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날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2020.10.26.
“선비님……?”
헌이 환한 얼굴로 소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어깨를 단단히 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부채를 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서는.
소진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가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부채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보은군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부채를 펼치고 있는 헌을 올려다보았다.
소진은 입술을 말아 물며 부채 아래로 조금 보이는 발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지? 목소리가 귀에 익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부채 너머 사내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형님께서…… 어찌.”
그때, 헌은 소진이 보은군에게 정신이 팔린 것을 확인하고는 보은군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보은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헌이 부채로 가리고 있는 소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데…… 누구.”
그제야 소진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은군임을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앗!”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청한다면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할 것 같았다.
헌과 또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 일이 복잡해질 것이었다.
소진은 헌의 손에 쥐어진 부채를 잽싸게 뺏어 들었다.
“……?!”
그러곤 부채로 자신의 얼굴은 단단히 가린 채 황급히 등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헌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가 잡을 새도 없이 그녀는 후다닥 도망치고 말았다.
“저……!”
순간, 당황한 헌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소진은 멀리 달아난 뒤였다.
“……누구입니까, 저하?”
헌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부채를 가지고 냅다 도망친 소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원 참. 가지가지.”
“예……?”
“아, 알 것 없네. 한데 어디를 가는 길인가.”
보은군은 어쩐지 낯익은 소진의 뒷모습에 얼굴이 굳었다.
그러다 어쩐 일이냐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조아렸다.
“궐 밖에 잠깐 누구를 만나고 입궐하던 길이었사옵니다.”
그렇게 대답하던 보은군은 순간 소진과 함께 있던 헌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을 들었다.
“저하, 그런데 그날…… 함께 있던 규수와는 어찌 아는 사이신지요?”
뜻밖의 물음에 헌의 미간이 구겨졌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보은군만 내려다보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다가다 알게 된 여인이다. 그러는 넌, 그 여인과 꽤 친해 보이더구나. 무슨 사이인가.”
이번에는 보은군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고 말았다.
“그저 친한 벗입니다.”
벗이라는 말에 헌의 입매가 비틀렸다.
어쩐지 그의 잇새로 조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벗…….”
“…….”
“남녀가 유별한데 벗이라니. 하긴, 영의정의 여식이니 친하게 지냈을 법도 하겠군.”
헌은 벗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몇 번이고 곱씹다, 이내 보은군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곧, 그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한데 이제는 그 규수와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은군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헌을 직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날카롭게 교차했다.
“네 벗이라는 그 여인.”
“…….”
“이번 간택에 사주단자를 올릴 것이니.”
사주단자라는 말에 보은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영의정이 소진을 헌의 세자빈이 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보은군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늘, 헌의 앞에서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릴 것만 같았다.
“혹시 아는가? 그 여인이 나의 세자빈이 될지.”
헌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선연히 박혔다.
묘하게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소진이 그의 세자빈이 된다고 생각하자, 보은군의 가슴이 바짝 타들어 갔다.
곧, 헌은 딱딱한 얼굴을 풀어 종친들이 오가는 궐 안을 돌아보았다.
종친들은 헌과 함께 있는 보은군의 모습에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의 국혼으로 궐 안팎이 떠들썩하며 궐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하니, 외출을 자제하여야 할 것이다.”
“…….”
“종친들이 입궐하는 날일수록 네가 조심하여야지. 호시탐탐 너를 이용해 내 자리를 차지해보려는 종친들이 저리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헌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종친들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헌과 눈이 마주친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명심…… 하겠나이다, 저하.”
그렇게 대답하는 보은군의 안색이 어두웠다.
***
궐 뒤편, 한적한 연못가.
헌의 부채를 가지고 도망친 소진은 멍하니 바위에 앉았다.
좀 전에 보았던 봉희를 닮은 궁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녀는 중궁전 쪽을 돌아보았다.
그때, 소진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헌이 그녀를 발견했다.
홀로 사색에 잠겨 연못을 바라보는 소진의 곁으로 그가 다가갔다.
“고작 부채를 들고 도망친 곳이 여기였습니까?”
등 뒤로 들려오는 헌의 목소리에 소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들고 있던 그의 부채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아까는 놀라셨지요? 그게…….”
“예, 보은군 대감 때문에 달아난 것이지요. 이해합니다.”
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 아까 소진이 전각 앞에서 기웃거리던 것이 생각나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의 물음에 소진이 표정을 굳혔다.
“확인은 했지만…… 확실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소진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헌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망설이던 그녀는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한데 아까 거기.”
“…….”
“어느 분의 처소였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어둑했다.
그런 소진을 빤히 바라보던 헌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해주면.”
나지막한 목소리가 굵은 목울대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깊은 음성에 소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감당할 수는 있습니까?”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녀의 슬쩍 벌어졌던 입술이 맞물리고 말았다.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 어찌.”
