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세자라면 나에게 시집오겠소?
2020.10.30.
“저하…… 어찌 이리 누추한 곳까지……!”
영의정은 헐레벌떡 대문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대문 밖에는 헌이 너울을 길게 늘어뜨린 채 윤현과 환관 몇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최 씨 부인 역시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그의 곁에 섰다.
“저하, 납시셨나이까.”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조아리는 영의정의 안색이 어두웠다.
왕세자가 영의정의 사가에 직접 행차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랬기에 영의정은 세자의 발걸음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필, 세자의 국혼이 정해진 이런 민감한 시기에 신하의 집을 방문하다니.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비백산들입니다.”
헌은 여유 있게 웃으며 뒷짐을 지었다.
처음 마주하는 왕세자 모습에 영의정 사가의 하인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최 씨 부인 역시, 소문대로 훤칠하다 못해 빛이 흐르는 듯한 잘난 세자의 용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 귀신이라니요, 저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헌은 영의정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르던 윤현과 환관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헌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집 안을 휘, 둘러 보았다.
대궐만큼이나 화려하고 웅장한 그의 사가에 헌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영의정의 사가가 또 다른 궐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참이었습니다?”
헌의 말에 영의정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한데 어인 일이십니까? 궐에서 따로 저하께서 납신다는 연통을 받지 못하였는데요.”
영의정은 찝찝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영의정을 헌이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다는 듯 말씀하십니다.”
“예?”
“조선 팔도에 왕세자인 내가 가지 못할 곳도 있었던가.”
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랫입술을 검지로 쓸었다.
음성 끝에는 낮은 조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다 휘적휘적 마당을 가로질러 걷다, 우뚝 멈춰 서서는 한 곳을 응시했다.
그곳은 소진이 간택 수업을 받는 별채였다.
저 멀리서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좇고 있었다.
―저하,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헌은 정자나무 언덕에서 소진을 기다리다, 오는 길이었다.
자신의 도움을 받으러 그녀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그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꼭 그것이 아니라도 그간의 우연으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헌의 착각인 것이었다.
어쩐지 자존심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럴 줄 알고 그 여인을 보러 갈 구실을 내가 만들어 왔다.
―예……?
―속히 영의정의 사가로 길을 잡거라.
만에 하나 그녀가 나오지 않는다면 소진을 보러 갈 핑계가 있어야 했기에 그는 어명을 이용해 영의정의 사가를 가려는 것이었다.
간택전(揀擇戰)이 시작되면 잠행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했다.
그전에 소진을 반드시 제 사람으로 만들어 기억을 되찾아야만 했기에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다시금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최근 들어 건강이 악화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왕을 대신해, 헌이 나서기로 한 것.
그는 자처해 대신들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또한, 도적 떼들에게 피해를 본 그들의 사가를 직접 살피겠다며 왕에게 윤허를 구한 것이었다.
물론 간택을 준비하는 여인의 집으로 잠행을 나가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헌이 영의정의 사가만 둘러보는 것이 아닌, 모든 대소신료를 살피는 것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을 하였다.
또한, 임금은 요 며칠 사이 기력이 쇠하여 상참도 종종 빠지고는 하였다.
그 때문에 대신들이 제멋대로 상소문을 올리는가 하면 왕의 고질병이 근래에 심각해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까지 궐 안팎을 나돌고 있는 지경이었다.
해서 국혼이라는 중요한 궐의 행사를 앞두고 임금은 흐트러진 대신들의 정신과 궐의 기강을 위해 세자인 헌이 나서서 직접 대신들의 사가를 시찰(視察)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영의정은 황급히 헌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초간택이 치러지기도 전에 여식의 얼굴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시라 소신이 당황하여…….”
“혜민서에 들렀다가 아바마마의 명을 받잡고 들른 것입니다. 그리 당황할 것 없습니다, 대감.”
‘어명’이라는 말에 영의정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었다.
헌은 어렴풋이 보이는 소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어명이라니요?”
오늘 아침 회의 때만 해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어명에 영의정은 냉가슴이 되고 말았다.
“요즘 도적 떼들이 대신들의 집만 골라 금품을 갈취해 간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것이라면.”
“해서 아버님께서 직접 대신들의 사가에 들러 피해 규모가 어떤지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굳이…… 저하께 말입니까?”
영의정이 미심쩍은 듯 그렇게 말하는 헌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헌은 그와 달리 여유가 넘쳤다.
“원래 아바마마께서 대신들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유별나시지 않습니까?”
“……?”
