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이건 무슨 수작일까. (1/125)

1. 이건 무슨 수작일까.

2020.10.02.

“아씨, 이번 풍등제는 지난해보다 훨씬 더 볼거리가 많아졌어요. 그렇죠!”

오색 빛의 풍등들이 캄캄한 밤하늘을 갈랐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풍등제가 열리는 날.

밤은 깊어 갔지만, 저잣거리로 쏟아져 나온 청춘남녀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소진 역시 자신의 몸종인 숙자와 함께 풍등제를 즐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풍등을 올려다보던 소진은 저마다 짝지어 다니는 남녀를 돌아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죄다 낭군님과 짝지어 풍등제 구경을 하는데 난 왜 너랑 이 좋은 걸 보고 있는지. 나도 내년 풍등제에는 낭군님하고 깨 볶으면서 노닐고 싶구나!”

“아가씨께는 보은군 대감마님이 있지 않습니까?”

‘보은군’이라는 말에 소진이 숙자를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보은군 대감과는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 어린 시절부터 벗처럼 자라온 것을 너도 알면서.”

“에이, 그래도 남녀 사이에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또 알아요? 보은군 대감마님과 국혼이라도 치러서 군(君)부인 이 되실지?!”

숙자의 말에 소진이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어디서 그런 소리 하면 혼쭐 날 줄 알아!”

“그러니까 허구한 날 케케묵은 서책만 붙들고 있지 마시고 다른 규수들과 꽃놀이도 다니셔요. 그래야 낭군님이든 뭐든 만날 것 아닙니까? 서책만 들여다보면 공자님께서 뭐 옛다, 하고 낭군님이라도 보내주신대요?”

숙자의 핀잔에 소진은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자신의 머리 위로 둥둥 떠 오르는 풍등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렇게 손 놓은 채 운명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가문에서 정해준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시집을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딱히 사내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처음 보는 이와 혼례를 올리는 것은 싫었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무심코 정면을 바라보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아……?”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굳은 얼굴로 돌진해 오고 있는 남자.

풍등제라 한껏 치장한 다른 이들과 달리, 단출하게 검은색의 무사복만 입은 사내는 많은 사람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차림새였다.

어쩐지 이 풍등제와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인 듯했다.

점점 좁혀 오는 그와의 거리, 그리고 선명해지는 사내의 얼굴.

고요하던 소진의 심장박동이 순간, 빨라지고 말았다.

또렷해져 오는 그의 얼굴은 소진이 한양, 아니, 이 조선 땅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모였다.

검고 깊은 눈동자, 반듯하게 자리 잡은 콧대와 입술.

화려한 비단옷으로 치장하지 않았건만 사내의 풍채는 남달랐다.

또한, 그에게서 풍기는 묘하고 야릇한 분위기도 소진의 시선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어느새 사내는 소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순간, 소진과 사내의 시선이 얽혔다.

사내는 무심하게 소진을 바라보다 왼쪽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소진도 본의 아니게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두 사람은 또다시 마주하고 말았다.

“앗.”

이내 사내는 조금은 붉어진 얼굴의 소진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잠시 비켜주시겠소.”

사내는 멍하니 자신만 빤히 올려다보며 비켜줄 생각을 않는 소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제야 소진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소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사내는 다시금 소진에게서 멀어졌다.

그런데 소진을 지나치는 사내의 품에서 손수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어, 저기……!”

소진은 황급히 손수건을 주워 사내를 불렀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빠르게 멀어져갔다.

손수건을 내려다보니 어여쁜 연꽃과 한 쌍의 고운 잉어가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아무래도 사연이 담긴 귀한 물건인 듯했다.

손수건을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향해 급히 뛰어가는 사내를 넋 놓고 바라보던 소진은 그를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필 내 앞에다 손수건을 흘리고 갈 건 뭐람.’

사내가 떨어뜨리고 간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채 소진은 사내가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렸다.

그 역시 누군가를 뒤따르고 있는 듯, 숨 돌릴 틈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 저, 저기, 선비님……!”