“그리 불안한 표정 하나 숨기지 못할 거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이란 말이지요.”
그 말에 소진이 얼굴을 묻었다.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러곤 그렇게 대답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소중한 사람과 엮인 일입니다.”
제법 진지해 보이는 소진의 얼굴에 헌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교태전.”
그리고 짧은 그 말을 뱉으며 헌이 소진을 돌아보았다.
“중전마마가 계신 곳입니다.”
‘중전’이라는 말에 그녀의 가슴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곧 만삭인 중전마마의 수발을 위해 동네 여인들을 죄다 데려온 것일까?
아까 봉희를 닮은 궁녀가 사라진 곳이 교태전이라는 말에 소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중전마마께서…… 계신 곳이라니.”
“한데 확인해야 할 것이라는 게 사람이었습니까?”
아무래도 중전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아 헌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오랜 벗입니다.”
“……벗이 어찌 중궁전에?”
헌이 의아하다는 듯 이맛살을 구기며 소진을 응시했다.
“그러게요. 어찌 그곳에 있는지…….”
아리송하게 대답하며 소진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헌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하십시오. 낭자보다는 내가 더 쉬이 교태전에 닿을 수 있으니.”
그 말에 소진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멈추어 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헌은 햇볕이 곱게 내려앉은 소진의 동그란 이마를 응시했다.
“하면 선비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뱉어내는 소진이었다.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의 이마를 내려다보고 있던 헌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로 향했다.
“소녀의 무엇을 보고 쉬이 감당할 수 없다는 그곳을 가신다고 합니까?”
소진의 검은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말없이 침묵만 유지하던 헌이 이내 입을 열었다.
“중궁전을 감당할 수 있느냔 물음입니까, 아니면.”
“…….”
“그대를 감당할 수 있느냔 말입니까?”
헌이 그렇게 말하며 소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외면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에게서 풍겼다.
소진은 어깨를 잘게 떨며 그에게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당연히 중궁전을…….”
“둘 다, 가능합니다.”
그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중궁전도 그대도. 모두 다.”
“선비님.”
“한데 이왕이면 그쪽을 좀 더 감당하고 싶긴 합니다만.”
그의 진득한 시선이 소진의 눈, 코, 입을 차례로 훑고 있었다.
어쩐지 소진은 쉽사리 그의 시야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
“아씨! 괜찮으셔요?!”
대궐 앞에서 소진을 기다리고 있던 숙자는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황급히 다가갔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소진이 터덜터덜 궐 밖을 나서고 있었다.
“어째 혼이 쏙 나갔대요? 봉희 댁은 찾았어요?”
소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숙자를 바라보았다.
“본 것 같아.”
“봤다고요?!”
떨떠름한 얼굴로 소진은 궐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서늘했다.
“아무래도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아.”
“에구머니나……! 그러면 이제 어찌합니까? 대감마님께라도 알려서 데리고 와야 하는 것 아니어요?”
숙자의 말대로 그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교태전. 중전마마가 계신 곳입니다.
낮고도 무거웠던 헌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굳게 닫힌 대궐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소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다 헌이 돌아서는 자신을 향해 남겼던 마지막 말도 떠올랐다.
―도움이 필요하면 나흘 뒤, 미시까지 그 정자나무 언덕에 나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소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이제 다시 궐에 들어갈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영의정이 사주단자를 절대 올리지 않겠다, 엄포까지 놓았으니 봉희를 구하려면 헌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진은 쉽사리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고작 몇 번 마주친 것이 다인 그에게 자신 벗의 생사를 걸 수는 없었다.
“내가 그쪽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소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진은 집으로 향해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
밤이 깊어지자 영의정의 사가에도 모든 빛이 거두어졌다.
하지만 안채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하면 우리 소진이를 꼼짝없이 간택 장에 내보내야 한답니까?”
최 씨 부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우는 소리를 냈다.
앞에 앉은 영의정 역시 잔뜩 얼굴을 구긴 채 고심에 빠져 있었다.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소.”
“어찌합니까? 그러다 덜컥 간택이라도 된다면……. 우리 소진이가 세자빈이라도 된다면 어찌하냐고요.”
그때, 안채 밖에서 소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찾으셨습니까?”
두 눈을 지그시 감고서 턱 끝을 만지작거리던 영의정은 눈을 떴다.
“들어오너라.”
곧 문이 열리고 소진이 조금은 굳은 얼굴로 들어섰다.
이리 늦은 시각에 자신을 안채로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혹 낮에 궐에서 자신을 본 것일까 싶어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앉아라.”
소진은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둘,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일부터 간택 수업을 듣도록 하라.”
“……예?!”
