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품을 허락한 첫 사내 말입니다. (5/125)

5. 품을 허락한 첫 사내 말입니다.

2020.10.16.

소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곁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뜻밖의 얼굴이 소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비님?”

헌이 여유롭게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소진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대는 것 같았다.

“웬 놈이냐!”

그때, 소진을 잡아끌고 가던 사내는 헌을 향해 소리치며 그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헌이 피식 웃으며 소진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여인을 소중히 다루어야지. 그리 함부로 다루면 쓰는가.”

험악한 상황인데도 헌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내 그렇게 말하는 헌의 주위를 장정들이 순식간에 에워쌌다.

소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술잔과 기녀들의 옷고름만 쥐던 손으로 이 도적 떼 같은 놈들을 어찌 처리할 것이라고.’

하지만 소진의 염려와는 다르게 헌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소진을 보호하며 사내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이 샌님, 나서지 말고 비키시지.”

“서책만 만지던 그 고운 손 다 부러지는 수가 있으니. 하하하!”

헌을 조롱하며 사내들은 저들끼리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헌 역시 그들을 따라 피식 웃으며 이마를 어루만졌다.

“하면 내가 지금 실수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며 헌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당연히 실수하는 것이지.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사내들은 위협적으로 헌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헌의 뒤에 선 소진은 슬그머니 그의 도포자락을 잡아당기며 속닥거렸다.

“이보시오. 괜히 나서 곤욕을 치르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으악!”

그때였다.

소진이 도망이라도 치자고 말하려던 찰나, 헌은 주저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들의 턱을 차례로 가격했다.

“윽!”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는 장정들.

헌은 주먹을 가볍게 털며 소진의 손목을 잡아끌고 가던 대장의 멱살을 지그시 잡아 올렸다.

겨우 한 방이었지만 헌의 주먹이 얼마나 단단한지 사내들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누가 후회를 해. 나는 후회할 일 따위는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헌은 쥐고 있던 멱살을 거세게 놓으며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잡았다.

소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소진의 손목을 잡고서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는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대장이 헌의 어깨를 턱, 잡아챘다.

“어딜 가?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러자 자존심을 구긴 사내들은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뭣들 하느냐! 귀하신 분들 모시지 않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곳곳에서 숨어 있던 덩치 큰 장정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험악한 얼굴로 손에는 몽둥이를 든 채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왔다.

소진은 사색이 되어 헌의 옷깃을 꾹 쥐었다.

“서, 선비님…….”

헌은 피식 웃으며 겁에 질린 소진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겁먹을 거 없습니다. 내 뒤에 꼭 붙어 있으시지요, 낭자.”

어차피 멀지 않은 곳에서 호위대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헌을 향해 조금만 손을 뻗는다면 그들이 당장 달려와 헌을 호위할 테였다.

하지만 그런 헌의 사정을 모르는 소진은 다가오는 사내들을 한번, 호언장담하는 그를 한번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무기를 든 저들을 상대로 어찌 이기려 저러는 것일까.

소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헌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갑작스럽게 손깍지를 끼는 그녀를 헌이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설 데, 안 나설 데 구분 못 하십니까?”

소진은 이를 악문 채 복화술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손을 꼭 쥐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겁니다.”

“뛰자니요?”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는 소진을 헌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던 소진은 다시금 입술을 앙다물고서는 헌만 들리게 작게 중얼거렸다.

“조용히 좀 하십시오. 다 들리겠습니다.”

소진은 눈치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헌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태연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며 셋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

“셋! 뛰어!”

그녀는 다짜고짜 헌의 손을 잡아끌며 사내들을 헤집고 저잣거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는 눈치가 빠른 숙자 역시 군소리 없이 소진을 따라 냅다 달렸다.

“거기 서지 못할까!”

턱을 맞은 사내들도 잔뜩 골이 나 헌과 소진의 뒤를 쫓았다.

“낭자, 낭자……!”

“입 다물고 뛰셔요! 얼른!”

소진은 죽을힘을 다해 헌의 손을 잡고 뛰었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문도 모른 채 달리던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저 장정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까, 정면 돌파가 아닌 도망을 택한 모양이었다.

헌은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를 그녀의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러곤 얼굴이 시뻘게진 채 달리는 그녀를 앞질렀다.

“하면 손 꼭 잡으시오, 낭자.”

