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경스러운 여인과 불손한 사내
2020.10.05.
“어, 어머나……!”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얼핏 스치듯 본 사내의 몸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소진이 다시금 가렸던 얼굴을 들어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이내 그의 뜨거운 눈길이 날아들었다.
“오늘은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분명 행수에게 일렀을 텐데, 전해 듣지 못한 것이냐.”
놀랐을 법도 한데, 사내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소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조금 지친 듯 보였다.
커다란 눈만 느리게 깜빡이는 소진을 향해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나와 함께 물에 젖고 싶어 날, 찾은 것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야릇한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내.
이내 소진은 빨개진 얼굴로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구겼다.
“아, 아니…… 소녀는 기녀가 아니라…….”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소진은 말문이 막혀 그저 말끝만 흐렸다.
그러자 그런 그녀의 젖은 머리 위로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하면 네가 기녀가 아니면 양반집 규수라도 된단 말이더냐?”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은 이미 젖어 속살이 훤히 드러난 소진의 저고리 위로 떨어졌다.
소진은 멋쩍은 듯 슬그머니 자신의 가슴팍을 팔로 가렸다.
“아, 이것은…….”
“그렇다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규수가 아닌가.”
그의 말대로 양반집 규수라고 하기에는 차림새가 단정하지는 못했다.
“한데.”
사내의 뜨거운 눈길이 소진의 눈, 코, 입을 눅진하게 훑기 시작했다.
소진의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처음 보는 기녀구나. 신입인가.”
사내는 빨갛게 부은 입술을 느리게 벌리며 소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해라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옵니다! 뭔가 선비님께서 오해하신 모양인데 소녀는……!”
무어라 설명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소진은 말끝을 흐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사내도 온천수 안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소진의 손목을 굳게 움켜쥐었다.
“가만있거라. 허둥대다 미끄러진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소진의 뺨이 화르륵 붉어졌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시금 벗은 사내를 힐끔 바라다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사내의 얼굴이 낯……익다?
소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사내의 얼굴을 심각하게 들여다보았다.
“지난번에는 내가 탈의하는 것을 훔쳐보며 내 벗은 몸까지 그려선 기녀들끼리 돌려보더니……. 너도 혹 그쪽 무리인 것이냐?”
사내는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진을 향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그러자 소진은 휘휘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구겼다.
“아, 아니옵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내는 소진의 얼굴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혼을 내는 것은 아니니, 그리 겁먹을 것은 없다.”
“아니, 그러니까 소녀는 기녀가 아니라 누군가를 찾기 위해…….”
“이리 근사한 사내의 벗은 몸을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여인은 세상에 없을 것이니.”
“예?”
“보고 싶고 눈에 담고 싶고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이리 불쑥불쑥 나타나 내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조금 곤란한 듯싶은데.”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어쩐지 소진을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은 기녀까지 물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소진이 뜬금없이 날아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가 날 법한 상황인데도 그의 감정은 조금도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소진이 당황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신입.”
“……!”
“나와 함께 있고 싶은 너의 마음은 알겠지만 내가 오늘은 몹시 피곤해서.”
사내는 그 말을 툭, 뱉어내며 소진을 향해 왼쪽 눈을 찡긋 깜빡여 보였다.
이렇게 잘생긴 사내가 대놓고 끼를 부리고 있으니 소진은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그의 얼굴이 자꾸만 낯이 익는 것 같아,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때였다.
사내의 잘생긴 얼굴을 뚫어지라 직시하던 소진은 불현듯 떠오른 얼굴 하나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뼉을 치고 말았다.
“아?!”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소진의 피가 몸을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내 역시, 소진이 빠졌던 온천수 위로 둥둥 떠 오르는 웬 손수건 하나를 발견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서, 선비님?!”
자신의 눈앞에서 헐벗은 사내는 바로 소진이 그토록 오매불망 찾아 헤맸던 그 풍등제 날 자신이 구해준 선비였다!
소진은 반가운 마음에 사내의 손목을 덥석 쥐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손수건을 거칠게 움켜쥔 사내는 이내 소진의 손목이 아닌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고 말았다.
“너.”
“어, 어……?!”
다짜고짜 자신의 멱살을 움켜쥐는 선비를 향해 소진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의 태도에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살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소진이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순간, 그와 시선이 얽혔다.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손에는 소진이 일 년 전, 그에게 미처 돌려주지 못했던 그의 손수건이 들려져 있었다.
“아, 그것은 소녀가 선비님께 돌려 드리려다가 못 드린 손, 손수건이온데…….”