소진의 간절한 목소리는 사내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그녀는 행여 사내를 놓칠까, 치맛자락을 바짝 움켜쥔 채 그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사내를 따라 골목골목 돌아서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골목 깊숙이까지 다다르고야 말았다.

“하…… 하아…….”

소진은 차오르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으슥한 정적이 그녀를 덮쳐왔다.

풍등제가 열리는 저잣거리와는 달리 싸늘하기만 한 골목 안 분위기에 소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숨소리마저 숨죽여야 할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에 소진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사내가 돌아 들어간 골목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윽!”

사내가 사라진 쪽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온몸에 털이 쭈뼛쭈뼛 서는 듯했다.

소진은 본능적으로 그 비명이 사내의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는데,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그녀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선비님! 어떡해!”

사내는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소진은 의식을 잃어가는 그를 황급히 끌어안고서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여자와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청색 복면을 쓴 무사들까지.

그 순간, 장옷을 뒤집어쓴 채 달아나던 한 여인이 이쪽을 돌아보았고, 소진과 눈이 마주쳤다.

자기 또래의 앳된 여자.

차림새를 보아하니 양반가의 규수인 듯싶었고, 그 곁의 남자 또한 양반가의 자제인 듯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저…… 저 나쁜 놈들! 거기 서지 못할까?!”

소진은 사내를 품에 안은 채 멀어지는 놈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소진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쫓아온 숙자는 웬 피를 흘리는 사내를 안고 있는 소진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구머니나, 피, 피?! 퍽치기를 당한 것입니까요?!”

“아무래도 몹쓸 놈들에게 습격을 받으신 것 같아……! 빨리 의원으로 가야겠어!”

그렇게 소진과 숙자는 의식을 잃은 사내를 힘겹게 부축해 골목을 나섰다.

소진은 행여 무사들에게 들킬까 봐 어둠 속에 몸을 꼭꼭 숨긴 채 피가 나는 사내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사내는 희미하게 신음을 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소리가 끊어질 것 같아 소진은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머리만 다친 것이 아니었다.

칼에 베인 듯 사내의 오른쪽 팔에서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소진은 서둘러 의원으로 향했다.

***

“의원 영감! 계시오? 아무도 안 계시오?!”

힘겹게 그를 부축해 의원에 도착했지만, 애석하게도 의원은 비어 있었다.

“외근을 나간 모양이에요. 어쩌죠?”

소진은 행여나 습격자들이 따라붙었을까, 의원 문을 꼭 걸어 잠근 채 사내를 마루에 눕혔다.

그러곤 그의 상태를 천천히 살폈는데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우선 그녀는 의원 안에서 이것저것 치료할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아씨께서 직접 하시게요?”

“마냥 의원 영감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소진은 사내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깨끗한 헝겊으로 닦아냈다.

그러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동의보감…… 몇 쪽에 지혈 방법이 나와 있더라……. 생각해, 생각해내야 해, 한소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호통에도 끊임없이 서책에 관심을 가진 탓에 소진은 왈가닥이긴 했지만, 박학다식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성격은 선머슴하고 다를 바 없었다.

단아하고 우아한 용모만 보면 천상 규수 같았다.

다혈질에 활동적인 성정에 걸맞게 서책과 말타기를 즐겨 하고 무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이제는 부친 몰래 활쏘기까지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부친인 영의정 성준은 차라리 소진이 사내로 태어났으면 왜(倭)의 장군 목 몇 개는 땄을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더듬더듬 동의보감에서 읽은 지혈법을 기억해낸 그녀는 사내의 흐르는 피를 지혈하며 상처 유합에 탁월한 ‘자란(紫蘭)’을 곱게 빻아 상처 부위에 얇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깨끗한 헝겊으로 사내의 머리를 감싸 반듯하게 눕힌 뒤, 이번에는 피로 물들어가는 사내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을 치료하려면…… 옷을 벗겨야 하는데……. 어떡하지.”

소진은 사내의 옷을 슬며시 쥔 채 한참을 망설였다.

