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세자, 영의정의 여식을 탐하다. (4/125)

4. 세자, 영의정의 여식을 탐하다.

2020.10.12.

“뭐야……? 배은망덕으로도 모자라 난봉꾼이었단 말이야?”

소진은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사내 보기를 돌같이 하는 여인이라 그렇지, 너였으면 아마 홀라당 넘어갔을 게다. 아주 이 언변까지 수준급이었다니까? 난봉꾼이 따로 없었어!”

여전히 눈앞에 선한 헌의 잘난 얼굴에 소진은 기분 나쁘다는 듯 입술을 구겼다.

봉희는 그런 소진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빈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도 어째, 한소진. 책만 들여다보느라 사내에는 도통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용케 난봉꾼도 가려낼 줄 알고. 대단한데?”

“당연한 거 아니니? 이 언니를 뭘로 보고.”

소진은 피식 웃으며 봉희와 술잔을 마주쳤다.

‘쨍그랑’ 하는 맑은소리가 봉희의 집 안채를 울렸다.

얼큰하게 취해가는 두 사람은 날이 저무는지도 모르고 깔깔대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다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생각난 듯 봉희는 주위를 살피며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참, 너 그 소문 들었어?”

소진도 덩달아 몸을 웅크리며 봉희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여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대……!”

해괴망측한 소리에 소진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야?”

“옆집 소희 있지? 걔도 지금 실종된 지 사흘이 넘었대. 하루아침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야.”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봉희를 소진 역시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참이야……?”

“집안에 누군가가 악덕 고리 업체에 돈을 빌려 쓴 것 같은데. 더 희한한 건 여인들이 사라진 다음 날, 그 말도 안 되는 이자와 원금을 그 여인들이 간밤에 모두 갚고 사라졌다는 거야.”

“에구머니나, 그럼 그 빚쟁이들이 잡아간 것이네!”

소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술잔을 쥐었다.

왠지 오싹함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건 아니야. 저들도 모르는 일이라고만 해. 관아에 가보았자 단순 가출로만 치부하고.”

마을에 이리 심각한 일이 생기고 있었단 말이지.

소진은 당장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관아로 쳐들어가 사또를 만나보아야겠다, 생각했다.

“먹고 살기 힘들 때니…… 돈은 빌려야겠고 쉬이 빌려준다는 사람은 없고. 해서 덥석덥석 그들에게 빌리나 봐.”

봉희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또 소문에 의하면 그 여인들이 깊은 밤에 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대.”

“……궐?”

“응. 그렇지만 백성들이 쉬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니 들어가 확인할 수도 없고.”

어느새 소진도 봉희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양반들에게 마을에서 사라진 여인들이 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도와 달라 했다가 왕실을 기만하였다며 멍석말이를 당한 자들도 한둘이 아니야.”

세상이 어쩜 더 흉흉해지고 있는 것일까.

소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궐이라면 참으로 심각한 일인데…….”

그러다 어둑해지는 바깥을 바라보며 소진은 얼굴을 굳혔다.

“한데 네 서방은 아직이라니? 이거 또 애월루에 기어간 거 아니야?!”

해가 져도 귀가하지 않는 봉희의 남편을 찾으며 소진이 봉희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자 봉희는 조금 굳은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가 애월루에서 내 서방 혼쭐내준 다음에는 애월루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봉희의 표정은 어두웠다.

“표정이 왜 그래?”

눈치 백단 소진은 그런 봉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실은……. 애월루 기녀가 문제가 아니었어.”

봉희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래도 더 큰 고민이 있는 모양이었다.

“글쎄, 투전(投錢)에 손을 대고 있더라고.”

“뭐?! 투전?! 투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그것 때문에 집문서까지 날린 백성들이 몇인데 투전이란 말이야!”

투전은 괴질(怪疾)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적은 돈으로 시작해, 소소하게 돈을 따내는 기쁨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더 큰 돈을 얻고자 집문서까지 팔아넘기는 치명적인 중독 현상을 보이는 무시무시한 노름이었다.

“설마…… 투전에 손을 댄 것으로도 모자라 빚까지 진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런 것은. 그저 투전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술잔을 상 위에 탁, 놓았다.

“이 썩을 놈의 자식을! 투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너는 그걸 듣고 가만히 있었어?!”

소진은 봉희의 남편을 잡으러 갈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봉희가 서둘러 그런 소진을 막았다.

“그 사람 잡아서 두드려 팬다고 한들 답이 나오겠니? 봉희야 됐어, 앉아. 네 손만 아파.”

“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놔서라도 투전판 못 기웃거리게 방에 가둬 놓아야지! 너, 네 어머니 아버지께서 힘들게 농사일하며 마련한 이 집을 날리고 싶어서 그래?”