이내 힘에 부쳐 속도가 느려지는 소진을 헌이 이끌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

얼마나 뛰었을까.

주변을 살펴보니 저잣거리에서 꽤 떨어진 숲속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바위 뒤에 몸을 웅크렸다.

“이 근처에 숨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라……!”

악착같이 둘을 따라온 장정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숲속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진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행여 숨소리가 그들에게 들릴까 입을 틀어막았다.

주변을 의식하며 둘은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바짝 붙어 앉았다.

제법 가까이 붙어 앉은 두 사람.

미묘하게 헌의 열기가 소진의 어깨에 고스란히 닿고 있었다.

슬쩍 맞닿은 팔 사이로 열이 올랐다.

괜스레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 같아 소진이 그에게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에 소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고 헌은 주저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

얼결에 헌의 품에 안기게 된 소진.

소진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 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불편해도 잠시 이러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지막한 그의 말에 소진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왠지 뜨거운 것 같은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헌은 그런 소진을 뚫어지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의정의 여식이자 보은군과는 막역한 사이라…….

헌은 자신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 소진을 내려다보며 오늘 아침 영의정과의 설전을 떠올렸다.

―제 여식은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아이입니다. 감히 세자 저하께서 미천한 제 여식에게 관심을 두시니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파르르 떨며 노기(怒氣)를 삼켜대던 영의정의 모습이 꽤 볼 만했다.

―하면 이번에 간택령이 내려지면 대감의 여식도 사주단자를 올리겠지요?

―당연……하지요, 저하. 그것이 조선의 법도…… 아니겠습니까.

―기대해보지요, 대감의 여식.

그렇게 대답했던 헌은 지금 그 영의정의 여식인 소진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묘해졌다.

‘세자빈……이라.’

어쩌면 헌은 정말 자신의 보위(寶位)를 위해 이 여인을 자신의 반려(伴侶)로 삼아야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금 중궁전과 피 튀기는 신경전을 벌여야 할 것이었다.

헌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갔다.

그때, 슬쩍 그를 올려다보던 소진과 시선이 부딪혔다.

“흠, 흠흠…….”

괜스레 민망해진 소진은 헛기침하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난봉꾼이라 그런가…… 눈빛도 예사롭지 않네.’

소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릎을 감쌌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헌의 커다란 손이 신경 쓰였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두 사람을 찾던 사내들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자, 그제야 둘은 서둘러 떨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소진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발목이 시큰거려 왔다.

“아……!”

소진은 아릿한 발목을 감싸 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헌이 소진을 향해 성큼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발목을 다친 것입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몸종 아이가 사람들을 데리러 갔으니 선비님께서는 이만 가보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접질린 발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걸어가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헌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소진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잠시 실례하겠소, 낭자.”

그러곤 버선을 벗겨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제지했지만 헌은 제 무릎 위에 소진의 발을 올려놓고는 부은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진이 개방적인 여인이라고 해도 남녀가 유별한데 외간 사내에게 발목을 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소진은 서둘러 헌의 어깨를 밀어냈다.

“어, 어찌 이러십니까! 괜찮대도!”

하지만 헌은 그런 소진의 손을 뜨겁게 움켜쥐며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다시금 맞닿은 손에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굳었다.

“어, 어찌 손을……!”

그러더니 헌은 소진에게 바짝 다가가 고개를 젖히곤 그녀의 손을 깍지꼈다.

“한 번 잡은 손, 두 번이라고 못 잡겠습니까?”

헌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난봉꾼이…… 누구를 홀리려고?’

소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아까 그것은 곤경에 처한 선비님을 도와주기 위해 소녀가 피치 못하게 잡은 것이고……!”

“나 역시 발목을 다쳐 걷지 못해 곤경에 처한 낭자를 돕기 위한 것인데?”

어째 자꾸만 그에게 휘말려 드는 듯한 느낌에 소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곤경에 처했다고요? 보세요. 아주 말짱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을 다시금 내디뎌 보았는데, 무리였다.

“아!”

시큰거리는 통증에 소진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헌이 그녀를 부축해 바위에 앉히며 다시금 그녀의 발목을 쥐었다.

“잠자코 손길을 받든지, 아니면 확실히 거부하든지.”

“……!”

“하나만 하시지요, 낭자.”