소진이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는 순간에도 사내의 눈빛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손수건을 소진이 훔친 거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의 과정을 말해주려 소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는데, 사내는 소진의 멱살을 바짝 잡아당겼다.
“내가 지난날, 습격을 당했을 때 잃어버렸던 나의 물건을…… 애월루의 기녀인 네가 들고 있다……?”
“예?”
찬찬히 소진의 얼굴을 뜯어보며 사내가 무지근하게 입술을 벌렸다.
사실, 사내는 일 년 동안 그날 자신을 습격한 무리를 찾고 있었다.
그 무리가 애월루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다는 호위무사의 말에 사내는 일 년 내내 이곳 애월루를 드나들며 그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기녀 차림의 소진이 이 손수건을 들고 있으니, 그는 당연히 그날 자신을 죽이려 한 무리 중의 하나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찾았군.”
“……?!”
“쥐새끼 같으니라고. 네 배후가 누구냐! 당장 고하지 못할까?!”
좀 전과는 달리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호통을 치는 사내.
게다가 그의 호통에 어디선가 칼을 찬 호위무사들까지 나타나고 말았다.
쥐새끼라는 말에 소진의 눈이 커졌다.
“뭐? 쥐, 쥐새끼?”
그녀는 뒷머리가 뻐근해져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내는 더욱 무지근하게 압박하며 그녀를 거세게 흔들었다.
“네 배후를 당장 고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말 것이니.”
그중 단연 소진의 귓가에 콕 박히는 단어는 ‘쥐새끼’였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그 말에 그녀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러다 눈치 없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가체를 질끈 올리며 소진은 자신을 진심으로 죽일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나한테 ‘쥐새끼’라고 하시었나요?”
소진은 억울한 듯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직시했다.
“고하라고 하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날 죽이려 한 것인가.”
하지만 사내는 가뿐히 소진의 말을 무시하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차가운 음성에 소진의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소진은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적반하장이군. 당신, 잘못 짚었어. 지금 실수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구겨진 저고리를 털어내며 등을 돌렸다.
은인인 자신에게 ‘쥐새끼’라 말하며 무례하게 구는 그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는 성큼성큼 소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등을 잡아 세웠다.
그러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며 거칠게 그녀를 돌렸다.
“어딜 도망가.”
그의 냉랭한 목소리에 소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올렸는데 그가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놓지?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구해준 사람이거든?!”
그 말에 순간,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결국, 그의 손을 피하려고 뒷걸음질 치던 소진은 온천장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고 말았다.
하지만 사내가 소진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덕에 그녀는 온천장 끝에 겨우 발을 디디고 섰다.
이내 그녀의 얼굴을 빤히 훑던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구해준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사내의 오해에 눈물까지 핑 도는 것 같아, 소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슴 속이 뜨겁게 끓기 시작했다.
“내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하여, 내 입으로 당신에게 은혜를 베푼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소만!”
그녀가 빨개진 눈으로 말을 이어가자 사내는 굳은 얼굴로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날 밤 다친 당신을 의원에서 손수 치료했소. 그 손수건은 그날 그쪽이 내 앞에 떨어뜨리고 가는 바람에 내가 돌려주려 뒤따르다, 그쪽이 습격을 당해 급히 치료해 주느라 경황이 없어 돌려주지 못한 것이고.”
“기녀의 몸으로 민가에서……?”
헌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소진의 손을 움켜쥐었다.
“소녀는 기녀가 아니라고 아까부터 계속 얘기했습니다만?”
“하면 어찌 그런 차림으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내 그거까지 소상히 그 쪽에게 말해주어야 합니까? 한데 공자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교양과 인격을 갖추셔야 할 선비님께서 어찌 그리 무례하고 불손하게 구시는지요? 그대는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쥐새끼라고 하며 멱살잡이를 하시어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그의 손을 힘껏 잡아당겨 물속으로 함께 풍덩 빠졌다.
“……!”
소진의 말에 당황한 선비는 속수무책으로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소진의 허리를 서둘러 움켜쥐었다.
“그럼 그때 날 구해주었던 은인이…….”
소진은 자신의 허리를 잡아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사내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러곤 휘적휘적 홀로 온천장 안을 빠져나와 사내를 향해 자신의 가체를 냅다 던졌다.
툭―.
“아.”
그녀가 던진 가체는 그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했다.
“은혜도 모르는 이 배은망덕 같으니라고.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당신이 행여 잘못되었을까 봐 지난 일 년 내내 가슴 졸이며 그 손수건도 버리지 못하였는데……! 참으로 미련했습니다, 내가!”
소진은 그 말을 남긴 채 사내를 한참 노려보다, 황급히 등을 돌려 기방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굳은 얼굴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호위무사가 서둘러 물속에 빠진 사내를 꺼내 주었다.
