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을 문 짐승-108화 (108/110)

00108  짐승, 드디어 꽃을 물다  =========================================================================

열두 벌의 얇디얇은 붉은 화의(花衣)가 차곡차곡 입혀진다.

합임(合父, 옷깃을 마주 여밈)을 한 뒤 가슴 아래 대대(大帶, 관복 또는 예복 위에 두르는 넓은 띠)를 두른다. 화의와 마찬가지로 붉은 대대에는 생명과 다복을 상징하는 주작과 연꽃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치마단과 소매에 둘러진 두 줄의 금띠는 혼례를 치루는 둘 사람의 영원을 나타낸다.

상궁과 궁녀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기해는 화연의 쪽진 머리에 칠보화관을 올려주며 뒤로 늘어져 있는 개두(蓋頭, 면사포)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넘겼다.

정성스럽게 치장한 화연의 얼굴이 붉은 면사로 가려진다. 괜스레 마음이 울컥해 기해는 괜한 헛기침을 하면서 쪼그리고 앉아 개두 끝자락을 매만졌다.

화연은 기해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기해야......”

“흠, 흠... 예? 왜요, 아기......”

아기...까지 밖에 말 안했는데도 주변에 있는 상궁들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본다.

오랜 세월 그렇게 불렀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고치나. 거, 참. 사람들 빡빡하기도 하다.

기해는 상궁들의 귀신같은 눈초리에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화연을 향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시옵소서. 태자비마마.”

기해의 과도하리만큼 정중한 말투에 화연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겨우 막았다.

“......물 좀 마실 수 있을까? 아까부터 목이 말라.”

“목마르셨어요? 아유- 말씀을 빨리 하시지 왜 참으셨어요! 잠시 만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기해의 말투에 아니나 다를까 상궁들의 입에서 질책이 쏟아져 나왔다.

“저, 저! 기 상궁! 어투를 조심하시오! 마마께 그 무슨!”

“흥! 마마 앞에서 큰소리는 내도 되나보죠? 하 상궁이나 목소리를 좀 낮추세요!”

“......어 흠! 흠!”

엄한 목소리로 나무라는 상궁에게 기해는 보란 듯이 콧방귀를 날렸다. 화연의 시비노릇이나 하다가 갑자기 청화궁의 최고상궁으로 올랐으니 배 아픈 건 알겠는데......티를 너무들 내신다. 텃세가 생각보다 너무 심한데?

게다가 화연의 성격이 유 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지들이 윗사람이라도 된 마냥 매사 가르치려 든다. 상전을 모시려는 게 아니고 지들 손에 두고 쥐락펴락 하려는 심보가 눈에 선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기씨께는 말씀드려도 그냥 두라고 하실 것이 뻔 하니 태자 전하께 말씀드려서 세령과 미령을 데려와야겠다. 그때 니들 두고 보자.....

기해는 아무 내색 없이 탁자에서 물을 따라와 개두를 들어 올리고 물 잔을 건넸다.

“조심해서 드셔요. 흘리면 안 되니까요.”

“응......”

물 잔에 입을 대기만 하고 돌려주는 화연을 보고 기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왜 안 드세요?”

“응. 그냥 안 먹히네.”

“그럼 차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야. 생각 없어.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속이 안 좋아. 밖에 사람들 많이 왔니?”

“아까 제가 슬쩍 보니까 그 넓은 곳이 가득 메워졌더라고요. 아직도 꾸역꾸역 들어오는 눈치던데...”

대례식이 있는 날, 환제국은 황궁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양민들의 출입을 허가했다. 기쁨은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지만 화연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도 메슥거린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게다가 신에는 굽도 있었다. 무영과의 키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제작 한 모양인데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다.

화연은 식은땀이 날 것 같아 손부채질을 했다.

“아......더워.”

방긋 웃은 기해는 개두를 다시 내리고 매무새를 꼼꼼히 잡아준 뒤 일어섰다.

드디어 대례식의 시작을 알리는 북 소리가 울렸다.

*

자룡궁 앞 넓은 조정(朝廷)에는 삼도(황제의 가마가 지나가는 길, 조정 정 가운데에 있다)를 제외하고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은 황태자의 혼례를 보기위해 황궁에 방문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황궁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더랬다. 빼곡하게 들어선 백성들은 휘둥그레 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삼도를 따라 정복을 입은 금위들이 열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갖가지 깃발들이 선선한 바람에 나붓거렸다. 금위와 백성들 사이, 품계에 맞춰 서있는 대소 신료 중에도 직계자격으로 제일 앞자리에 있던 류 강연, 류 상연은 류 충의 양팔을 부축하고 있었다.