지체할수록 사내의 상태는 더 악화될 것이었다.

“송구합니다, 선비님……!”

머뭇거리던 소진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사내의 옷을 벗겨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온몸에 뜨겁게 열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내 소진의 손끝에서 사내의 앞섶이 툭, 벌어졌다.

그러자 잘 단련된 근육이 눈앞에 드러났다.

“아…….”

처음 보는 남자의 벗은 몸에 소진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한눈에 보아도 탄탄한 근육은 사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지만, 묘한 위압감마저 풍기고 있었다.

소진은 잘게 몸을 떨며 사내의 옷을 마저 벗겨냈다.

여실히 드러난 맨몸에 그녀의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딱 벌어진 어깨와 가슴, 성이 난 듯 부풀어 있는 근육과 여기저기 불거져 있는 힘줄까지.

현기증이 일 것만 같은 사내의 근사한 몸에 소진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하지만 소진은 정신을 차리고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물수건으로 사내의 몸 곳곳을 닦아냈다.

반 시진 넘게 이어진 소진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덕에 곧 뜨겁게 달아올랐던 사내의 몸이 정상 체온을 유지하게 됐다.

또한, 사경을 헤매는 듯 가쁘던 호흡도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휴우…….”

그제야 한숨을 돌린 소진이 털썩 벽에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듯 참으로 잘생긴 용모였다.

그때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숙자는 지체되는 시각에 초조해졌다.

“아씨,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이쯤 마무리하고 얼른 돌아가요.”

“그래도 선비님 깨어나시는 건 보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안방마님하고 대감마님 노발대발하실 것 같은데. 저분 상태를 보아하니 내일은 돼야 깨어날 것 같아요. 우선 의원에 놔두고 내일 아침 일찍 와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나요!”

숙자의 재촉에 소진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내의 핏자국을 모두 닦아내고 나서야 소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한참 동안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진은 그렇게 사내를 의원에 홀로 둔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다음 날, 소진은 그 선비를 만날 수 없었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부리나케 의원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요, 아씨? 머리를 다친 사내는 보지 못했는데.”

“어제 분명히 제가 여기 마루에 눕히고 갔는데…….”

아무래도 의원 영감이 돌아오기 전에 사내가 의식을 차리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소진은 허탈한 얼굴로 의원의 빈 마루만 돌아보았다.

“아, 혹시…….”

그때, 실망하는 소진을 향해 의원 영감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침 일찍 웬 사내가 와서는 어젯밤 머리를 다친 이를 부축해 온 자가 누구냐, 묻긴 했습니다만……. 소인은 아씨도 그리고 환자도 보지 못한 터라 잘 모르겠다고만 하고 돌려보냈는데.”

“아, 혹 그분께서 무언가를 남기시진 않으셨나요? 연통이 닿을 만한…….”

“아니요, 그런 것은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소진은 밀려오는 허탈함에 채 돌려주지 못한 손수건을 다시금 품에 넣어 두어야만 했다.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그 이후로 사내는 소진의 눈앞에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진은 그에게 미처 돌려주지 못한 손수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소중한 것인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젠 그 사내는 추억이 되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을 뿐 더는 마주할 수도, 또한 만날 수도 없었다.

“그 손수건 그냥 버리라니까, 왜 찝찝하게 아직 들고 계셔요.”

소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늘 동의보감에서만 읽던 치료법을 누군가에게 처음 해본 것이었다.

또한 사내의 옷을 벗긴 것도, 낯선 이를 보며 가슴이 뛰었던 것도, 소진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소진은 그 사내를 쉬이 잊지 못했다.

“살아는 계신 것이겠지? 그 몹쓸 놈들이 뒤따라와 선비님을 꽥, 처치해버린 건 아니겠지?”

소진은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숙자는 그건 아닐 것이라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날…… 선비님께서 무사히 깨어나실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는데……. 걱정이 되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소진이 입술을 삐죽이자 숙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그랬으면 아씨가 안방마님 손에 꽥, 처치되셨을걸요?”

