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내 안사람이 될 여인이거든. (7/125)

7. 내 안사람이 될 여인이거든.

2020.10.23.

“정인은 어떻습니까.”

“네? 정인이라뇨?”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은 얼어붙고 말았다.

멍한 얼굴로 그녀가 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그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나와 함께 궐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정인…….”

소진은 ‘정인’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헌은 어깨를 으쓱하며 빙그르르 돌아섰다.

“싫으면 말고.”

“아니……! 선비님!”

돌아서는 그의 옷깃을 소진이 서둘러 잡았다.

“정인이라고 하면…… 입궐할 수는 있습니까?”

“…….”

“그러니까 별다른 의심 없이 저 문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어쩐지 그렇게 묻는 소진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가득해 보였다.

헌은 그런 그녀를 한 번, 대궐 문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문지기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건 낭자에게 달려 있겠지요.”

“예?”

“얼마나 자연스럽게 내 정인인 척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소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옷깃을 슬쩍 놓았다.

“하지만 종친들만 모이는 자리에…… 뜬금없이 정인과 동행하였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이맛살을 구기며 다시금 헌을 올려다보았는데, 그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어차피 왕족이랍시고 뽐내고 싶어 정기적으로 저런 회동(會同)을 하는 것이지, 별다른 큰 취지가 있어서 모이는 것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아…….”

“우리는 일반 양반들과는 격이 다른 왕족이다, 이런 것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라 누구라도 동행해 자기들을 봐주길 원하지요.”

헌의 말에 소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이런 모임에 제법 참석한 왕족 같아 보였다.

느리게 고갤 끄덕이는 소진을 바라보던 헌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진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헌을 의아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헌이 고개를 까딱하며 그녀를 응시했다.

“할 겁니까, 말 겁니까?”

“예?”

머뭇거리는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르듯 그가 물었다.

“내 정인, 말입니다.”

꿀꺽.

그 말을 들은 소진의 목울대가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깊이 숨을 내쉬며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얹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비님.”

청을 한 것은 소진 쪽이었기에 어쩌면 주도권을 헌이 쥐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청을 주고받은 사이에 흐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 위에 얹힌 자신의 손이 신경 쓰였다.

괜스레 헛기침하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 헌이 서먹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쥐고 있는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잡았다.

“……!”

훅, 들어온 온기에 소진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헌은 태연하게 손깍지를 끼며 그녀를 자신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소진은 휘청이며 그의 가슴팍에 안겼다.

당황한 그녀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가자, 소진아.”

헌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오금을 저리게 하는 그의 꽃 미소에 소진의 눈앞이 다시금 아찔해졌다.

어쩜 사내가 이리도 곱게 미소를 지을 수 있단 말이던가.

하긴 타고난 난봉꾼이니 뭔들…….

소진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에게 잡힌 손을 홱 빼냈다.

“뭘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하시는지. 흠, 흠!”

그녀는 멋쩍은 듯 헛기침하며 앞서 걸었다.

그러자 헌은 조금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내리떴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저자들이 보통내기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헌이 대궐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를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소진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럼 가지.”

두 사람은 어색함을 지워내지 못한 채, 대궐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내 헌은 자연스럽게 품 안에서 호패를 꺼내 문지기에게 보여주었다.

당연히 왕세자 호패가 아닌 미복잠행(微服潛行) 시에 종종 사용하던 다른 이의 호패였다.

그가 내민 호패를 살피던 문지기는 다시금 헌을 올려다보았다.

헌의 입술이 여유롭게 벌어졌다.

“오늘 종친 모임이 있어 들렀소.”

그 말에 문지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헌을 안으로 들여보내려는데, 곁에 있던 소진이 시야에 걸렸다.

“이 분은……?”

의심쩍은 눈으로 소진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그녀에게 위협적으로 바짝 다가갔는데, 헌이 그런 문지기를 막아섰다.

“내 정인이오.”

“……예?”

‘정인’이라는 말에 문지기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미심쩍은 빛이 거둬지지 않았다.

소진은 헛기침을 뱉으며 슬그머니 헌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정인이라고 하니 바짝 붙어 서야 할 것 같았기에.