“하니 그대들의 사가를 직접 방문해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오라, 아바마마께서 제게 명령을 내리신 것이지요.”
영의정은 헌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화원 전각으로 모셨다.
헌은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다 다시금 소진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의정은 자꾸만 소진에게로 향하는 헌의 시선에 언짢아졌다.
“제 여식입니다.”
“…….”
“속히 나와 저하께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禮)인 줄은 아오나 간택이 끝나기 전까지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여……. 행여 구설에 오를까 하는 노파심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저하.”
영의정의 말에 헌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곳에서는 건너편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소진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소진은 수업에 한창이라 이쪽에서 헌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소저(小姐)께서 간택 준비로 한창인가 봅니다.”
“……아, 그것이.”
영의정은 소진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는 헌의 시선이 불편했다.
슬쩍 헛기침을 흘리며 그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헌은 무감한 얼굴로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그리 경계할 것 없습니다. 방금 좌상 댁을 다녀오던 길이거든요. 좌상 대감의 소저 또한, 간택 수업을 받고 있어서 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헌이 느리게 찻잔을 쥐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는 무감하게 굴었다.
헌은 뜨거운 차를 기품 있게 한 모금 마신 뒤, 헌은 영의정을 직시했다.
“도적에게 피해를 본 대신들이 한둘이 아니던데 영의정께서는 무고(無故)하십니까?”
그리 묻는 헌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 아직 제 사가는 무고합니다.”
“기근(飢饉)으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니 농민들이 도적 떼가 되어 양반들의 곳간을 넘나든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국사(國事)를 돌봄에 있어, 어려움이 없도록 저희가 열심히 해야지요.”
“…….”
“하면 백성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영의정의 말에 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을 했다.
“역시 백성을 생각하는 건 대감뿐이십니다.”
두 사람은 이후로 시시콜콜한 국사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았다.
그러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소진이 간택 수업이 끝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소진은 상궁과 인사를 나누고는 별채 화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데 전하께서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오늘 상참에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여 소신들이 걱정하던 찰나였습니다.”
“근래 이번 사건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신 탓에 피로가 누적되신 모양입니다. 잠행을 나오기 전 뵈었을 때는 많이 쾌차하신 모습이셨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하며 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영의정도 서둘러 일어섰다.
“측간을 가려 하는데…….”
그 말에 영의정이 앞서 걸었다.
“따르시지요.”
“아니, 대감께서 내 볼일까지 수발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
“하인 하나를 붙여주면 따르겠소만.”
“예, 저하.”
헌의 말에 영의정은 별다른 의심 없이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대기하고 있던 하인 한 명을 헌의 곁에 서게 했다.
“측간까지 모시거라.”
“예, 대감마님.”
윤현과 환관들도 차례로 헌의 뒤를 따랐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서둘러 측간만 다녀올 것이니.”
그렇게 헌은 영의정의 하인과 단둘이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측간이옵니다, 저하.”
측간 앞에 도착한 하인은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헌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길을 알았으니 물러나 있어도 좋다.”
“하오나…… 저하.”
“불편해서 그런다.”
하인은 하는 수 없이 뒷걸음으로 헌에게서 물러났다.
이내 헌은 휘휘,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진이 사라지던 별채 화원으로 향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화원 안으로 발을 디디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때, 소진이 화살 하나를 들고는 살금살금 별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헌은 담벼락에 몸을 숨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진은 까치발을 들어 영의정이 앉아 있는 뒷마당 전각을 살피더니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휴……. 망나니 세자가 웬일로 기방을 안 가고 제대로 된 잠행을 한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그 말에 구석에 숨어 있던 헌은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다 소진은 혼자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연습을 하며 화살을 손에 익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 화살인 듯 보였다.
“망나니 세자 때문에 꼼짝없이 별채에 갇혀 있게 생겼네. 원래라면 아버지께서 지금 딱 출타하실 시간인데……. 간만에 들에 나가 활이라도 쏘려 했건만.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세자야.”
그리 중얼거리던 소진은 헌을 등지고 서서 등허리를 곧게 폈다.
그녀는 반듯하게 활을 잡아서는 활 쏘는 자세를 취했다.
제법 화살을 잡아본 듯 그녀의 모습이 그럴싸했다.
활을 쏘는 양반집 규수라, 꽤 흥미로운 여인이었다.
헌은 활쏘기에 심취한 소진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등 뒤로 길게 땋아 내려진 그녀의 댕기가 햇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눈빛을 바꾸며 입술을 달싹였다.
“활을 그리 쥐면 팔에 알이 배길 것인데.”