“괜찮으시옵니까, 저하……!”
‘저하’라는 말에 헌의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사실 그는 이 나라의 왕세자 이헌(李憲)이었다.
헌은 사정이 있어 신분을 숨긴 채, 지난 일 년 동안 애월루를 드나들고 있던 것이었다.
세자 헌을 보필하는 윤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헌은 멀어져가는 소진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며 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은혜도 모르는 이 배은망덕 같으니라고…….
소진의 분기 어린 목소리가 헌의 귓가에 쟁쟁 울렸다.
“애월루에서…… 일 년을 버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 굳은 얼굴로 소진이 남기고 간 한 덩어리의 미역 같은 가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저 여인은 은인일 뿐…… 저하께서 그날 밤 미행하던 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윤현은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소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헌은 그런 윤현을 바라보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 은인도 아닐 수도 있지.”
“아.”
“손수건 하나만으로 어찌 믿어. 나를 죽이려다 얻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 않은가.”
그의 말에 윤현도 미심쩍은 눈으로 헌의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은인이든, 살수든. 어쨌든 그날의 일을 알고 있는 이가 나타났으니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아무래도 소신 역시 기녀 복장을 한 저 여인이 수상하긴 합니다. 저하를 해치려고 한 무리가 이 애월루에 숨어든 것을 소신이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대체 내게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헌은 그렇게 말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기억만 없었다.
분명히 지난 그믐밤, 풍등제가 열리던 날 습격을 받은 것 같은데.
대체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 것인지, 누구에게 왜 습격을 받은 것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의문의 그날, 헌은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머리를 다친 뒤 눈을 떠보니 낯선 의원이었다.
앞뒤 상황이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더 지체할 수 없었던 헌은 서둘러 환궁했던 것이었다.
―외부의 충격으로 인한 부분적인 기억 소실증인 것 같사옵니다. 응급 처치를 한 것을 보니 정식 의원의 손길이 닿은 것은 아닌 것 같고…… 민간요법으로나마 다행히 치료를 잘한 덕에 목숨을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피를 잔뜩 흘리고 나니 기억이 몽땅 사라진 뒤였다.
눈을 떴을 때는 잠행을 나섰다, 환궁하려 길을 잡던 기억만 있을 뿐 그 후의 기억은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
그 길로 동이 트자마자 윤현을 보내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찾으러 갔지만, 의원 영감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은인을 찾으면 일의 전말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행여 머리를 심하게 다친 자신의 건강 상태로 폐위 이야기가 나돌까, 헌은 자신이 머리를 다친 것을 극비에 부치며 한동안 잠행을 멈추었다.
헌은 답답함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히 내가 누군가의 뒤를 쫓고 있었을 것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는 나를 공격할 이는 아무도 없을 테지. 그렇다면 나는 왜 미행을 했던 것일까.”
“눈 깜빡할 사이에 저하를 놓치고 황급히 저하의 뒤를 따랐으나…… 저하께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습니다.”
“…….”
“저잣거리가 어수선한 것을 보아하니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고…… 미친 듯이 저잣거리를 뒤지던 중 이곳 애월루로 수상쩍은 무리가 뛰어드는 것을 소신이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애월루는 한양에서 제일 큰 기방이자 실세들이 모두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그 어느 곳보다 소식이 빠르게 돌았다.
이곳 기녀들 역시 한양의 거물들만 상대했기에 나라님도 모르는 비밀과 비리를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랬기에 헌은 지난 일 년 동안 기방을 드나드는 ‘망나니 세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쓴 채 이곳 애월루를 찾아 기녀들을 마주했다.
하지만 헌이 원하는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일 년 내내 애월루를 찾았지만, 헌은 그날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조금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내야 할 그날의 기억을 알고 있는 이가 나타났다니!
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저하…… 기억을 찾는 것도 좋지만, 정체가 불확실한 저 여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그러다 행여 저하께서 기억 소실증에라도 걸린 것이 소문이 난다면…….”
윤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자 헌은 무감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 년이 지났습니다. 일 년 내내 저하께서 기방을 드나든 보상을 이제야 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여기서 관두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일 듯싶습니다. 그들이 지금쯤이면 경계를 풀고 애월루에 얼굴을 나타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윤현이 조심스럽게 헌에게 의견을 올렸다.
“네 말대로 지난 일 년 내내 이곳 애월루에서 온갖 기녀들과 사람들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보고 동요하는 눈빛을 지닌 이는 없었다. 또한, 그날의 일을 언급하는 이도 찾지 못했지.”
“하오나…….”