하지만 시선은 아직도 서먹하게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문지기 둘은 뚫어지라 소진과 헌의 모습을 관찰했다.

정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영 어색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때, 문지기 둘은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송구하지만 오늘은 종친들만 참석 가능한 자리입니다. 규수는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망했네, 망했어.

소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헌이 잡은 손을 뿌리치려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갑자기 헌이 그녀의 손을 먼저 놓더니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

어깨 위로 퍼지는 그의 온기에 소진의 볼도 자연스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헌은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소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종친들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여인이라 그러네.”

그 말에 문지기들이 다시금 소진을 바라보았다.

“종친들이 모인 김에 눈도장이라도 콱, 찍어 두려고 그러는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헌의 손이 천천히 소진의 팔을 쓸었다.

한없이 다정하지만, 치명적이리만큼 뜨거운 손길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다른 손을 뻗어 그녀의 슬쩍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을 자상하게 넘겨주었다.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듯한 눈빛 또한, 잊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애정행각에 소진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어색한 미소만 띠고 있는데, 헌은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내 안사람이 될 여인이거든.”

은밀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헌이 소진을 뜨겁게 응시했다.

역시, 온몸에 난봉꾼의 피가 흐르는 사내다웠다.

타고난 그의 언변에 소진은 혀를 내두르며 존경스럽다는 듯 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헌이 문지기들에게 무언가를 은밀히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문지기들은 주위를 살피며 저들끼리 무어라 속닥댔다.

그러다 그들은 헛기침하며 서둘러 헌에게 받은 것을 감추었다.

“드시지요.”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대궐 문이 열렸다.

헌은 다정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소진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헌을 올려다보며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휘황찬란한 대궐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화려한 궐의 자태에 소진은 입을 다물지 못하다, 문지기들에게서 멀어지자 헌의 손을 슬쩍 놓았다.

“감사합니다.”

“…….”

“한데 문지기들에게 무엇을 건넨 것입니까?”

그녀는 멋쩍게 인사를 올리며 그에게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돈 몇 푼을 쥐여주었습니다.”

“예……?!”

“돈 앞에 장사 없으니까요.”

헌의 말에 소진은 조금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덕분에 궐 안에 무사히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혼자 움직이겠습니다.”

그 말에 헌이 턱 끝을 어루만지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궐은 처음 아닙니까? 궁인들도 이 궐 안에서는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워낙 궐이 넓고 복잡해서.”

그때, 저 멀리서 정말 종친들의 한 무리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세자인 헌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 헌은 그들을 피해야만 했다.

헌은 소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우선 이쪽으로 오시지요, 낭자.”

곤란해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무리의 사람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진 역시 서둘러 얼굴을 가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헌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은 없으니.”

한참 그의 뒤를 쫓던 소진은 그에게 잡힌 손을 조심스레 빼냈다.

그러자 헌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더는 선비님을 곤란케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이미 정인과 동행하였다, 문지기에게 고하였으니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비님께 신세를 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반듯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어디를 가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돌아서는 그녀를 향해 헌이 물었다.

“무엇을 확인하러 들어와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 확인코자 하는 것의 목적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딱히 목적지랄 것도 없었다.

궐 안 분위기를 살피며 사라진 동네 여인들이 있는지 살필 생각이었다.

소진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딱히 가고자 하는 곳은 없습니다. 누구를 찾으러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그럼…….”

그 말을 남기고서 소진은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헌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갔다.

“……누구를 찾으러 들어왔다?”

헌의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현이 조심스럽게 헌의 곁으로 다가왔다.

“혹, 저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여인이 아닐는지요? 저하를 확인하려 입궐한 것은 아닐까요?”

그의 말에 헌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 태연하게 마음을 숨기고 거짓을 고할 만큼 대범하고 영악한 여인은 아닌 것 같다.”

“뒤를 따를까요?”

“너는 동궁으로 가거라. 동궁을 오래 비워두면 아니 될 것 같으니.”

“하면 저하께서는…….”

헌은 소진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가볍게 웃었다.

“정인을 홀로 두어서는 안 되지.”

“……?”

“오늘만큼은 내 여인이 아니더냐.”

