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나의 몸을 빌려 달라? (6/125)

6. 나의 몸을 빌려 달라?

2020.10.19.

“아니 될 소리다, 그건!”

소진의 말에 영의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아버지…….”

“사주단자라니! 항간에 떠도는 세자에 관한 추문을 정녕 너는 듣지 못했단 말이더냐?”

세자와 관련된 갖가지 소문이라면 그녀 역시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기방을 함부로 넘나드는 왕세자는 온갖 궁녀를 홀리다 못해 이제는 기녀까지 넘보는 호색한에 난봉꾼이라는 소문.

하지만 소진은 그런 이야기들에는 관심 없었다.

그녀는 그런 왕세자의 빈(嬪)이 되고 싶어 사주단자를 올려달라 부친에게 청을 올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봉희, 벗의 행방을 알기 위해 입궐하려는 것일 뿐.

그것 외의 다른 뜻은 결코 없었다.

소진은 다시금 눈빛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었다.

“잘 아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는 소진의 대답에 영의정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뭐……라?”

소진은 주먹을 말아쥐며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확인할 것이 있어 입궐하려는 것입니다.”

“네가 궐에서 무엇을 확인하려고 그러느냐?”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부친인 영의정에게 모든 것을 고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소진은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괜히 그에게 봉희의 이야기와 더불어 사라진 마을 여인들에 관한 소문을 알렸다가는 쓸데없는 일에 나서 가문에 먹칠한다, 혼쭐이 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초간택은 물론이고 외출 금지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제 부친인 영의정은 자신과 달리 냉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

또한, 양반과 노비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그는 백성들과 늘 스스럼없이 지내는 소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 영의정에게 이번 일을 말했다가는 되레 그 일을 그만두라는 면박을 받을 것이 뻔했다.

소진은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굳게 다물었다.

“그냥…… 별것 아닙니다.”

그러자 영의정은 좀 전보다 언성을 높이며 그녀를 외면했다.

“별것 아닌 일에 네 앞날을 걸어?”

“……아버지.”

“사주단자를 올리는 것이 무얼 뜻하는 줄 알고 지금 하는 소리인 것이냐?”

불같이 화를 내는 부친의 모습에 소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압니다, 아버지.”

“아는데 사주단자를 입에 올려? 그것이 너의 앞날이기만 한 줄 아느냐?”

“…….”

“한 가(家)의 명운이 걸린 문제다. 사주단자를 올렸다, 덜컥 간택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떨어진다 한들 세자빈 간택에 사주단자를 올린 여인이 어디 좋은 가문에 시집갈 수 있다 하더냐?”

영의정의 말에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모친, 정경부인 최 씨는 어두운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소진아. 세자빈 간택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란다.”

소진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돌아보는 모친을 향해 고개를 조금 조아렸다.

“소녀, 몰라 드리는 청이 아닙니다.”

“한데 어찌 사주단자를 올려 달라 하는 것이냐.”

“단지 궐 구경이 하고 싶어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사주단자를 올려 달라 하는 것이에요.”

제 처지를 좀 알아달라는 듯 소진이 간절히 손을 모았다.

하지만 영의정은 그런 그녀를 연신 외면했다.

“하면 그 사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

“내 들어 보고 너의 입궐을 허락해 줄 것이야.”

그러나 소진은 조금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멀리서 숙자 또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소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치맛자락만 움켜쥐었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소진을 내려다보며 영의정이 혀를 찼다.

“무슨 바람이 불어 사주단자를 올려 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

“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나 역시, 네 청을 들어줄 수 없음이다.”

그렇게 돌아서는 영의정을 올려다보며 소진이 소리쳤다.

“초간택까지만!”

“……?”

“딱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오겠습니다!”

어디서 나온 객기였을까.

소진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저도 놀라 흠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뭐라?”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오겠다는 그녀의 당찬 포부에 영의정은 헛웃음이 터질 듯했다.

“간택이 무슨 어린아이 소꿉장난인 줄 아느냐!”

그러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소진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호통에 소진은 작게 몸을 떨었다.

“네가 사주단자를 올렸다는 것이 대비전 귀에 들어가게 되면 너는 꼼짝없이 삼간택까지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삼간택까지요……?”

“영의정의 여식이 사주단자를 올렸다? 대비마마와 전하께 아주 좋은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

“…….”

“또한, 삼간택에 오른 규수는 까딱하면 세자의 후궁이 될 수도 있음인데……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고?”

영의정은 한껏 이맛살을 구긴 채 대책 없이 사주단자를 올려달라는 소진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소진이 꼭 세자빈에 간택이라도 된 것처럼, 매섭게 타올랐다.