“어차피 나는 그날의 기억조차 없는 기억 소실증에 걸린 천치가 아니더냐.”
“저하.”
“내가 목숨까지 걸고 미행하던 이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윤현 역시 심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 저 여인의 뒤를 따르거라.”
“하오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방금 그 규수를 찾아내야 한다. 은인인지, 은인인 척하는 살수인지. 저 여인에 대해 더 알아보아야겠다. 내 잃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유일하게 알고 있으니.”
그 말에 윤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저 여인을 찾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
“행여나 나의 정체가 밝혀지더라도, 해서 내가 기억 소실증에 걸렸다는 약점을 알게 되더라도.”
“…….”
“그래야 오롯이 나의 편에 서서 그것을 숨겨주지 않겠느냐.”
헌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어쨌든 지금 나는 불리한 상황에 부닥쳐 있으니, 저 여인에게서 내가 손해 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얻어낼 방법은 그뿐이다.”
“…….”
“완벽하게 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저 여인을 유혹……이라도 하실 거란 말씀입니까?”
윤현의 물음에 헌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
“기꺼이 해야겠지.”
***
다음 날, 소진은 책방에 가기 위해 숙자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섰다.
어제의 황당한 일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는 듯 소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아씨, 안방마님께 다리 부러질 뻔하면서까지 그 선비를 도왔는데…… 아주 쥐새끼 취급당하고. 억울해서 어쩐대요?”
숙자는 골이 난 소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응. 네 말대로 손수건 그냥 냅다 버릴 걸 그랬어. 쥐새끼라니.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니까요. 원래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도 티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맨날 아씨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시는 데, 요즘 세상에는 그런 게 안 통해요.”
숙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소진보다 더 화를 내자 소진은 피식 웃으며 숙자를 돌아보았다.
“하면 어찌해야 하는데?”
“아주 왼발까지 다 알도록 떠벌려야 하죠! 아씨께서 허구한 날 고리타분한 서책만 들여다보시니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것 아니에요.”
숙자와 어제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책방 앞에 다다랐다.
소진은 곁에서 꿍얼거리는 숙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고리타분한 서책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것을 어째?”
그런데 누군가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씨……! 잠시만요!”
다급한 사내의 목소리에 소진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는데 웬 무사복을 입은 사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소진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자 그는 소진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소인은 일 년 전, 아씨께 은혜를 입은 저희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무사이옵니다.”
그 말에 소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숙자 역시 팔짱을 낀 채, 사내를 험악하게 위아래로 훑었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도련님께서…… 어제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싶으시다고. 그리고 일 년 전 입은 은혜에 대해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 하시어 아씨를 이리 찾아오게 되었사옵니다.”
사내의 말에 소진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되었어요. 받을 사과도, 보답도 없으니 돌아가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책방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사내가 다시금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러곤 애원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한 번만…… 저희 도련님을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사의 간청에 소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지난날, 베풀었던 은혜를 도로 무르고 싶을 만큼 소녀는 어제 그쪽 도련님께 아주 크게 실망한 것을요?”
“…….”
“하니, 일 년 전의 은혜도 어제의 무례도 모-두 없던 일로 하자, 그리 전하여 주시겠어요?”
소진은 그 말을 힘주어 말하며 다시 등을 돌리려 하는데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 위로 향했다.
서찰인 듯, 종이 하나가 곱게 말려져 있었다.
“하면 이거……. 저희 도련님께서 전해주시라 하였습니다.”
“…….”
“혹, 마음이 풀리신다면 정자나무 언덕으로 나와주시겠습니까? 그곳에서 저희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저희 도련님의 진심을 받아주십시오, 아씨.”
머뭇거리는 소진의 손에 종이를 쥐여주고 사내는 사라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숙자가 소진의 팔을 쥐었다.
“아씨, 얼른 펴보세요! 서찰인가……?”
종이를 펴자 자신의 얼굴이 담긴 용모화(容貌畵)가 나타났다.
“와아……!”
용모화를 보자마자 소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풍성한 가체를 올린 채, 물에 젖은 소진의 모습이 종이 위에 곱게 그려져 있었다.
어제 잠깐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린 듯 보였다.
“어머나! 이거 아씨 아니에요? 너무 예쁘다.”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할 만큼 정성스럽게 그린 용모화.
괜스레 소진의 뺨이 어제처럼 다시 붉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채색을 하다만 그림에 소진이 조금 의아하다는 얼굴로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한데 왜 그리다가 말았대요?”
“글쎄……. 무슨 뜻이지.”
“어째 미완성인 채로 선물을 준답니까?”
그때, 용모화 한 귀퉁이에 작게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