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인으로 보자는 것입니까?
2020.10.09.
<낭자의 은혜를 각골난망(刻骨難忘) 하려, 밤새 그대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의 마음에 새겨 두려 하였으나 화를 내고 돌아서는 모습밖에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 낭자의 얼굴을 그리다 멈추고 말았소. 은인인 낭자의 고운 얼굴을 이 마음에 새기고 싶어, 감히 미완성인 용모화를 보냅니다. 부디 어제의 무례를 사과할, 그리고 은인인 그대의 미소를 내 마음에 새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영 개차반은 아닌 듯싶었다.
소진은 그가 그린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록 미완성인 그림이었지만 그 짧은 만남을 갖고도 자신의 얼굴을 기억해 이리 똑같이 그렸다는 것이 놀라웠고 가슴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뭐래요, 아씨?”
“기회를 달라는구나.”
“기회요……?”
종이를 곱게 접어 품에 넣으며 소진은 미련 없다는 듯 책방으로 쏙 들어섰다.
“아씨? 이리 예쁜 선물을 받고도 선비님한테 안 가시려고요?”
숙자의 물음에 소진은 알 듯 말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이왕 마음에 새겨질 은혜, 어여쁜 모습으로 새겨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도 같지만……. 어째 난봉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구나?”
***
윤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자나무 언덕으로 향하는 헌을 바라보았다.
마치 꽃잎이 휘날리는 듯 헌의 도포 자락이 바람결에 곱게 펄럭였다.
“그 규수께서 나올까요?”
자신 없다는 듯 윤현이 말끝을 흐리자 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부채를 소리 나게 탁, 펴들고는 얼굴을 반쯤 가리었다.
“당연하지. 세상에서 내게 제일 쉬운 것이 여인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던데…….”
“그래봤자 별수 없는 여인이 아니겠느냐.”
부채 너머로 눈만 내어놓은 헌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바람도 볕도 좋은 것 같았다.
흡족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헌을 향해 윤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한데…… 정말 아무 탈 없이 그 여인에게서 그날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소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위험한 접근인 것 같아…….”
그러자 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 멀리 보이는 정자나무 언덕을 응시했다.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다른 이는 절대 몰라야 할 비밀을 그 여인이 품고 있다.”
“…….”
“하니, 내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내가 세자라는 것만 숨기면 될 것이니 걱정 말거라.”
담담하게 그리 말하던 헌은 정자나무 언덕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정자나무 언덕에 다다르는 순간에도 소진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만만하던 헌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오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저하.”
점점 정자나무와 가까워졌지만 여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토라진 여인네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는 늘 용모화만큼 제격인 선물은 없었다.
“우선 조금 더 기다려……!”
그때, 뒷짐을 진 채 굳은 얼굴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헌의 뒤에 누군가가 성큼 다가와 섰다.
헌은 역시,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기다리던 소진이 아닌 뜻밖의 얼굴이 헌의 앞에 섰다.
“저하, 아니…… 형님을 뵈옵니다.”
“넌.”
왕위 계승 서열 2위, 민 소용(昭容)의 장자 보은군.
그는 밖에서는 ‘형님’이라 부르라던 그의 말이 생각나 황급히 말을 고쳤다.
무심한 눈으로 보은군을 내려다보던 헌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내심 그 여인이길 바랐던 헌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작은 아이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자신만큼 자란 보은군을 바라보는 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했다.
그러자 보은군은 조아렸던 고개를 슬쩍 들어 헌을 바라보았다.
“한데, 여기에는 어쩐 일로…….”
“기방에 술을 마시러 나왔다. 누구를 잠깐 만나려고.”
“아, 하면 함께 내려가 소인이 한 잔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보은군은 환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악의(惡意) 없는 순수한 웃음을 말없이 바라보던 헌이 그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어쩐지 보은군을 내려다보는 헌의 얼굴이 살벌하게 굳어져 갔다.