소진은 돌려주지 못한 사내의 손수건만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그렇게 꼬박 일여 년이 흘렀을까. 

소진의 기억 속에서도 그 사내는 연기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진의 벗인 봉희가 속상한 얼굴로 소진을 찾아왔다.

“어쩜 좋으니, 소진아? 이러다 나 소박맞는 거 아냐? 차라리 그 기녀를 소실(小室)로 들여야 할까?”

소진에게 남편의 외도를 늘어놓다, 봉희는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벗의 눈물을 보자마자 소진의 가슴이 끓어대기 시작했다.

“뭐야?! 너는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것이야! 이 답답아!”

“그렇게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졌는데도 아까는 내게 발길질까지 하고선 또 애월루로 가시었어.”

이내 소진은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대며 한걸음에 애월루 앞으로 찾아갔다.

“뭘 어찌하려고 그래!”

금방이라도 무슨 사달을 낼 것만 같은 소진의 모습에 봉희는 주섬주섬 눈물을 닦았다.

“어쩌긴 뭘 어째. 들어가서 네 서방의 목덜미를 확 잡아 와야지!”

“기방을 들어 가겠다고……?”

“맹자께서도 부부유별(夫婦有別)을 강조하셨어. 아무리 막역한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공경하고 지켜야 할 본분이 있거늘. 감히 기녀에게 눈이 멀어 조강지처에게 발길질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소진은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무거운 가체를 끙차, 머리에 올리며 목을 빳빳하게 치켜세웠다.

마치 대궐을 머리에 인 듯 그녀의 얼굴보다 몇 곱절이나 더 크고 풍성한 가체가 그녀의 머리 위에 부담스럽게 올라섰다.

그러곤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하고 야한 저고리 고름을 야무지게 여미었다.

옷을 입은 건지, 만 건지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저고리는 요즘 기녀들 사이에서 최고 유행하는 옷이란다.

“너, 정말 그러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요사스러운 차림새의 소진을 바라보던 봉희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게 요즘 기녀 언니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데 별수 있어? 하여튼…… 파격적인 여인들이야.”

소진은 기녀처럼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그녀의 검고 영롱한 눈동자가 닿은 곳은 한양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기방, ‘애월루’였다.

소진은 힘껏 애월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풍류에 취해 자유분방하게 노닐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악기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내로라하는 가체를 이고 봄날의 꽃보다 더 화려한 차림을 한 기녀들이 분내를 풍기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 품에는 선녀 같은 기녀들이 하나씩 안겨 있었다.

아마 봉희의 서방도 여기 어딘가에서 저런 낯 뜨거운 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 봉희의 서방을 찾기 위해 기방 곳곳을 살피는 소진의 귓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저, 저!”

그곳에는 봉희의 남편이 기녀의 치마폭에 둘러싸여서는 좋다고 껄껄대고 있었다.

봉희는 지금 저 지아비 때문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기방 앞에서 쩔쩔매고 있을 게 뻔한데.

소진은 그대로 달려가 봉희 남편의 손에 쥔 술잔을 냅다 뺏었다.

“어머나……!”

반쯤 옷고름이 풀린 채로 봉희 남편에게 술을 따르던 기녀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뉘십니까?!”

“뉘신지는 네가 알 것 없고.”

소진은 자신을 가로 막고 서는 기녀를 가뿐히 밀치며 봉희 남편을 세차게 노려보았다.

“아, 아니……! 소진아!”

그러자 그는 자신의 벗이기도 한 소진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창백하게 질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봉희는 지금 너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울기만 하는데 너는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소진은 씩씩대며 그의 머리채라도 잡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봉희 남편은 잽싸게 피하며 서둘러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오, 오해다! 오해!”

“오해 같은 소리 하네. 이리 안 와?”

우당탕탕 술상을 뒤엎으며 달아나는 봉희 남편과 그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채 달려가는 소진.

잡을 새도 없이 멀리 달아나버리는 그의 모습에 소진은 술상 옆에 놓인 기생의 거문고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거문고를 든 채, 냅다 달리는 봉희 남편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봉, 봉희야……!”