그러곤 헌이 실소를 터뜨리며 퉁퉁 부은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하지만 소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훤히 드러난 종아리를 가리기 위해 치맛단을 꾸역꾸역 내렸다.

“되었다는 데도 자꾸 그러네. 나 원 참, 망측해서는…….”

“그대는 나의 상의를 벗기지 않았소?”

“…….”

“그러니 그대 한 번, 나 한 번. 공평하게 벗기는 것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민망해하는 소진을 올려다보며 헌이 말했다.

그러자 벗긴다는 말에 소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것은……! 여인의 손으로 사내의 옷을 벗긴 것이 아니라 의원의 손길로…….”

“나도 지금 그대를 여인이라 생각하고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아.”

“어찌 나의 손길이 사내의 것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

“이곳, 복숭아뼈에 혈이 뭉쳤습니다. 뭉친 혈을 제때 풀어 주지 않으면 걷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헌의 붉은 입술에 호선이 걸렸다.

순간 그의 말에 소진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처음 보는 여인의 종아리를 스스럼없이 주물럭거리는 그의 손길이 꽤 능숙해 보였다.

소진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다만 한두 번 주물럭거린 솜씨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낯선 여인의 종아리도 마다치 않고 만지작거리는 선비님의 모습을 보니 정녕 의원의 마음으로 소녀의 종아리를 만지는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하여.”

그녀의 말에 헌의 반듯한 고개가 젖혀졌다.

‘이건 또 무슨 속 뒤집는 소리지.’

그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병자를 돌보는 의원이든 소를 돌보는 농부든, 그 손길보다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그 손길을 받는 병자도 의원의 정성으로 병이 나을 수 있을 테니까요.”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아, 소진의 종아리를 주무르던 헌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가 피식, 바람 새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진을 올려다보았다.

“하면 낭자의 말은…… 내가 흑심이라도 품고 낭자의 발목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억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마요. 하도 다루는 손길이 능숙하여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헌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말을 참 예쁘게 하십니다, 낭자께서는.”

“……?”

“치료하는 이가 정성을 아주, 듬뿍 쏟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대꾸하며 헌이 소진의 가녀린 발목을 전과 다르게 세게 움켜쥐었다.

“아!”

소진은 발목을 감싸며 헌을 세차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헌은 소진이 그랬던 것처럼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이 난봉꾼 자식이……?’

소진은 그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며 주섬주섬 버선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흙투성이가 된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며 헌을 향해 고개를 대충 까닥였다.

“그때의 결초보은은 이것으로 갚은 거로 하시지요. 오늘 여러모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선비님.”

그녀의 말투는 잔뜩 딱딱해져 있었다.

그리 말하며 돌아서던 소진은 휘청거렸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저잣거리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어쩐지 땅에 닿는 발목이 아까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결초보은이 부족하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인가.”

홀로 중얼거리는 헌의 낮은 목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내 그는 몇 걸음 못 가 주저앉은 소진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소진은 놀라 굳어버렸다.

자신의 허리에 닿는 그의 온기에 그녀의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업히라고 하면 또 되었다고 내 등을 밀어낼 것이니,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내, 내려주시지요……!”

“하면 이 산속을 그 다친 다리로 홀로 내려간단 말입니까? 그러다 아까 그 사내들과 다시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더는 선비님께 신세 지고 싶지 않습니다.”

소진의 말에 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곤 그녀를 내려줄 생각이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선비님!”

소진이 곤란하다는 듯 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지그시 소진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리 어여쁜 낭자를 산속에 홀로 둘 수는 없지요. 그러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

“내 마음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소진의 발그레 달아오른 뺨 위에 내려앉았다.

어찌 선비님께서 속상하냐 되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소진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진은 부자연스럽게 침을 삼키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이내,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한데 어찌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낭자.”

“예?!”

“혹 사내의 품에 처음 안겨보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소진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물론 처음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기는 싫었다.

그녀의 말에 헌은 작게 웃으며 그녀를 다시금 바짝 끌어안았다.

“부들부들 떨어, 처음인 줄 알았습니다. 한데 조금 아쉽습니다.”

“……?”

“내가 낭자의 첫 사내가 되고 싶었는데.”

‘첫 사내’라는 말에 소진의 뺨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녀는 토끼 눈을 뜨고서는 헌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러자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작게 탄성을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물론 품을 허락한 첫 사내 말입니다.”