류 충은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마어마한 분노와 거대한 상실감과 엄청난 슬픔으로. 당연히 그중에서는 분노가 가장 컸다.

그러니까.....내 딸이 자리보전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짐승에게 물렸다는 거지......

류 충은 이 사실을 정말이지 인정하기 어려웠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됐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눈뜬 채로 곳간이 털렸다고 해도 이보다는 낫겠다. 어떻게 이런 몹쓸

불행이 내게 찾아왔단 말이냐! 이 일은 무조건적으로 짐승과 저 짐승 놈을 태어나게 만든 연제의 잘못이다! 젊은 능구렁이와 늙은 능구렁이 탓이라고!

“크흑.....!!”

옥좌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연제의 얼굴이 어찌나 꼴 보기 싫은지. 신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구나.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라도 황제라면 모를까 사돈에게 신을 던질 수는 없었다. 류 충은 대신 손수건을 질끈 물어뜯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류 충을 부축하고 있던 류 강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류 충의 얼굴이 뻥 터질 것처럼 붉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니 식이 시작도 하기 전에 쓰러질 수 있을 것도 같다. 다행히 아직은 잘 참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 난입해 화연을 들고 내뺄지 모른다.

류 상연의 기세도 예사스럽지가 않았다.

저 놈은 어제부터 말을 정상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 말인 즉, 어제부터 말도 못하게 화가 나있다는 것일 터. 오늘은 그나마 한마디도 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기세만 봐서는 어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류 상연의 흉흉한 기세에 주변에 있는 신료들이 슬금슬금 떨어져 섰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주변에만 사람이 뜸했다. 류 충에게 축하인사를 보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흘끔거리기 바쁘다. 축하를 해 줘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해줘야 할지 판단이 안서겠지. 그들의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고개를 돌리던 류 강연은 이쪽을 주시하던 형부상서와 눈이 마주치자 목례를 보냈다. 흐뭇한 표정으로 류 상연을 눈여겨보는 폼을 보니 예진이 드디어 말을 꺼냈나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저 놈을 상대로 애 꽤나 끓는다더니만 아예 가문을 이용할 생각이로군. 몇 번이고 대놓고 먼저 혼인신청을 하라고 충고했건만 여자의 몸으로 어찌......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며 꿋꿋하게 버티더니 결국 포기했나보다.

아무렴, 저놈의 구애를 기다리느니 곰에게 말을 가르치는 게 낫지. 그거 기다리다간 늙어 죽기 십상이다. 이제야 예진이 정신을 차렸나보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진즉에 신방을 차리고도 남았을 것을. 아무튼, 보아하니 머지않아 예진의 처녀단자가 들어오겠구나.

류 강연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부러움의 한숨이었다. 나도 어서 호림과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요즘 아버지의 상태로 봐서는 향후 5년간 혼례의 'ㅎ'자만 꺼내도 쫓겨날 판이다. 여러 번 탈출에 실패한 첫째 형님께서도 끝내는 상국의 공주와 대례를 올리신 다던데......거기에다 류 상연의 혼담까지 오고 간다면......나는......

“에휴......”

둥둥둥-

류 강연의 한숨에 대답하듯 북 소리가 울렸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고, 조정은 삽시간에 고요해 졌다.

용이 수놓아져 있는 검은 대례복을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쓴 무영은 반대편에서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화연을 보고 그만 잡고 있던 홀(笏)을 놓칠 뻔 했다. 가슴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무영은 씩- 웃었다. 소리 높여 웃고 싶었지만 뒤따라오던 진 내관의 작은 헛기침 소리에 꾹 참았다.

마주선 두 사람이 삼도를 걷는 것을 시작으로 대례식은 물 흘러가듯 진행 되었다.

화연이 우려했던 대로 거친 박석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없었고 연제께 올리는 배례 후 서로에게 하는 교배지례(交拜之禮)까지도 완벽하게 끝냈다. 문제는 합환주를 나눠 마시는 근배지례(卺杯之禮)에 있었다.

납작한 작은 잔에 채워주는 합환주를 무영이 조금 마시고 건네주는데 화연이 급히 입을 막았다.

“으읍!”

“연아!”

잔에 있던 합환주가 흔들려 화의에 흘렀다. 내내 날아갈 듯 기분 좋았던 무영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연제 또한 얼굴을 잔뜩 굳히며 옥좌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연......마마!!”

문무백관들 제일 앞자리에 서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류 충이 고함을 질렀고 그 소리를 들은 백성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들며 웅성거렸다.

뒤에 서있던 기해가 서둘러 다가와 화의에 묻은 술을 털어 내고 팔을 부축 했다.