봉희는 소진과 다르게 양반가의 여식이 아니었다.

소진과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농민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소진은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그 때문에 평민이었던 봉희와 양반인 소진은 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빚은 아직인 것 같더라고. 그리고 다신 투전판 안 가겠다고 빌었어.”

“그 말을 믿니? 이 미련한 반편이!”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착하고 바보 같은 봉희가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럼 어떡해. 미워도 고와도 내 서방인 것을…….”

그렇게 말하며 봉희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소진은 그런 봉희에게 울컥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너 그러다 네 부모님이 가보로 남겨주신 이 집, 홀라당 투전판에 넘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어휴……! 답답이, 이 답답이!”

소진은 봉희의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대며 집을 나섰다.

봉희는 소진에게 둘도 없는 벗이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혼례를 치른 후, 저렇게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며 전전긍긍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소진은 속상한 마음에 돌부리를 툭, 툭, 걷어차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봉희가 신경 쓰여 소진의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헌은 중궁전으로 향했다.

뜻밖의 중궁전 호출이었다.

계비(繼妃)인 중전 신 씨는 정비(正妃)인 순렬왕후가 죽고 그 자리를 대신해 들어온 대제학 신 씨의 여식이었다.

기껏해야 세자, 헌과 네 살 정도 차이 나는 어린 여인이었다.

당연히 헌과는 척을 지는 사이였다.

“중전마마, 세자 저하 납시셨사옵니다.”

“드세요, 세자.”

헌은 저벅저벅 중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이 어미가 태동 때문에 거동이 힘들어 이리 직접 세자를 불렀습니다.”

중전 신 씨는 지금 회임 중이었다.

동그랗게 부른 배를 연신 쓰다듬던 중전이 가식적인 웃음을 띠었다.

그러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의정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헌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저하를 뵈옵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영의정이었다.

헌은 그의 얼굴을 보자 오늘 아침 윤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제 그 규수, 공교롭게도 영의정의 여식이었습니다.

―영의정의 여식이라……? 이것 참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겠군.

자신이 은인이라고 주장하던 그 여인이 바로 화론파의 우두머리인 영의정의 여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질 것이었다.

자신과 척을 지고 있는 가문의 여식이라.

그 여인이 은인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영의정과 편을 먹은 것인지, 더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화론파의 보루(堡壘)라 할 수 있는 보은군과 소진이 꽤 친해 보였으니, 어쩌면 영의정이 제 여식을 군부인에 앉힐 흑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영의정 같은 탐욕스러운 인간이 고작 서열 2위인 보은군에게 제 딸을 시집보낼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결국, 보은군을…… 왕세자 자리에 앉힐 요량인가.’

헌은 싸늘한 얼굴로 영의정과 중전을 한 번 훑어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영의정 대감도 들어 계셨군요.”

“예, 막 입궐하여 중전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사옵니다.”

영의정은 헌과 조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의 여식인 소진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니 그래도 영의정 대감과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중전은 헌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찻잔을 쥐었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녀의 입꼬리가 자꾸만 비식 솟으려 하고 있었다.

“우리 세자, 장성하여 혼기에 가까워지셨으니 좋은 배필을 이 어미가 맺어 주어야지요.”

그 말에 헌은 터지는 조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만한 사내에게 어린 여인이 자신을 ‘어미’라 칭하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조금 뒤에 앉았던 영의정이 헌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세자빈…… 간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중전마마.”

헌이 냉소를 머금은 채 중전과 영의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예, 대비마마와 함께 의논하여 날짜를 정해 곧 세자빈 간택을 위한 국혼령을 내릴 것입니다.”

“…….”

“이젠 세자도 왕실의 번영에 힘쓸 나이가 된 것이지요. 이 어미는 그저 우리 세자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따름입니다.”

중전은 제일 힘없고 볼품없는 가문의 규수를 그 곁에 앉혀 함께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볼 보듯 뻔히 보이는 중전의 속마음에 헌은 피식, 웃었다.

“뭐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것까지야. 직접 낳아 키운 것도 아니면서.”

헌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영의정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헌을 올려다보았다.

“저하, 중전마마께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순간, 영의정과 헌의 시선이 극렬하게 부딪혔다.

“아니요, 대감.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 어미는 우리 세자를 마음으로 낳아 마음으로 키웠다, 그리 생각합니다.”

“…….”

“참, 내 정신 좀 봐.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었는데.”

중전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헌을 응시했다.

“잠행을 꽤 자주 나가는 편이라 들었습니다. 혹 정인이라도 있습니까?”

“…….”