그러곤 잊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러다 정말 이 호색한에게 꼼짝없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소진은 이 난봉꾼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빨리 저잣거리에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헌과 헤어진 소진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관아를 갔지만, 예상대로 퇴짜만 맞은 채 봉희의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봉희 남편은 소진을 보자마자 엉엉 울며 그녀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소진아, 그자들에게 갔더니 정말 그 많던 빚을 간밤에 봉희가 다 갚았대. 이게 말이 되니? 어쩜 좋으냐. 어떡하면 좋아, 이 일을.”

그의 말에 소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상히 물었어?! 간밤에 홀로 나타났대? 그 많은 돈은 어디서 구했다 하고?”

“자기들은 죽어도 모른다고 관아로 가서 해결하라고만 해……. 결코 입을 열 자가 아니야.”

그 말에 소진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분명 관아까지 꽁꽁 쥐고 있는 걸 보면 필시 거물(巨物)이 배후에서 저들을 움직이고 있을 테야.”

그때 그녀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숙자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동네 사람들도 죄다 포기하라고 해요, 아씨. 그렇게 사라진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숙자의 말에 봉희 남편은 소진에게 무릎을 꿇으며 싹싹 빌었다.

“소진아! 너는 할 수 있잖아?! 응? 너는 양반이니까…… 관아에 가면 네 말은 들어줄 거 아니야?”

“방금 관아에 갔다 오는 길이야……. 단순 가출이라 어쩔 수 없대. 저번에 사라진 여인들도 모두 다른 사내들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나타났다고…… 그것과 비슷한 일일 것이라며 돌아가라 하더라.”

돌아온 소진의 대답은 그를 좌절하게 했다.

그러자 하나둘 모여들어 끌끌 혀만 차던 동네 사람들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봉희댁도 당했나 보네, 쯧쯧. 어쩌면 좋아.”

“아직 소문 못 들었수, 아씨? 죄다 실종된 여인들이 궐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잖아요!”

‘궐’이라는 말에 소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봉희 남편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무슨 수로 궐에 들어가겠습니까.”

관아에서도 안 된다, 빚쟁이들도 나 몰라라 하니 소진 역시 정말 복장이 터져 죽을 노릇이었다.

“아씨, 쇤네도 방금 그런 소문을 듣긴 들었습니다만……. 한데 정녕 그 소문이 사실일까요?”

그 소문이 참이라면 봉희가 아예 자취를 감추기 전에 궐의 담을 넘어서야만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면 알 일이지.”

이내 대궐 쪽을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은 사고라도 칠 기세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

“아주 미친 것이지. 제 앞날도 모르는 망나니 세자인 주제에 감히 누구의 여식을 넘봐!”

“하면 어쩔 것입니까, 대감. 금혼령이 떨어지면 소진이도 꼼짝없이 사주단자를 올려야 할 것을요…….”

영의정 사가(私家).

영의정 성준은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중전마마와 상의해 금혼령을 내리기 전 소진이를 보은군에게 시집보내야지요.”

“……전하께서 윤허하실까요?”

“윤허하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이번 가례도감은 전적으로 중궁전에서 맡기로 하였으니 중궁전이 민 소용과 상의해 서둘러 날을 잡을 것입니다.”

그는 우악스럽게 냉수 수발을 내려놓으며 수염을 닦았다.

“영 정사에는 관심도 없고 술과 여색만 찾는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감히 이 영의정의 여식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곧 폐위당할지도 모를 세자의 빈궁으로 내 귀한 여식을 갖다 바치랴? 초간택은커녕 사주단자조차 올리는 일 없게 할 것이니, 부인께서는 걱정 붙들어 매시오!”

때마침 봉희의 실종으로 영의정에게 청이라도 넣어볼 참으로 안채에 들어서던 소진은 그의 말에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세자빈……? 초간택?!’

그녀는 반색하며 서둘러 영의정의 앞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그러자 갑작스러운 소진의 등장에 영의정은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의정의 말대로라면 곧 세자빈 간택을 위한 금혼령과 함께 간택령이 내려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진은 어렵지 않게 초간택을 핑계 삼아 입궐할 수 있을 테였다.

그러면 마을을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의 진상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봉희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소진은 영의정을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세자빈 간택전(揀擇戰).”

“……?!”

“소녀가 나가겠습니다! 제 사주단자를 올려주세요, 아버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