금방이라도 거문고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것 같은 그녀의 기세에 그의 다리는 힘이 풀리고 말았다.

“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하였어!”

소진은 그 무거운 거문고를 한 손에 번쩍 들고서는 봉희 남편 앞에 섰다.

이곳, 기방의 여인들에게 거문고는 아름다운 악기였지만 그것이 소진의 손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녀의 무술 실력을 아는 그는 거문고가 곧 어마어마한 무기가 되리라는 걸 잘 알았다.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소진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그, 그것 좀 내려놓아라. 응?”

“네 조강지처 눈에 한 번만 더 눈물 나게 하면 이 거문고가…….”

“……!”

“꼭 손으로만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줄 것이야.”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거문고를 내려놓았다.

봉희 남편은 아연실색해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소진이라면 자신의 머리통으로 저 거문고를 연주할 여인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던 그때, 가까운 곳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저하께 망나니라니! 아무리 저하께서 계시지 않는 자리라고 해도 참으로 무례한 발언이오!”

익숙한 듯한 고함에 소진의 다리가 멈춰 섰다. 

그런데 그곳엔 거짓말같이 자신의 친부인 영의정이 대신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한 대감, 내가 뭐 틀린 말 했소이까? 후계자 강습은 나 몰라라 하고 정사에는 도통 관심도 없고 그저 술, 여색만 즐기시니!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일 년 전부터는 이 애월루를 동궁 드나들 듯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나라의 왕세자 저하시오! 체통을 지키시지요, 조 대감!”

“잠행은 핑계고 애월루에서 기생들과 놀다 보니 궐이 이젠 시시해진 것이겠지요. 하니, 주야장천 여기 애월루에 박혀 기생들과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겠지.”

“……어허, 저하께서 듣겠습니다. 목소리 낮추시라니까요?!”

그곳에는 소진의 친부인 영의정이 대소신료들과 함께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아……버지?!”

분명 오늘 숙부님과 사냥터로 가신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왜 저기 계시는 거지?

너무 놀라 굳어버린 소진의 다리는 애석하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데, 무거운 가체까지 쓴 탓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무심결에 이쪽을 돌아본 영의정과 소진의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소진을 발견한 영의정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소진은 비틀거리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 채 숨이 턱 끝까지 찰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커다란 전각 하나를 빙그르르 돌아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으리으리한 별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야외 온천장이 딸린 지체 높은 양반가들만 드나드는 극비의 별관.

“숨, 숨어야 하는데……!”

소진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그대로 온천장으로 돌진했다.

물속에 소진의 몸이 날아들자 사방으로 물줄기 튀며 꽃잎이 아름답게 흩뿌려져 있던 온천수는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기 숨어 있으면 찾지 못하겠지?’

소진은 코를 손으로 움켜쥐며 한껏 숨을 참았다.

그런데 자신의 팔에 무언가 미끄덩한 촉감이 느껴진다……?

온천수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소진의 명치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돋는 기분에 그녀는 물속에서 눈을 번쩍하고 떴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 잔뜩 성난 복근이 드러났다!

웬 사내의 벗은 몸인가 싶어 화들짝 놀란 소진은 코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물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진의 머리에 딱 달라붙어 있던 가체를 우악스럽게 잡아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

머리카락이 몽땅 뽑히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고, 동시에 소진은 밖으로 꺼내졌다.

“아, 아프오! 아프다니까요?!”

소진은 꽥, 꽥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가체를 휘어잡고 있는 누군가의 커다란 손을 떼어냈다.

“거, 사람 한번 되게 정 없이 구해주네! 내가 무슨 미역이오? 누가 보면 미역 건지는 줄 알겠소!”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릿한 두피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그 순간,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귓바퀴를 뜨겁게 움켜쥐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진은 화들짝 놀라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는 웬 사내 하나가 한쪽 눈썹이 일그러진 채,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바지만 입고서 온전히 옷을 갖춰 입지 않은 헐벗은 사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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