영의정은 이내 등을 돌리며 안채로 들어서려 했다.

소진은 그런 그를 향해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제아무리 욕심이 나고 탐이 나는 가문의 규수라 할지라도 자질이 부족하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떨어뜨리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영의정의 고개가 다시금 돌아갔다.

“제 말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뭐라?”

“초간택까지만. 반드시 초간택까지만 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면 네가 초간택에서 떨어지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예. 세자 저하의 국혼이 결정되고 금혼령이 내려지면 어차피 조선 팔도 모든 여인이 사주단자를 올려야 하지 않습니까?”

영의정은 차분히 말을 이어가는 소진을 말없이 응시했다.

“어차피 올려야 할 사주단자라면 세자빈으로 간택될까 전전긍긍하다, 대비마마와 전하께 책(責) 잡히는 것보다 소녀가 나서서…….”

이내 그는 소진의 말허리를 뚝 잘라냈다.

“네가 나서서 깽판이라도 쳐 간택에서 떨어지겠다, 이 말인 것이냐? 그게 더 가문에 먹칠하는 일임을 정녕 모르는 것이야?!”

“아니, 깽판은 아니더라도…… 사소한 실수 몇 가지만 하면 알아서 상궁 마마님들이 저를 재간택 명단에서 제외하지 않겠어요?”

“오늘, 네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마.”

“아, 아버지……!”

그녀의 애원에도 영의정은 끝내 등을 돌리고야 말았다.

소진은 신을 벗고 마루 위로 폴짝 올라서며 안채로 사라져버린 영의정을 향해 소리쳤다.

“사주단자를 올린 그 많은 여인 중에서 저 하나 떨어져도 표시 하나 나지 않을 것이어요! 아버지께 흠이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초간택에서 통과될 여인보다 떨어질 여인이 더 많을 간택 아니어요? 아버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쥔 채 이미 닫혀 버린 안채 문을 바라보며 소진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곁에서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최 씨 부인은 소진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이리 떼를 쓰는 것이야, 소진아.”

차마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는 소진은 울상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최 씨 부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

다음 날,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소진은 동이 트자마자 대궐 앞으로 향했다.

오늘은 궐에서 종친들이 모이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궐 앞이 평소와 달리 북적거렸다.

아무 제지 없이 궐 안으로 들어서는 종친들을 보며 그녀는 발만 동동 굴렀다.

“어디 가서 종친의 호패라도 구해 와야 하나.”

그때, 한참 대궐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소진은 슬금슬금 대궐 외곽 벽으로 다가갔다.

“어쩌시려고요, 아씨.”

“궐도 사람 사는 곳인데…… 개구멍이라도 있지 않을까?”

“예? 그렇다고 이 벌건 대낮에 개구멍으로 들어가시려고요? 더군다나 오늘은 종친들 죄다 궐에 모이는 날이라면서요?”

숙자는 대책 없이 궐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소진을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손 놓고 있어?”

“초간택 작전은…… 아예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까?”

“너도 어제 보았잖니. 아버지 학을 떼시며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

“하면 인제 어쩌지요?”

“보은군 대감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진을 숙자가 환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하긴…… 보은군 대감마님이라면 주저 없이 아씨를 도와줄 건데 말이에요!”

“그러게. 대감이라면 두 손 걷고 도와주실 것인데.”

“맞아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보은군 대감마님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잖아요. 아씨의 모든 비밀을 알고도 늘, 함구하여 주시고 안방마님이나 대감마님 몰래 아씨를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래, 그만큼 막역한 사이니. 하지만 아마 국혼령이 내려진 시점이라 만나 뵙기 어려울 것이야.”

소진은 말끝을 흐리며 궐 담벼락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궐 안으로 통하는 구멍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시무룩하게 주위를 살피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아?”

크고 단단하게 뻗은 나뭇가지를 보며 소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했다는 듯, 숙자가 커다란 나무를 가로막고 서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씨께서 무슨 상상을 하시는지 알겠는데요.”

“…….”

“아니 되어요, 아씨. 그러다 다치면 쇤네만 혼쭐납니다?”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잖아. 궐 안에 사라진 동네 여인들이 있나, 없나만 확인하면 돼. 잠시만 보고 있으면 될 거야.”

“무술을 배우다 다쳐, 활 연습을 하다 손가락은 상처투성이야, 게다가 말을 타다 떨어져서는 발목까지 다치셨으면서.”

“…….”

“이젠 하다 하다 나무 오르다 떨어져서 다리마저 부러뜨리시려고요?”

숙자의 잔소리에도 소진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녀는 숙자를 향해 한쪽 눈을 깜빡여 보이며 자신만 믿으라는 듯 웃었다.