“있으면 편히 말해보세요. 적당한 가문의 규수면 내, 초간택 때 눈여겨볼 것이고 부족한 규수면 간택이 모두 끝난 후 후궁으로 들일 생각입니다.”

비아냥 섞인 중전의 말에 헌이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어 영의정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상하게 뜸을 들이는 듯한 헌의 태도에 중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리 뜸을 들이시는 것을 보니…… 정인이 있으신가 봅니다. 호호호.”

중전은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으며 배를 잡았다.

그러자 영의정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슬쩍 조소를 머금었다.

“정인은 아니옵고.”

중전과 영의정은 동시에 헌을 바라보았다.

“흥미를 한번 가져볼까 하는 여인이 하나 있기는 한데. 이것 참,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체하는 꼴을 보니 세자빈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기녀라도 하나 품었나 싶어, 영의정은 조소했다.

그러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전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소신 때문에 말씀 나누시기 어려운 것 같으니 소신이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이내 영의정이 두 손을 모은 채 뒷걸음을 걷기 시작했는데 헌의 입이 무지근하게 벌어졌다.

“영의정 대감.”

“……?!”

“내 대감의 여식이 몹시 궁금한데.”

조금도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중전도, 그리고 영의정도 모두 경악한 채 헌을 바라보았다.

“대감의 여식 정도면 세자빈에 적격이겠습니까.”

“아……!”

“아니면 후궁에 적합하겠습니까?”

그것은 정확히 영의정을 향한 도발이었다.

***

“그러니까 아씨 성질 좀 죽이세요. 봉희 댁 같은 착한 벗이 또 어디 있다고.”

“하니 지금 뇌물 갖고 가는 거 아니니. 속 그만 뒤집고 속히 가자.”

소진은 아침 댓바람부터 봉희네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봉희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봉희가 좋아하는 곶감을 잔뜩 들고서 소진은 봉희의 집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저 멀리서 봉희 남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집안 꼴이 왜 이래?!”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봉희 남편은 마당에 주저앉아 발을 버둥대며 울고만 있었다.

“봉희는……?”

순간, 안 좋은 예감이 소진의 뇌리를 스쳤다.

“소진아…… 이를 어째? 이를 어쩌면 좋아? 봉희가…… 봉희가 없어졌어……!”

봉희가 없어졌다는 말에 소진의 품에 안겨 있던 곶감 바구니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곁에 있던 숙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진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나랑 술 잘 마신 봉희가 왜 사라져!”

“……실은 어제 투전판에 갔다가 늦게 귀가했거든.”

“근데.”

“그거 때문에 봉희랑 한바탕 싸우고…… 홧김에 집을 나갔었어. 그런데 지금 돌아와 보니 집안 꼴은 이렇게 되어 있고 봉희를 암만 찾아도 없어.”

친정 식구도 없는 봉희가 이 아침 댓바람부터 갈 곳은 없었다.

봉희 남편의 말에 소진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뢰배들에게 보쌈이라도 당한 모양일까, 소진은 파르르 떨며 집 안 곳곳을 살폈다.

“뭐 서찰 같은 걸 남겨놓지는 않았고?!”

“응, 샅샅이 뒤져도 그런 것은 없어. 옷가지도 그대로고 몸만 사라진 것이야……. 이를 어쩌면 좋아.”

그의 말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집안을 뒤지던 소진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설마 하는 얼굴로 소진이 봉희 남편을 휙 돌아보았다.

그러곤 저벅저벅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너, 바른대로 말해.”

“무엇을.”

“무슨 돈으로 투전판을 기웃거렸어?”

“……어?”

“너, 일도 안 하잖아. 봉희를 도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한량거리면서 밥만 축내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투전판을 기웃거려?!”

그렇게 말하는 소진의 얼굴은 이미 화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에게 멱살이 잡힌 봉희 남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 그것이 말이야…….”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너, 혹시…… 빚을 졌니?!”

‘빚’이라는 말에 하얗게 질려가던 봉희 남편은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곤 자신의 주먹으로 머리를 쿵, 쿵 내려치며 울부짖었다.

“내가 몹쓸 놈이야, 내가 몹쓸 놈! 아주 나가 죽어야지, 내가!”

“뭐?! 정말 빚을 졌어?!”

“아니, 이자도 얼마 되지 않고…… 거액을 대뜸 빌려주겠다기에…….”

“……!”

“딱 한 판만 이기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돈이니까……. 정말 자신이 있었거든! 해서…… 딱 한 번만 한다는 것이…….”

소진은 그대로 봉희 남편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러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그에게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사람이니?! 인간이야?! 호강시켜주겠다며! 내 친구 봉희 호강시켜주겠다며 시집 들게 해놓고……. 뭐, 빚?! 사채를 써?!”