“앗……!”
갑작스러운 헌의 목소리에 소진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런데 너울을 길게 늘어뜨린 웬 사내가 허리를 숙여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었다.
소진은 그가 헌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바라보다, 경직된 채로 말문을 열었다.
“뉘……십니까?”
그러자 헌은 허리를 굽힌 채로 말을 이었다.
“망나니…….”
“…….”
“세자?”
망나니 세자란 말에 소진이 잠시 멍하니 헌을 응시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곤 죽을죄라도 지은 듯 얼굴을 구기며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세, 세자 저하……! 송구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면 어찌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며 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진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어딘가 익숙한 음성이기는 했지만, 소진은 감히 왕세자의 목소리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파르르 떨었다.
감히 왕세자 앞에서 그의 험담을 늘어놓았으니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건 소녀가 실언한 것입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소진은 헌을 향해 넙죽 절을 하며 고개를 몇 번이고 조아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헌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무릎을 굽혔다.
“죽이면 어찌합니까. 소저께서 나의 빈이 될 수도 있음인데.”
그 말에 한껏 조아리고 있던 소진의 고개가 스르륵 들렸다.
나의 빈……? 그것은 아니 될 일인데?
나는 초간택까지만 참가했다가 똑, 떨어져야 하는데?!
소진은 다시 한번 넙죽 절을 하며 소리쳤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저하!”
그것만은 통촉해 주셔야 하옵니다……!
그때, 별채 밖에서 최 씨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진아, 잠깐 우상 대감 댁에 다녀와야겠구나.”
순간 헌은 소진을 일으켜 세워서는 화원 풀숲으로 잡아당겼다.
커다란 감나무 뒤에 몸을 숨긴 헌은 소진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는 여기가 우리 집인데 왜 숨어야 하지…….
소진은 자신이 몸을 숨겨야 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곁에는 세자가 있었으니,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녀는 헌이 하라는 대로 입을 꾹 다물고는 숨죽였다.
이내 최 씨 부인이 별채 안으로 들어섰고 둘은 바짝 붙은 채로 나란히 섰다.
그 순간에도 소진은 제 곁에 왕세자가 있다는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런 그녀를 헌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를 그가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오늘.”
“……?”
“왜 나오지 않은 것입니까?”
다짜고짜 그 말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소진은 저도 모르게 홱, 얼굴을 들었다.
그러다 너울 뒤의 헌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금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왕세자의 얼굴을 함부로 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소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난 낭자께서 나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소진은 불현듯 눈앞에 그려지는 얼굴 하나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흘 뒤, 미시까지 그 정자나무 언덕에 나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난봉꾼……?!
소진은 서둘러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치웠다.
그런데, 세자라던 그는 다름 아닌 배은망덕에 난봉꾼인 그 선비였다!
“그쪽은……?!”
그때, 별채로 들어섰던 최 씨 부인이 빈방을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화원을 나서고 있었다.
헌은 손을 뻗어 황급히 소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진은 그대로 굳어서는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점점 동공이 커지는 소진을 바라보던 헌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세자라면 내게 시집오겠습니까?”
“……?!”
“간택에 뽑히려 열심이던데.”
그리 말하며 헌이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소진은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렀다.
“그러니까 선비님이…… 아니, 그러니까 세자 저하께서……!”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위해 헌이 너울을 갓 위로 치우며 자신의 얼굴을 완전하게 드러냈다.
“아.”
헌은 까맣게 빛나는 소진의 눈동자를 빤히 직시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쥔 상태였다.
“내가 왕세자라니 달라 보입니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소진은 휘청이며 그에게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정녕…… 선비님이 세자 저하십니까?”
그간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초조해하는 그녀와 달리 헌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빨리 무어라 그가 대답해주길 바랐지만, 야속하게도 헌은 입술만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소진이 다시금 그의 눈과 코와 입을 찬찬히 살피며 입술을 달싹였다.
“세자 저하가 맞으시냐, 묻고 있질 않습니까.”
그때, 여우비가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간 햇살 아래로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헌과 소진의 머리와 옷이 점점 젖어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위로도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이 열기를 식혀줄 것 같았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에게도 적나라하게 느껴질 만큼 몸이 달아올랐으니까.
재차 묻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헌은 쥐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곤 손을 들어 무심하게 그녀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
“……!”
소진의 뺨 위로, 눈꺼풀 위로 사정없이 떨어지던 빗방울이 헌의 손바닥 덕분에 가려졌다.
이내 한참 소진을 응시하던 헌이 드디어 젖은 입술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