“아기.....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으읍......하아, 하아......괜찮아. 냄새가. 흐읍.”

술 냄새를 못 맡는 화연에게 합환주의 냄새는 너무 독했다. 코 근처에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냄새가 훅 밀려들어오더니 속을 뒤집었다. 하지만 대례식에서 합환주를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화연은 숨을 멈추고 합환주를 조금 머금었다. 금세 하얗게 질리는 화연의 안색에 무영이 손을 뻗어 입 아래에 가져다 댔다.

“뱉어. 안 마셔도 돼. 어서.”

“......으읍!”

이제는 백성들까지 화연의 이상을 눈치 채고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 뱉을 수는 없었다. 화연은 입을 꾹 다물고 고집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억지로 머금은 합환주에 속이 울렁거렸다.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시키려 하지만 점점 메스꺼워지는 것이 삼켰다가는 도로 올리게 생겼다. 사람들 다 보는데서 흉한 꼴만 보이지 말자고 눈을 감고 속을 다스리다 결국 삼키려는데 무영이 성큼 다가 왔다.

“?”

화연의 허리를 감싸 안은 무영은 어? 하는 그 작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놀라 벌어진 입술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혀를 집어넣었다. 고개까지 모로 틀어 결합을 깊게 한 뒤 입안을 샅샅이 핥았다. 눈을 질끈 감은 화연이 무영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류 충을 포함한 문무백관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궁녀들은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가렸고 나이든 상궁들은 눈을 부릅떴다. 연제만이 눈을 크게 떴다가 씩- 웃는다.

“이런, 미ㅊ.....!! 읍!! 읍!!!”

이 해괴망측하고 남우세스러운 일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제일먼저 정신을 차린 류 충이 방방 뛰면서 욕을 하려는데 옆에 있던 류 강연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몸부림을 감당할 수 없자 주위의 관료들이 팔다리에 매달렸다. 어르신! 고정하세요! 하는 그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다 곧 엄청난 함성소리에 파 묻혔다.

우와아아아-

백성들이 입궁할 때 받았던 꽃가루를 너도나도 던지며 환호를 보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경망스러운 휘파람소리, 역시 남다르다는 소리까지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왔다. 방방 뛰기도 하고 머리위로 손을 올려 박수를 치기도 한다. 엄숙한 분위기이던 정전은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리위로 뿌려지는 꽃비를 맞으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 화연과 피식 웃은 무영이 연제와 백성들에게 각각 배례를 올렸다.

환호는 대례가 종료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다시 삼도를 지나 신방으로 향하면서 화연은 이를 꽉 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옆에서 웃고만 있는 저 뻔뻔한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주고 싶었지만 있는 힘껏 참았다. 둘만 있을 때면 모를까 관료들에 백성들까지 죄다 보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아까 그 입맞춤으로 입안에 맴돌던 술 냄새는 지워졌지만 조금 삼켰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거기에다 화를 참으려고 애를 너무 써서 그런지 머리도 어질어질 하다. 열두 벌의 화의가 점점 무겁고 갑갑해졌다.

화연은 신방이 차려져 있는 청화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어질어질한 머리를 감쌌다. 땡볕에 있다가 시원한 곳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무영이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하는데 귓속에서 웅웅거리는 이명 때문에 들리지가 않았다.

화를 내기로 작정 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바짝 나더니 핑- 하고 현기증이 더욱 짙어졌다. 거뭇거뭇해지는 시야에 화연은 더듬듯 손을 내밀었다가 무영이 그 손을 잡기도 전에 풀썩 쓰러졌다.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왜 내 새끼가 쓰러져! 멀쩡하던 내 새끼가 왜 쓰러져!!”

청화궁으로 달려온 류 충은 침상에 덮치듯 다가가 무영을 냅다 밀치더니 누워있는 화연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옆으로 밀린 무영의 눈썹이 못마땅함을 담고 쓱 올라갔다. 류 강연이 류 충의 뒤를 따라가다 무영의 눈치를 흘끔 보더니 작게 말했다.

“아버지, 언성을 낮추세요. 그리고 이제는 태자비 마마라고 하셔야지요.”

“흥! 내 새끼는 평생 내 새끼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내 새끼를 왜 그런 정떨어지는 호칭으로 불러야 한단 말이냐!!”

침상 앞 의자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 연제는 인상을 썼다. 자신을 본 척도 안하고 화연만 챙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저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에 겨우 잠든 내 며느리 깨어나게 생겼다. 애비가 되어 가지고 말이야 지 새끼 얼굴 파리한 거 안보이나?