어느새 소진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러다 어젯밤, 봉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마을의 여인들이 점점 사라진대……!

그녀의 말대로라면 봉희 역시 그 사라진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의문의 세력에 의해 끌려간 것이 틀림없었다.

빚을 지지는 않았다며 남편을 감싸고돌던 봉희의 모습이 생각나 소진의 마음이 미어졌다.

“당장 그 고리대금업자들의 거처가 어딘지 말해!”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소진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봉희 남편이 가르쳐준 곳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갔다.

그 순간에도 봉희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 여인들이 깊은 밤에 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대.

소진의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거기가 호랑이 굴이든 나라님이 계신 궐이든. 내가 윤봉희, 너. 꼭 찾아낼 거야.”

어젯밤 그녀에게 실컷 화를 내며 돌아섰던 것이 자꾸만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

“나오라니까?! 돈 빌리러 왔다고!”

소진은 봉희 남편이 가르쳐준 곳을 찾아가 문이 부서지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소진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이번엔 발길질해댔다.

“어이! 비겁한 자식들아! 양반은 돈 안 빌려준다 이거냐?! 어?! 문 안 열어?!”

숙자는 그런 소진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씨……. 그만하고 차라리 관아로 가셔요. 예?! 이러다 뭔 사달이라도 날 것 같은데.”

“비켜서. 관아에 가봤자 그놈이 그놈이야.”

소진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주위를 휘휘 훑었다.

그러다 커다란 돌덩이를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것을 잡아들었다.

“어쩌시려고요!”

“안 열면 부수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이를 악물고 돌덩이를 던지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어허…… 성질머리 한번 고약한 규수로세.”

낮은 목소리에 소진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그러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장정 서너 명이 소진을 우르르 감싸기 시작했다.

“네놈들이 그 악덕 사채업자들인 것이냐?”

소진의 말에 장정들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진의 손목을 움켜쥔 사내가 그들의 대장인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소진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러곤 그녀의 차림새를 빤히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보아하니…… 명문가의 규수 같은데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납시셨나이까? 돈을 빌리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내 친구, 윤봉희 찾으러 왔네만.”

“……누구?”

“여기 아랫마을 조명석. 너희들한테 사흘 전에 돈을 빌렸다고 하던데? 그자의 부인을 찾으러 왔다고.”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풍기는 사내들이었지만 소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더 빳빳하게 치켜든 채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장정들은 피식, 코웃음 치며 더욱이 소진을 압박해 왔다.

“봉희인지 봉숙인지 우리는 그딴 거 모릅니다만?”

“모른다? 내가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내 친구를 직접 찾을까? 아니면 내 아버지께 고해 네놈들의 추악한 실태를 세상에 낱낱이 밝힐까?!”

소진이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장이 다시금 소진의 손목을 아프게 거머쥐었다.

“거…… 듣자 듣자 하니 규수의 언사가 무례하기가 그지없소만?”

“뭐?”

“누가 악덕이야. 그리고 누구보고 추악하대? 우리는 그저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넓은 마음으로 기꺼이 거액을 빌려주는 백성들의 단비 같은 존재인데?!”

“단비 같은 소리 하네. 네놈들에게 돈을 빌린 마을의 여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걸 내 모를 줄 알고?”

“그것이라면 관아에 가서 사또께 고하라고.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것이야, 짜증 나게!”

그렇게 말하며 대장은 소진을 한 대 칠 기세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소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더욱이 고개를 치켜들며 입술을 악물었다.

“오호? 때리게? 그래. 어디 때려봐. 감히 양반의 여식을 때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내가 양반, 상놈 편 가르는 거 죽기보다 싫지만, 조선의 법도가 그리 하다는데 어째?! 한 대 시원하게 맞고 내가 너 관아에 처넣어주마! 자, 때려!”

그녀의 고함에 사내들은 잠시 주춤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소진을 바라보는 대장의 눈빛이 순간, 번뜩거렸다.

이내 그는 피식 웃으며 소진의 위아래를 진득하게 훑었다.

어쩐지 그 눈빛에 소진의 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이리 어여쁜 규수를 때릴 곳이 어디에 있다고. 이왕 관아에 들어갈 거, 재미라도 보고 들어가야 덜 억울할 것 같은데.”

“뭐야?! 당장 이 손 놓지 못할까?!”

그 말을 위협적으로 내뱉던 사내는 다짜고짜 소진의 손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아씨! 아씨……!”

그때였다.

사내의 우악스러운 힘에 무자비하게 끌려가던 소진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러곤 소진의 손목을 움켜쥔 사내의 시커먼 손을 턱, 잡아챘다.

“때릴 곳도 없는 어여쁜 규수에게 이리 함부로 대하다니……. 몹쓸 사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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