“다리 부러질 일 없어! 네 말대로 무술과 말타기로 연마된 탄탄한 몸이니 걱정하지 마.”

“아이참! 하면 차라리 쇤네가 오르겠습니다.”

“산도 못 올라 낑낑거리는 네가 이 나무를 오른다고……?”

어이없다는 듯 소진이 웃으며 나무를 가리켜 보였다.

“마음이라도 편하려고 그럽니다. 아가씨가 나무 오르는 것을 밑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오르다 떨어져 몸이 아픈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팔을 걷어붙이는 숙자를 소진이 가볍게 밀쳐냈다.

“비키거라, 괜히 떨어져서 몇 날 며칠 울지 말고. 대신 밑에서 나 좀 받쳐줘.”

숙자가 말리기도 전에 소진은 폴짝 뛰어, 낮게 뻗은 나뭇가지 하나를 맨손으로 덥석 쥐었다.

그러고는 낑낑대며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 아씨……!”

“나 발……! 발 좀 잡아줘!” 

그때, 잠행을 나갔다 환궁하던 헌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게 무슨.”

한눈에 보아도 양반집 규수 차림의 웬 여인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희한한 광경.

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윤현.”

그러다 곁에 있던 호위무사를 불렀다.

“예, 저하.”

“지금 저게 무엇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의 물음에 윤현의 고개가 소진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궐을 훔쳐보려는 자인 것 같습니다만.”

윤현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쥐었다.

그러자 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제지했다.

“그럴 것 없다.”

“하오나.”

“저러다 알아서 나무에 떨어질 것 같으니. 쯧쯧, 비가 오려나……. 별 정신 나간 자들이 궐 앞을 서성이는구나.”

무심하게 대꾸하며 헌이 다시금 궐 안으로 들어서려 발걸음을 옮겼는데.

“소진 아씨!”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진’의 이름에 헌의 발이 멈추고 말았다.

“한 규수……?”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규수의 얼굴을 정확하게 바라보았는데, 정말 소진이었다.

소진은 나무에 오르려 낑낑대고 있었다.

기괴한 그녀의 모습에 헌은 그만 핏,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가지가지…… 하는 여인이다.”

“예?”

“참으로 놀라워.”

홀로 그리 말을 내뱉던 헌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소진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헌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소진은 나무 위에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좀만 더 나를 올려 줘! 조금만 더……!”

이내 소진의 뒤에 바짝 다가선 헌은 무심한 얼굴로 소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낑낑거리며 그녀의 다리를 잡아주고 있던 숙자는 헌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에구머니나!”

그러다 쥐고 있던 소진의 다리를 저도 모르게 놓으며 뒷걸음질 쳤다.

“어, 어……?!”

숙자가 다리를 놓자 손에 힘이 풀려버린 소진은 그대로 나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 아씨!”

하지만 헌은 그런 소진을 놓치지 않았다.

“……!”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그녀를 가뿐히 품에 안아 든 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품에 쓰러지듯 안긴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탄탄한 헌의 팔이 그녀의 매끈한 허리를 감쌌다.

놀란 소진은 허둥대며 고개를 치켜들다, 헌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진의 동공이 자잘하게 떨렸다.

“선, 선비님……?”

그때, 놀란 그녀의 뺨 위로 웃음기 섞인 헌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떨어졌다.

“이제 만날 때마다 내 품에 안기기로 했습니까?”

언짢은 속마음과 달리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다 선비님께서 저의 동의 없이 안으셨거든요?”

소진은 그리 말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지워보려 했지만, 가빠지는 호흡 때문에 무리였다.

그러자 헌이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내 반듯하던 그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그런가.”

“……?”

“하면 내가 낭자를 자꾸만…… 안고 싶었던 것인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진의 아득해지려는 정신에 번쩍, 불이 켜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곤 그의 가슴팍을 세게 밀쳤다.

‘와, 하마터면 이 난봉꾼한테 홀릴 뻔했어.’

그러고는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눈치 없이 붉어진 뺨을 감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헌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또 빨개졌겠습니다.”

헌의 말에 소진은 정색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무슨 소리 하십니까? 날이 더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별꼴이라는 듯 눈을 희번덕거리자, 헌이 피식 웃었다.

“얼굴 말고.”

“예?”

“발목, 말입니다.”

소진은 짧은 탄식을 뱉으며 헌을 올려다보았다.

“아, 괜찮으니 제 발목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주변 공기가 왜 이리 후끈한지, 소진은 손부채질하며 애써 헌을 외면했다.

그러자 헌은 소진이 오르려던 나무를 힐끔 올려다보다 주위를 살폈다.