그 말을 남긴 채 헌은 서둘러 소진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대체 어딜 가야 봉희를 찾을 수 있는 건지.”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전에 봉희부터 찾아야만 했다.

소진은 손바닥으로 슬쩍슬쩍 얼굴을 가리며 궐 안을 살폈다.

정말 이곳에 사라진 여인들이 있는 게 맞을지.

그렇다면 이 넓은 궐에서 그 여인들이 머물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을 터.

“궁녀……?”

그녀는 서둘러 제 곁을 무수히 스쳐 지나는 궁녀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죄다 같은 궁녀 복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궁녀들 틈에서 봉희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라진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들도 백성인데, 아무 이유 없이 궐에 가둬놓을 리는 없을 거고. 그렇다면 허드렛일을 시키려 입궐시켰을 것인데.”

치맛자락을 움켜쥔 소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궐 안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도 같았다.

소진은 담벼락에 기대서서는 황급히 움직이는 궁녀들을 관찰했다.

어딘가로 급히 향하는 궁녀들의 발끝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일렬로 맞춰선 그들은 오직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은 이들처럼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땅만 바라보았다.

덩달아 소진 역시 그들을 자세히 살피며 숨죽였다.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어허! 감히 누가 고개를 드는 것이야!”

날이 선 듯한 음성에 소진은 서둘러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한 무리의 궁녀를 이끌고 상궁 하나가 나타났다.

상궁 뒤를 따르는 궁녀들은 한눈에 보아도 겁에 질린 이들처럼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소진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궐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는 모두 이 가슴 속에만 담아 두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마마님.”

“궐 안 일을 입 밖으로 내는 자, 궐 밖 생활을 입에 담는 자.”

“…….”

“모두 엄벌에 다스릴 것이다.”

저 말이 무슨 말일까.

소진은 이맛살을 구긴 채 상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상궁은 주위를 한번 살피며 궁녀들을 이끌고 바로 근처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궁녀들을 소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언가 사건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녀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궐 밖 생활을 입에 담는 자라…….”

그때, 행렬 맨 끝에 선 궁녀 하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슬쩍 얼굴을 들었다.

순간, 그와 시선이 스친 소진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봉희……?!”

봉희와 너무도 닮은 여인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소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언뜻 스치듯 본 여인이었지만 소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봉희야.”

그녀는 서둘러 나무 뒤에서 나와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뒤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곤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뒤를 쫓기 위해 후다닥 뛰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전각 담벼락 아래에 도착한 소진은 안을 살피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었다.

“여기가 어디야……?”

으리으리한 전각이 눈앞에 나타났다.

높은 분의 처소인 듯 어마어마한 숫자의 궁인들이 처소 안을 다니고 있었다.

봉희가 속한 무리는 전각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봉희를 닮은 궁녀를 잡아 세우고 싶었지만 처소 안에 궁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소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치맛자락만 움켜쥐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뛰어 들어갈 기세로 그녀가 전각 안을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고 말았다.

“거기 누구요?”

***

모처럼 대비전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자의 국혼을 앞당기고 싶다는 중궁전의 연통을 받았습니다.”

영의정이 오랜만에 대비의 부름을 받고 대비전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단연 부름의 이유는 세자 국혼.

아무 말 없이 차만 들이켜던 영의정은 그녀의 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작금의 세자를 폐위하려는 화론파의 수장, 영의정과 세자를 지켜내려는 수론파의 우두머리, 대비의 불편한 만남이었다.

영의정은 고개를 조아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 곧 금혼령이 내려지고 조선팔도 여인들의 사주단자를 받을 것입니다.”

“이번 국혼은 전적으로 중전께서 맡기로 했다지.”

“예, 그리 알고 있사옵니다.”

백 년은 족히 묵은 능구렁이 같은 대비였기에 시답잖은 이유로 영의정을 대비전까지 부를 이유는 없었다.

분명 이번 국혼에 영의정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넌지시 알리기 위함이니.

하지만 그것 역시 영의정은 잘 알고 있었기에 쉽사리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세자께서 그대의 여식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미 그것은 대비에게 좋은 패를 쥐여준 것과 다름없었다.

영의정은 분노를 감추기 위해 더욱이 고개를 조아렸다.

“광명(光明)이옵니다.”