그러곤 허리를 슬쩍 굽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놈이 주는 술잔을…… 어찌 내가 편히 마실 수 있겠나.”
“예……?”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싸늘한 그 말을 남기며 헌이 다시금 허리를 들었다.
이내 다정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따뜻하게 토닥였다.
“마음만 받겠네. 다음에 한잔함세.”
“형님.”
그렇게 등을 돌리는 헌을 감히, 보은군이 막아서고 말았다.
그 순간 반듯하던 헌의 눈썹이 홱, 일그러졌다.
“뭐 하는 짓이지.”
“소인은 형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보은군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헌의 비싯 솟아선 한쪽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와…… 네가?”
“예. 저번에도 형님께 말씀드렸지만 소인은 절대 형님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는 보은군의 말허리를 헌이 잔인하게 잘라냈다.
“잊었느냐.”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제거하려는 화론파가 바라보는 이는 너라는 것을.”
“형님, 그것은 오해십니다. 소인은 그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보은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확고하게 제 뜻을 전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헌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중전마마의 배 속에 있는 용종(龍種)을 보고 있다는 걸, 형님께서도 잘 알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 말에 헌은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야 말았다.
“그것은 중궁전이 아들을 낳았을 때의 일이고.”
“……!”
“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 아니면 아직 그 정도의 머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냐.”
“형님.”
헌은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왕세자였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영특해 왕의 신임을 두둑이 받던 원자였지만 출신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무수리 출신 숙원 조 씨의 몸에서 태어난 세자 헌.
그것만으로도 헌은 몇 번이고 폐위 위기에 처하곤 했었다.
세자 헌을 몰아내려는 화론파와 그를 지켜내려는 수론파의 싸움은 이미 숙원 조 씨가 헌을 회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적통을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무수리의 배에서 나온 원자는 화론파들이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보은군은 달랐다.
민 소용의 장자이자 번듯한 외가를 둔 왕의 아들, 그는 날 때부터 헌과는 다른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헌은 머리가 굵어지고 아군과 적군을 철저하게 가려내는 눈이 생기자, 냉철하고 천재적인 면모를 숨기고 여색과 술을 밝히며 감히 기방까지 넘나드는 망나니 세자로 살게 된 것이었다.
날 때부터 타고난 용모에 능글맞고 뇌쇄적인 언변으로 온갖 여인을 홀리고 다니니 자연스레 헌은 화론파의 경계 대상에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헌은 그 점을 노린 것이었다.
적을 안심시킨 뒤, 적시를 노려 화론파의 머리를 치는 것.
“내 자리를 꿰차려면 조금 더 때가 묻어야 할 듯싶구나, 아우야.”
헌은 다시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보은군을 돌아섰다.
그런데 헌의 등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은군 대감, 여기서 다 만납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보은군과 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소진이 환하게 웃으며 보은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소진 낭자. 이 뒷산에 사냥하러 갔다 오는 길인데. 안 그래도 낭자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셔요?”
소진은 특유의 밝고 명랑한 얼굴로 보은군의 앞에 섰다.
아직 그의 곁에 서 있는 헌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저번에 부탁한 서책을 찾았거든요. 여기.”
“아, 그거라면 그리 급한 건 아니었는데. 고맙습니다, 대감.”
“내가 낭자 성격을 아는데. 읽고 싶은 건 금세 읽어야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보은군이 낮게 웃었다.
“안 그래도 혼자 힘으로 구해보려 했는데 역시 없더라고요.”
소진이 생긋 웃으며 보은군을 올려다보았다.
제법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왠지 헌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사실 보은군과 소진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오다시피 한 절친한 벗 사이였다.
남들은 보은군이 왕의 아들이라 어려워할 때 소진은 달랐다.
꼭, 동네 친구 대하듯 그를 편안하게 보았고 그 덕에 왕의 아들이란 이유로 외로이 자란 보은군에게 소진은 둘도 없는 존재였다.
“한데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대감.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소진의 물음에 보은군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낭자께서 걱정해주니 없던 고민도 녹는 기분입니다.”
