌은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할미한테 말하기 쑥스러워 그러시는 게지요?”

헌이 수줍어 그러는 모양이다 싶어 대비는 그를 따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헌은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흥미로운 여인입니다.”

“……흥미롭다라.”

“여러모로 제게 도움과 득을 줄 여인이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영의정만 손아귀에 쥔다면 세자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이니.”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자빈으로 제격인 규수입니다.”

그날의 내 은밀한 기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니.

헌은 그 말을 삼키며 간택이 열리고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어지고 있었다.

***

“잠깐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초간택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소진은 당연히 배운 대로 소소하지만 강력한 실수를 연이어 터뜨리며 상궁들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유력한 세자빈 후보 1순위였던 소진이 실수를 연발하자 간택에 함께 참여한 규수들은 저마다 수군거렸다.

“오늘따라 왜 저러는 거야?”

“그러게……. 똑똑하고 실수 없기로 소문난 한 규수가?”

“단독으로 교습을 받는다 해서 얼마나 세자빈이 되고 싶어 그러나 했더니만…….”

하지만 소진은 저를 두고 속닥이는 소리에는 관심 없었다.

살벌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궁들의 눈이 속히 사라지기만 기다렸다.

그때, 간택 장을 지키고 있던 상궁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자 소진 역시 치마 위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진의 움직임에 전각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숙자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씨…… 여기요.”

숙자는 소진이 준비한 궁녀 옷이 든 보따리를 은밀히 건넸다.

지금부터 딱 반 시진.

유례에 없이 참가자 수가 훨씬 더 많아 꽤 오래 치러진 1차 시험에 휴식 시간이 다른 때보다 더 길었다.

하지만 소진에게 반 시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소진은 숙자와 함께 서둘러 측간으로 향했다.

그러곤 숙자가 망을 보는 동안 빠르게 궁녀 옷으로 갈아입은 소진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가도 되겠느냐?”

“예, 아씨. 서둘러 나오세요!”

숙자의 말에 소진이 폴짝 측간에서 뛰어나왔다.

그러곤 황급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숙자의 손을 잡았다.

“너는 여기서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거라. 속히 확인하고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니.”

“보은군 대감마님께서도 오신다고 하셨지요?”

“응, 교태전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아씨, 늦으시면 큰일 납니다. 아무리 간택에서 떨어져야 하지만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대감마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어요.”

“알겠어. 조금 이따 보자……!”

소진은 입술을 질끈 악물고는 치맛자락을 쥐었다.

어렵사리 구한 궁녀 복은 다행히 소진의 몸에 딱 맞았다.

머리까지 곱게 올리니 영락없는 궁녀였다.

하지만 궁녀들 틈에서도 돋보이는 미색은 가릴 수 없었다.

소진은 제 곁을 스쳐 지나는 다른 궁녀들처럼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보폭은 작게 하되 종종걸음으로 교태전으로 길을 잡았다.

“이쪽에서…… 이리로 향하면……. 아, 저기 있구나.”

그녀는 다행히 어렵지 않게 교태전에 닿을 수 있었다.

막상 으리으리한 교태전 앞에 다시 서니, 심장이 쿵 쿵 쿵 뛰어왔다.

두 다리도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아직 오시지 않은 모양이네.”

아직 보은군은 도착하지 않은 듯, 교태전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봉희를 찾을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니까.

소진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교태전 가까이 다가갔다.

알 수 없는 싸늘한 냉기가 그녀의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던 보은군은 소진을 발견하곤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낭자, 내가 좀 늦었지요?”

“아, 대감! 이제 오셨습니까?”

그는 궁녀 차림의 소진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궁녀 옷을 입어도 소진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간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휴식 시간이라 서둘러 왔습니다. 아직 조금 더 남았어요. 반 시진 후에 다시 시작한다고 하니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소진은 보은군을 향해 은밀히 속닥였다.

그러자 보은군 역시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중전마마께서도 지금 대비 전으로 가셨으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곧, 두 사람은 황급히 교태전 안으로 들어서려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무리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중, 중전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곧 죽어 묻힐 뒷방 늙은이 주제에 뭐라? 아들을 낳지 못하면 내 신세도 저와 다를 바 없을 거라고?!”

“……!”

“지금 그 늙은이가 내게 저주를 퍼부었는데, 고정하게 생겼느냐?!”

중전마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소진의 귓가에 꽂혔다.

속히 돌아보니 중전이 궁인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중전에게 들키고 말 것이었다.

소진과 보은군은 속히 풀숲에 몸을 숨겼다.

“……쉿!”

간발의 차로 두 사람 앞으로 중전이 스쳐 지났다.

멀어지는 중전의 모습을 보며 소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은군은 어두운 얼굴로 교태전 안으로 사라지는 중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하면 어쩌지요……? 곧 간택이 시작될 것인데.”

“간택을 마무리하고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하지요.”

그의 말에 소진은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속상한 듯 한숨만 내쉬며 교태전 안을 연신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가면 봉희가 있을 것인데…….

아쉬운 대로 그녀는 교태전 입구에 서서 안을 기웃거렸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보은군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데 이것 때문에 사주단자를 올려달라 한 것이었습니까?”

보은군의 물음에 소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예, 그런 것도 있고 아버지의 명도 있었고…….”

소진이 말끝을 흐리자 보은군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의정…… 대감께서요?”

영의정이 자신의 딸을 세자의 빈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과 혼담을 주고받았으면 받았지, 세자빈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의외라는 듯이 소진을 빤히 쳐다보는 보은군.

소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예. 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영의정 대감께서 그런 명을 내리실 이유가…….”

그렇게 말하며 보은군이 소진의 눈치를 보았다.

소진은 머뭇거리다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그와 자신 사이에 아무런 비밀도 없었는데 무언가 말하지 못하는 사정을 만드는 것 같아 찜찜해졌다.

“낭자, 나에게 뭐 숨기는 것 있으시지요?”

보은군이 희미한 웃음을 매단 채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하긴 그와 자신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간택은 중요한 사안이긴 하지만 보은군은 철저히 자신의 편이니, 이해해주리라 싶었다.

“실은 초간택까지만 임하는 조건으로 올린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에 보은군의 눈이 커졌다.

그러곤 자신이 더 놀란 듯 소진의 앞을 막아서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초간택까지만 임한다니요?”

“초간택에서 떨어지는 조건으로 사주단자를 올려달라 한 것입니다. 거기에 아버지께서도 동의하셨고요.”

“아……. 그런데 대비마마께서 과연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반드시 떨어져야만 합니다.”

소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이글이글 타는 듯했다.

“재간택은…… 없을 것이어요.”

그때였다.

다부진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곁에 누군가가 와서 섰다.

“난 낭자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습니다만.”

놀란 소진은 고개를 홱, 올려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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