그 말에 대비의 입꼬리가 비식, 일그러졌다.

“광명이다?”

“세자 저하께서 미천한 소신의 여식을 거론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한 광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비는 그만 소리 내어 하하하, 웃고 말았다.

그러자 줄곧 고개만 조아리고 있던 영의정의 얼굴이 들렸다.

“이제는 솔직해집시다, 대감.”

“…….”

“그대와 내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곧, 그대의 발목을 꺾어 놓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궐에 있습니까?”

늙었지만, 해서 기력과 명성이 과거보다 많이 쇠퇴하였다고는 하지만, 대비는 여전히 구중궁궐, 최고 어른이었다.

희끗희끗 센 머리가 그녀가 살아온 세월과 동시에 이 궐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와야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영의정은 가만히 대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주단자, 어떻게든 빼돌리기 위해 애썼겠지요.”

“빼돌리다니요. 응당 국혼령이 내려지면 사주단자를 올려야 하는 것이 충신으로 해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세자의 국혼에 내 마지막 욕심을 부려볼까 합니다.”

마지막 욕심이라는 말에 영의정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늙은이가 죽지도 않고 마지막 발악을 부린다, 대신들은 욕할지라도.”

“……!”

“나는 끝까지 우리 세자와 주상을 지켜야겠습니다.”

의미심장한 그 말에 영의정이 여유롭게 실소를 터뜨렸다.

“암요, 대비마마께서 굳건히 자리 보존하셔야 세자 저하께서도 또한, 전하께서도 별다른 걱정 없이 국사(國事)를 돌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

“한데, 대비마마. 누가 들으면 저하와 전하를 해하려는 극악무도한 자들이 궐에 도사리고 있다, 생각하겠습니다.”

“…….”

“저 역시, 그 누구보다 저하와 전하의 안위와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신하로서 두 분 마마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영의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비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그대의 여식을 어떻게 초간택에서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최대의 난제(難題)였는데 세자께서 고맙게도 이 할미의 숙제를 대신해서 풀어주었으니.”

“……!”

“이제는 마음 놓고 초간택 장에서 그대의 여식을 볼 수 있겠습니다.”

“대비마마.”

“세자께서 언급한 이상…… 제아무리 그대들의 중궁전이라 할지라도 대감 여식의 사주단자를 빼돌릴 수는 없을 테니.”

강경한 대비의 말에 영의정의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이제는 정면 돌파, 그 방법밖에 없었다.

순간,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오겠다며 약조를 꼭 지키겠다는 소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영의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초간택 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대비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국구(國舅)가 되셔야지요.”

그 말은 영의정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겠다는 말이었다.

또한, 그것은 세자 헌을 반드시 보위(寶位)를 잇게 하겠다는 포부이기도 했다.

이젠 물러설 수 없었다.

오로지 나아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영의정은 대비를 따라 찻잔을 쥐었다.

“대비마마께서 그리 만들어만 주신다면야…… 소신, 기꺼이 전하와 조선의 안녕을 위해 가문을 바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영의정의 입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그래, 나의 목표는 왕의 장인(丈人)이지. 내 딸은 반드시 국모가 될 것이고. 하지만 상대가 틀렸다. 왕세자는 곧…… 바뀔 것이니.’

***

“앗……!”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진이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 누군가는 금방이라도 소진을 잡아챌 기세로 손을 뻗어왔다.

어떡하지? 이를 어쩌면 좋아……!

엿보고 있던 것을 들킨 것일까.

소진은 제 등 뒤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의뭉스러운 시선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꼼짝없이 어깨를 잡혀 얼굴을 들키겠구나 하던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소진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

촥―.

그러곤 소진의 눈앞에 커다란 부채 하나가 펼쳐졌다.

부채 덕에 그녀의 얼굴이 완전하게 가려졌다.

갑작스럽게 드리워진 부채에 소진의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예서 무엇 하는 것이냐. 한참을 찾았는데.”

이내 들려온 방금과는 다른 목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젖혀졌다.

그러자 반듯하게 뻗은 어깨 위에 잘 자리 잡은 굵은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목울대를 따라 시선을 위로, 더 위로 올리니 뜻밖의 얼굴이 소진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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