“어허! 재상, 내 새끼든 남에 새끼든 간에, 아기 누워있는 거 안보이시오? 좀 조용히 하시오! 쯧.”

“......계셨습니까? 륜국 보상금 책정 문제로 정무가 바쁘실 텐데......?”

“지금 그딴 것이 뭐가 중요하겠소. 내 며느리! 가 이렇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연제의 표정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류 충 앞에서 내 며느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십년 묵은 체증이 한방에 내려가는 것만 같다. 내 며느리라고 백번 정도 외치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체통을 생각해서 참고 있을 뿐이다.

연제의 마음을 속속 들이 아는 류 충은 틀린 말은 아니니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입술만 씰룩거렸다. 대례식을 치렀으니 며느리는 며느리인데......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고 짜증스러운지 모르겠다. 저 수염을 확 쥐어뜯고 싶기도 하고. 근질근질한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던 류 충은 침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류 상연이었다.

“오- 셋째 왔구나. 어의는......응? 어의를 왜 업고 있누?”

“......너무......느려서......”

류 상연은 화연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눈물을 글썽거리다 화연이 쓰러지자마자 제일 먼저 의궁으로 달려갔었다.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박 준명을 냅다 보쌈 해 오는 길이었다.

박 준명은 류 상연의 등에서 내려와 식은땀을 소매로 닦았다.

다짜고짜 의궁에 난입하더니 자신을 들쳐 업는 류 상연에게 넌 누군데 대낮에 어의를 납치 하냐며 오만 욕을 다 했었는데.....납치 장소가 청화궁인지도 몰랐고 그 안에 재상에다 연제까지 떡하니 버티고 있을 줄도 몰랐다.

박 준명은 류 상연의 눈치를 흘끔 보다 침상으로 다가갔다. 긴장이 풀려 실신 한 것이 분명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 진맥을 잡으려는데 무영이 그 손을 턱 막았다.

“만지려고?”

누가 들으면 추행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다. 박 준명은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겨우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마, 만지는 것이 아니오라......진맥을......”

“보통은 손목에 실 같은 거 묶어서 하지 않아?”

어디서 들은 건 있어가지고......박 준명은 다시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그렇게 하기도 하오만 정확하지 않사옵니다. 결국에는 진맥을 잡아야 합니다만......”

“맞아?”

류 상연에게 시선을 준 무영은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제야 박 준명의 손을 놔주었다. 내가 어의인데 누구한테 물어 보는 거야!!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박 준명은 화연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조용한 가운데 류 충이 화연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멀쩡하던 애가 왜 이러는 거야. 기해야, 요즘 연이가 어디 아프다고 말 안하디?”

거물들 사이에 찌그러져 있던 기해가 고개를 들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니요. 그런 말씀 없으셨어요. 아프다고 하셨으면 제가 가주.....아니, 재상 어르신께 말씀드렸겠지요.”

“허, 참.....진짜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가? 애가 하도 몸이 약하니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네.”

가만히 생각하던 기해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 요즘 들어 덥다고는 종종 그러셨는데......오늘도 그러셨구요.”

“요즘 날씨가 초여름 날씨 아니겠느냐. 게다가 오늘은 화의까지 입었으니 덥지 않을 수가 없지. 한 겨울에도 저거 입으면 땀난다더라.”

“음......그럼 그거 외에는 없는데요? 조금 졸려 하시던 건 뭐......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으니 그러셨을 테고.”

“왜? 왜 밤에 잠을 못 잤는데?”

무영의 눈이 스산하게 가늘어지더니 기해를 주시한다. 그 속에서 입 조심하라는 경고를 읽은 기해는 화들짝 놀라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별건 아니고요......꾸, 꿈을 좀 꾸셨다고......”

“그래? 무슨 꿈을 꿨기에 잠을 설쳐. 에휴......큰일 앞두고 얘가 맘고생을 많이 했구나. 아이고, 내 새끼. 얼굴이 그냥 반쪽이 됐네.”

화연의 얼굴을 쓰다듬던 류 충은 손목을 잡은 채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박 준명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박 준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의 순탄했던 32년간의 어의 생활에 드디어 커다란 위기가 봉착했구나.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연제만을 생각하면 사실대로 말해도 좋겠지만 류 충을 생각하면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진다. 연제는 멀었지만 류 충은 가까웠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모르긴 몰라도 누구 한명은 죽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한명은 태자전하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태자 한명만이면 다행이지. 저 성정에 청룡궁에다 아무 죄 없는 의궁까지 없애버리겠다며 불이나 안 지르면 다행이다.

어, 어떻게 하지......말 안할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 따로 없구나.

그저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마음에 눈물대신 땀만 죽죽 흘리고 있는데 수상하게 여긴 류 충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진맥을 잡아도 잘 모르겠어?”