“걱정거리는 나눌수록 반이 된다 했습니다. 마음 쓰이는 일 있으면 주저 말고 말씀하세요, 대감.”
고민거리도 나누는 사이라니, 헌은 흥미롭다는 듯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낭자.”
보은군은 그렇게 대답하며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 소진의 시선이 무심코 헌의 얼굴 위에 닿았다.
“아……. 선비님께서도 계셨군요.”
소진은 헌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환히 지어 보였던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자 헌은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서는 자신의 시선을 슬며시 외면하는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보은군, 내 이 낭자와 선약이 있어서.”
“아, 형님께서도 소진 낭자를…… 아시옵니까?”
세자 헌이, 영의정의 여식인 소진과 아는 사이라니.
순간 보은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형님’이라는 말에 소진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보은군과 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라.”
변명처럼 그 말을 덧붙이며 보은군이 멋쩍게 소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헌의 싸늘한 눈빛에.
“하면 말씀 나누세요, 형님. 소진 낭자,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예, 나리.”
“대감과 부인께 안부 꼭 전해주시고요.”
“물론입니다. 소용 마마님께도 안부 전해주셔요.”
“알겠습니다, 낭자. 하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두 사람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민 소용과도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라……? 대체 어느 가문의 여식인 것이지. 보은군과 혼담이라도 주고받는 사이일까.’
헌은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다.
보은군 역시 소진을 지나쳐 몇 걸음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헌과 단둘이 남은 소진이 걱정되었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을 차갑게 쏘아보고 있는 헌 때문에 억지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제 나누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어 볼까요, 낭자.”
헌은 보란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소진의 어깨를 짚었다.
그 모습에 보은군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더 보고 있는 것이 결례인 듯해 보은군은 속히 자리를 피했다.
돌아서면서도 보은군의 마음이 찝찝했다.
“보내주신 용모화는 잘 받았습니다.”
그때, 소진은 용모화를 받고 크게 감명받았으면서 아닌 척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자 헌은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고서 슬쩍 허리를 굽혔다.
부러 소진과 눈을 맞추며 은은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제의 결례는 용서하여 주시지요. 낭자의 말씀대로 선비의 기품을 잃고 순간의 감정이 앞서 은인에게 큰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
“고작 그림 한 장으로 낭자에게 저지른 실수를 모두 무마할 수는 없겠지만 제 마음이니 기꺼이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제와는 다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헌.
소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본색을 드러내시지……?’
아무리 정중하게 사과를 한다 해도 어제 제 멱살을 쥐고 흔들며 쥐새끼라 하던 그의 살벌한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수 있는 용기도 공자님의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지요.”
사과를 받아주겠다, 받아주지 않겠다는 말없이 애매하게 대꾸하는 소진의 모습에 순간 헌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래도 강력한 맞수를 만난 것 같았다.
“여인의 몸으로도 서책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보은군께서도 직접 서책을 이리 전하는 걸 보니.”
헌이 슬쩍 웃으며 소진이 품에 안고 있는 서책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소진 역시 빙그레 미소를 띤 얼굴로 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인이라고 하여 서책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무릇 배움에 있어 남과 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렇지요. 낭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해서 누구처럼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언이 앞서는 무지(無智)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배우고 깨우치고 있는 중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소진은 씩, 입가에 곡선을 그려 보였다.
그러니까 저 말은 지금 헌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폭력을 행사하고 폭언을 앞세우는 무지한 인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고.
헌은 자신을 향해 생긋 미소만 짓고 있는 소진을 내려다보며 그녀를 따라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그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쉽습니다. 참으로 박식하신 것 같은데 사내로 태어나셨으면 저와 함께 정사(政事) 이야기도 하며 조선의 안녕을 위해 힘써 볼 수 있었을 텐데요.”
어떻게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헌은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
“다 같은 사내라고 그런 중한 일을 함께 도모할 수야 있겠습니까. 자고로 이 마음이 통해야 그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에게 있어 소진은 어쩐지 태산과도 같은 여인인 것 같았다.