갑작스러운 영의정의 말에 소진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영의정이 절대 궐에 올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사주단자였다.
그런데 당장 내일부터 간택 수업을 들으라니.
소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이 너는 간택에서 떨어지기 위한 수업을 받을 것이다.”
그 말에 소진의 가슴이 쿵, 쿵, 쿵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오겠으니 자신의 사주단자를 올려 달라 했던 청이 통한 것일까.
그녀는 입술을 굳게 맞다물고서는 제 부친을 빤히 응시했다.
“일전에 네가 말했던 대로 너의 사주단자를 올려 줄 것이니 너는 초간택까지만.”
“…….”
“반드시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돌아오거라.”
“아버지…….”
“네가 궐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는 묻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최선을 다해 간택에서 떨어져야 할 것이다.”
“…….”
“약조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묻는 영의정의 안색이 어두웠다.
소진은 그와 달리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딱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이제 봉희를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 시름 놓았다는 듯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교태전 안으로 들어서던 봉희를 닮았던 그 궁녀의 얼굴이 소진의 눈앞을 스쳤다.
***
나흘 뒤.
소진의 초간택 참가가 정해진 뒤부터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간택 수업을 받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시고 어깨는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간택 수업.
“차는 후르륵, 소리를 내어 마십시오.”
후르륵.
상궁이 일러주는 대로 소진은 경망스럽게 소리 내어 차를 마셨다.
“조금 더 크게.”
후르르륵.
“예, 그 소리를 기억하십시오.”
소진은 조선 최초로 간택에서 떨어지는, 일명 ‘간택 불통(不通)’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반드시 간택에서 떨어져야 했기에 그녀는 오랫동안 간택 심사를 맡아온 상궁에게서 초간택에서 떨어지는 비법을 전수 받고 있었다.
가르치는 상궁에게나 배우는 소진에게나 모두 희한한 경험이었다.
“다음, 과자를 집어 먹을 때는 입을 가리지 말고 드시며 부스러기를 흘리십시오.”
소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과자를 집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상궁의 주문대로 입을 쩍쩍 벌린 채 과자를 씹자 그녀의 치마 위로 하얀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숙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씨, 뭐 더 배울 것도 없겠는데요? 지금도 완벽하셔요.”
하지만 소진은 뭐든지 열심히 하는 여인!
그녀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금 과자를 씹어 먹었다.
“상궁 마마님,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예, 아가씨. 최대한 자연스럽게, 정말 실수를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군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소진은 다부진 얼굴로 대답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과자를 집었다.
그러곤 좀 전보다 입을 작게 벌리며 과자를 씹다가 자연스럽게 부스러기를 흘렸다.
“예, 잘하셨습니다.”
다음 수업은 반듯하게 걷는 연습이었다.
숙자가 낑낑대며 도자기를 꺼내왔다.
그러자 상궁이 도자기 하나를 소진의 정수리 위에 올렸다.
그러곤 사기그릇은 양어깨에 놓았다.
“갈지(之)자로 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도자기가 머리 위에서 떨어지도록 하십시오.”
“아, 예.”
“하나 어깨에 놓인 그릇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머리만 흔들리게 걷기, 유념하십시오.”
소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상궁의 가르침대로 세 걸음 나아갔을 때…….
쨍그랑―.
그녀의 머리 위에서 도자기가 툭, 떨어졌다.
“사소하고도 미묘한 실수로 상궁들의 눈을 속여야 합니다.”
“예, 마마님. 이건 좀 난이도가 있어, 열심히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영의정 사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다소 해괴한 수업을 받는 소진을 멀리서 지켜보던 영의정과 최 씨 부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어쩌겠소. 대비 눈 밖에 나려면 철저하게 준비하는 수밖에요.”
“소문이 새어 나가지는 않겠죠? 소진이 혼자 집에서 간택 수업을 받겠다고 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정의 여식이 간택에서 떨어지기 위한 수업을 받는다는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부인은 초조한 얼굴로 영의정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염려 마시오, 부인. 우상 댁 여식도 이번에는 집에서 단독으로 개인 수업을 받는다고 하니.”
다행히 소진은 그 해괴한 수업을 잘 따르고 있었다.
“마마님, 혹 하품이 나오면 가끔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해도 될까요?”
그녀가 수업에 참여율이 높아질수록 두 사람의 근심도 늘어났다.
“녀석, 열심히도 합니다.”
그때, 하인 하나가 조금은 놀란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 대감마님……!”
영의정은 딱딱하게 굳어 하인을 돌아보았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
‘손님’이라는 말에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하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 말에 둘은 경직되고 말았다.
“궐에서…….”
“궐?”
“세, 세자 저하께서…… 납시셨나이다……!”
동시에 도자기를 머리에 이고 있던 소진의 고개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