“......아, 아니......그것이......”

“쯧쯧쯧. 자네, 너무 나태해 진거 아닌가? 요즘 너무 게을러진 거 아니냐는 말일세. 가만......그러고 보니 저번에 태자전하께서 쓰러지셨을 때, 그때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신 거라고 했던 어의가 자네 아닌가? 맞지? 맞지?!”

“......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를 좀 해두지 그랬나! 사람이 죽을 때 까지 정진해야 하는 것이 공부일세!”

“......”

“자신 없으면 비키시게! 우리 셋째가 의술을 꽤 하니 저 놈에게 맡겨봐야지.”

내가 어의인데 누구에게 마마의 진맥을 맡긴단 말인가! 아무리 사가의 오라비라 하더라도 그건 안 될 말이다.

만......

그렇게 한다면 이 소식을 내 입으로 직접 말 하지 않아도 된다. 무능력한 어의가 되느냐, 분명히 터질 것이 예정된 폭탄의 범위에서 벗어나느냐. 고민하던 박 준명은 화연의 손목을 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셔도.......”

“으이구!...... 상아! 이리 오너라! 네가 연이 진맥을 좀 잡아 보거라.”

“......예......”

슬그머니 몸을 옮긴 박 준명은 처소의 문에 바짝 붙어 서서 불안한 눈으로 류 상연을 주시했다. 한참 진맥을 잡던 류 상연은 화연의 손목을 가만히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등에 멘 봇짐을 뒤적거렸다. 멀뚱히 보던 류 강연이 다가가 봇짐 안을 어깨 넘어로 보며 물었다.

“진맥 잡다 말고 갑자기 뭘 찾는 거야?”

“저번에 만들어둔 거.”

뭘 만들어 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불길한 예감에 류 강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 너......말이 왜 또 빨라졌어? 왜, 왜 그러는데? 뭐에 또 화가 났는데!”

류 상연은 팔을 잡고 흔들어 방해하는 류 강연을 밀어버린 뒤 봇짐에서 원하던 것을 찾았다. 손가락 길이의 거무스름한, 자기로 된 병이었다. 단단히 밀봉된 그것을 쳐다보던 류 강연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헉!! 상아!! 안 된다!! 큰일 나, 이놈아! 어서 그거 내려놔!! 어서!! 도대체 그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거 통하지도 않는다니까!”

“싫어. 죽여 버릴 거야.”

류 충은 류 상연과 그의 손 안에 든 것이 폭탄이나 된 마냥 필사적으로 부여잡는 류 강연을 번갈아 보다 결국 미간을 접었다. 연제도 니 아들들 왜 저러냐면서 눈짓을 보냈다. 연이 맥이나 잡아보라니까 저러고들 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류 충은 류 상연의 말에 눈을 뎅그렇게 떴다.

“응? 죽이다니? 누굴?”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저 파렴치한 노ㅁ.......읍!”

아슬아슬했다. 류 상연의 입을 잽싸게 막은 류 강연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마터면 황제 앞에서 태자를 욕했다가 목이 잘린 동생이 나올 뻔 했다. 니가 예전에 나를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쥐어 팼더라도......그래도 넌 내 동생이야.

전장의 푸른 늑대, 류 강연은 그 빠릿한 눈치로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상이가 연이의 맥을 잡다가 저렇게 쥐약 먹은 곰처럼 갑자기 날뛸만한 일은 딱 하나밖에 없다.

결국.....연이가 회임했구나.

어의도 회임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불뚱이 튈까봐 몸을 피한 것이 분명하다.

불안 불안 하더니만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못살아. 조심 좀 하시지!

류 강연은 기해의 손까지 빌려 날뛰는 류 상연을 침소 밖으로 끌어냈다. 문밖으로 나가 류 상연을 질질 끌고 가던 그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의는 다 알고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류 강연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청화궁을 울리더니 사그라졌다.

한바탕 난동에 어처구니가 없던 류 충과 연제는 류 강연의 말에 어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의 박 준명은 겨우 피했던 폭탄이 돌고 돌아 다시 제 앞으로 왔음을, 게다가 제 손으로 터트리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하...”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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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이 노블로 올라갔습니다. 본편에는 없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 꽃짐->3,4편 [짐승 위에 꽃있다] 보시면 됩니다.

소꽁듀님을 비롯하여 미성년자 분들...... 울지 마시고 하루 쉬세요. ㅜㅜ

이건 제가 어케 해드릴 수가 없음. ㅜㅜ

앞으로 그 외전 제외하고 두편이면 꽃짐은 끝이 납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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