“어쩐지 낭자와 함께 그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아, 그러려면 먼저 이 마음이 통하여야 하는가.”
헌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방심하고 있던 소진의 뺨에 헌의 달콤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어쩐지 소진의 심장이 콩, 콩, 콩 작게 뛰는 것 같았다.
“하면 이 마음이 통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헌은 소진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조금은 상기된 소진의 얼굴이 폭, 담겼다.
그의 진득한 시선에 괜스레 소진의 뺨이 붉어졌다.
“마음이 뭐…… 사람의 힘으로 통하고 말고가 되겠습니까?”
소진은 괜스레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헌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은 그 용모화에 저의 사심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사심이라니요……?”
“밤새 낭자의 얼굴을 그리며 내일 꼭 낭자를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 내내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헌이 소진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어제 기방에서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한 헌의 태도에 소진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어떤 것이 이 사내의 진짜 모습일까.
헌은 부끄러워하는 소진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정녕 네가 내 은인이 맞는 것이냐.’
그의 눈빛이 불같이 타올랐다, 누그러졌다.
속내를 들키지 않고 소진에게서 그날의 일을 얻어내야만 했다.
“흠, 흠흠……!”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틈을 보일 소진이 아니었다.
‘누가 그딴 수작에 넘어갈 줄 알고?’
그녀는 한걸음 물러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숨을 구한 은인이 어디 보통 인연이겠냐만은 그래도 되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 은인인 소녀를 밤새 고마워하시며 각.골.난.망 하시었다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그녀는 ‘각골난망(刻骨難忘)’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소진의 말에 헌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럼 소녀는 이만.”
이내 소진은 서둘러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등을 돌렸다.
그런데 헌이 그런 소진의 손목을 지그시 잡아 다시금 자신을 보게 했다.
“어……?!”
놀란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헌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손목에 닿은 그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누가 은인으로 밤새 생각했대.”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는 헌의 눈길이 어쩐지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예……?”
소진은 떨리는 숨결을 애써 숨긴 채 그렇게 되물었다.
“밤새 내가 이 종이 위에 그린 것은 은인이었으나.”
“…….”
“머릿속에 내내 떠올린 것은 결코 은인만이…… 다가 아닐 텐데.”
그의 눅진한 숨결이 소진의 여린 살결 위에 닿았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소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는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도는 것도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낭자를 보았으면 합니다. 낭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애매모호한 그 말에 소진이 목구멍에 힘을 주었다.
“계속해서 보자 하심은 은인인 저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혹…… 여인으로서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소진의 떨리는 그 물음이 헌의 뺨에 아슬아슬하게 닿자,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입술이 뜨겁게 벌어졌다.
“당연히.”
괜스레 헌의 대답을 기다리게 되는 소진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뜨겁게 젖은 헌의 입술 위에 닿았다.
소진의 검은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헌은 잔뜩 긴장해 얼어붙은 소진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전자(前者)이지요.”
“……!”
“아무리 낭자께서 괜찮다고 사양하시나 어찌 공자님의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자로서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
소진은 순간 그의 허무맹랑한 대답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뭐야, 나 왜 긴장한 거야?’
그녀는 서둘러 그의 품에서 떨어지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건 되었다고 했잖습니까.”
소진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헌은 빙글빙글 웃으며 뒷짐을 지고는 슬며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저 그런 은혜가 아닌 낭자께 목숨을 얻었습니다. 보은(報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요.”
“사양을 거절하는 것 또한, 예(禮)는 아니지요. 부담스러우니 보은은 이것으로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헌이 그린 용모화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곤 서둘러 언덕을 내려섰다.
멀어지는 소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헌은 다시금 얼굴을 굳히고는 턱 끝을 쓸었다.
그때, 숨어 있던 윤현이 황급히 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헌은 표정을 굳힌 채 턱짓으로 소진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쫓아라. 오늘은 반드시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예,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