“한데 양반집 규수께서 어찌 몸종을 두고 직접 나무 위를 오르셨습니까? 나무 위에 무엇이 걸리기라도 했습니까?”

느긋한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웃음이 잔뜩 묻어 있는 듯했다.

꼭 무언가를 알고 묻는 사람처럼.

소진은 헛기침하며 흙이 묻은 치맛단을 손바닥으로 털어냈다.

“그런 선비님께서는 궐 앞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녀는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헌을 응시했다.

헌은 뒷짐을 지며 힐끔, 궐 안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볼일이 있어서.”

그 말에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궐 안에요?”

이미 그녀의 마음을 꿰뚫은 듯 헌은 느리게 이마를 쓸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소진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면 용무가 급해 먼저 가보겠습니다. 볼일 보시고 귀가하시지요.”

정중하게 그 말을 뱉어내며 헌이 소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껏 예의를 갖춘 채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소진은 서둘러 그를 불렀다.

“선비님……!”

돌아선 헌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톡, 톡, 톡.

머뭇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헌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혹 선비님…… 종친입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소진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저번에 보은군도 그에게 스스럼없이 ‘형님’이라 불렀던 것이 생각났다.

또한, 오늘은 궐에 종친들이 모이는 날이라고 들었는데 입궐을 한다니 순간 그가 종친인가 싶었다.

헌을 올려다보는 소진의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서렸다.

“그렇다면?”

어쨌든 세자도 임금의 아들이니 친족에 속하는 것.

헌은 터지려는 실소를 참아내며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혹 그러면…… 선비님!”

무언가를 바라는 얼굴로 소진이 헌의 앞에 섰다.

그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말씀하시지요, 낭자.”

느긋한 그의 목소리에 소진의 가슴이 다시금 떨려왔다.

“저…… 그러니까.”

“편히 말씀하십시오.” 

“제가…… 선비님의 혈육이 되게 해주세요.”

소진의 황당무계한 말에 순간, 여유 넘치던 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혈육이라니요?”

곁에 있던 윤현도, 숙자도 모두 당황한 얼굴로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주먹을 꼭 말아 쥐고서는 헌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늘 궐에서 종친들의 모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 급히 궐에 들어가서 확인할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소녀는 종친도 아니고 정식으로 입궐 청을 넣은 것도 아니라서.”

“…….”

“지금 당장 입궐하기에 무리가 있어서요.”

다짜고짜 혈육이 되어 달라고 말하던 것과 달리 소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해서 선비님의 혈육으로 함께 종친의 신분으로 입궐한다면…… 별다른 제지 없이 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헌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거짓 종친 행색을 하는데, 일조를 해달라?”

헌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물었다.

그러자 소진은 미묘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지요. 종친이신 선비님께서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지요.”

“그 말이 그리되는 것입니까? 한데 그러다 낭자께서 거짓 종친 행색을 한 것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그럴 일이 없게 만들어야지요.”

“자신 있습니까?”

“자신도 없이 그런 청을 드렸겠습니까?”

그녀는 다부진 음성으로 말하며 생긋 웃었다.

그러자 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열었다.

“왕족 사칭은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중죄가 적용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압니다.”

“하면 이유를 말해 보시지요.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서 저 궐 안에 들어가야 하는 연유.”

이유를 말하란 그의 말에 소진은 벌렸던 입술을 다물었다.

입을 꾹 앙다무는 소진을 바라보며 헌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연유를 제게도 말씀해주셔야 그 위험한 동행을 함께 할지 말지를 정할 것이 아닙니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소진은 차마 그에게 입궐하려는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었다.

소진은 슬쩍 묻었던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 이유를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더라면 굳이 선비님께 이리 부탁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아.”

“제 아버지께 청을 넣어 입궐하게 해달라 하면 간단하게 끝이 날 일이지요.”

그녀의 말에 헌이 가볍게 웃었다.

“해서 내 몸을 빌려 달라.”

‘몸’이라는 적나라한 단어에 소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몸, 몸이 아니라…….”

“한데 어쩝니까?”

느른하게 입가에 곡선을 그리던 헌이 굽혔던 허릴 곧추세웠다.

“내겐 누이가 없다는 것을 다른 종친들이 모두 알고 있어서.”

“……아?”

“혈육으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헌은 느리게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기다란 손끝을 따라 소진의 시선이 그의 붉은 입술 위에 닿았다.

헌은 찬찬히 소진의 표정을 살폈다.

“이왕 빌려줄 몸, 혈육 말고…….”

가만히 소진을 내려다보던 헌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찰나에 부딪혔다.

그의 눈이 뜨겁게 빛나기 시작했다.

헌은 다시금 허리를 숙여 소진과 눈을 맞추었다.

이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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